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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STORY
사무엘하 6장 & 성경주석 본문
<사무엘하 6장 흐름정리>
다윗은 자신의 왕권은 물론이고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가 바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데에 있음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왕위에 오른 후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일을 추진했다. 언약궤는 블레셋에 의해 빼앗겼다가 아비나답의 집으로 옮겨진 이후부터 수십 년 동안 계속 그곳에 있었다. 언약궤를 옮기는 첫 번째 시도는 그 방법을 잘 알지 못한 탓에 실패하였다. 나중에는 레위인이 어깨로 메어 운반함으로써 무사히 예루살렘으로 옮길 수 있었다. 그 와중에 다윗은 너무도 기쁜 나머지 마치 어린 아이처럼 뛰놀며 춤추었다. 그의 아내 미갈은 이러한 행동을 업신여기다가 자식을 갖지 못하는 벌을 받았다.
<사무엘하 6장 줄거리>
1. 다윗이 궤를 새 수레에 싣고 기럇여야림에서 가져옴.
6. 하나님이 베레스웃사에서 웃사를 치심.
9. 하나님께서 법궤로 인하여 오벧에돔을 축복하심.
12. 다윗이 법궤를 시온으로 가져올 때 제사를 드리고 그 앞에서 춤을 추자 미갈이 그를 업신여김.
17. 다윗어 법궤를 장막 안에 두고 크게 기뻐하여 잔치를 베풂.
20. 다윗의 경건한 기쁨을 비난한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을 엊지 못함.
<사무엘하 6장 개역한글>
1.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뺀 무리 삼만을 다시 모으고
2. 일어나서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름하는 것이라
3. 저희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4. 저희가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행하고
5.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잣나무로 만든 여러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주악하더라
6.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8.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곳을 베레스웃사라 칭하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9.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10.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치우쳐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11.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12. 혹이 다윗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올라갈쌔
13.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14.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
16. 여호와의 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
17.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예비한 자리에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18.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19. 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의 무론 남녀하고 떡 한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떡 한덩이씩 나눠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20.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21.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22.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찌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23.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
<사무엘하 6장 성경주석>
6:1 다윗이…모으고.
더 긴 서론이 부가된 동일한 기사인 대상 13:1, 6~14을 참조하라. 다윗은 예루살렘이 국가의 정치적 수도일 뿐 아니라 종교적 수도가 되도록 작정하였다. 여러 해 동안 법궤가 기럇여아림에 있었는데, 이는 법궤를 엘리의 사망 후 블레셋에서 가져다가 그곳에 두었기 때문이다(삼상 7:1).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렘 전(殿)에 안치하기를 열망했다. 이 결의를 실행하기 전에 그는 국가의 지도자들을 모두 소집하여(대상 13:1~4) 자신의 계획에 관하여 의논하였다.
6:1 뺀 무리.
법궤를 옮기는 일은 인상적인 행진이자 국가적인 경사가 되어야 했다. 다윗은 왕국의 지도자 30,000명에게 이 엄숙한 축제에 참석하러 예루살렘에 모이라고 요청하였다.
6:2 바알레유다.
기럇여아림의 다른 이름(수 15:9; 대상 13:6)으로, 예루살렘에서 서북쪽으로 14.4킬로미터 부근에 있었다.
6:2 그룹들 사이에.
“사이에”라는 말이 히브리어 본문에는 없기 때문에, 그룹과 “거하시는”(「개역한글판」에는 “좌정하신”이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이라는 단어의 관계가 해석상 관건이 된다. “거하시는”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가 자주 “앉다”로 번역되기도 한다(창 18:1; 19:1; 21:16 등).
6:2 여호와의 이름.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고, 따라서 그분의 거룩한 이름으로 불렸다. 하나님의 백성(신 28:10)과 그분의 성전(왕상 8:43) 역시 그분의 이름으로 불렸는데, 문자적으로는 “야훼의 이름이 그것들 위에 불렸다”이며 이는 어떤 것을 소유한다는 의미이다.
6:3 새 수레에.
모세법은 법궤를 고핫 자손이 운반하도록 규정하였다(민 4:4~15; 7:9). 다윗은 이 지시에 유의해야 했지만, 법궤를 소가 끄는 새 수레에 싣고 운반하면 특별한 존경의 표시가 되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는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새 수레에 실어 이스라엘로 돌려보낸 것을 필시 기억했을 것이다(삼상 6:7~14). 그러나 그것은 경우가 전혀 달랐는데, 이는 블레셋 사람들이 아는 한도 내에서 최선껏 행동한 것이기 때문이다. 법궤가 이스라엘에 도착하자 모세에게 내린 하나님의 지시대로 레위인들이 그것을 수레에서 내렸다(삼상 6:15).
6:3 산에.
(「제임스왕역」에는 “기브아에”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 법궤는 기브아가 아니라 기럇여아림에 있었다. 아마도 여기서 “기브아”는 고유명사로 표기하기보다는 번역해야 한다. 기브아(Gib‘ah)는 “산”이라는 뜻이며 그렇게 65번 번역되었다(창 49:26; 출 17:9; 민 23:9 등). 그렇다면 아비나답의 집은 기럇여아림에 있는 산에 있었다.
6:3 아비나답의 아들.
법궤는 엘리가 죽은 후 아비나답의 집에 적어도 2, 3대 동안 있었다(삼상 4:15~18; 6:1; 7:1). 웃사와 아효가 “아비나답의 아들”로 불린 것은 “아들”의 히브리어 용례대로 단순히 아비나답의 후손이라는 뜻이다(참조 삼상 14:50 주석; 제2권, 82, 83, 88, 89). 웃사와 아효는 법궤가 자기들 집에 있을 때 관리하고 보호하였으므로, 그것을 예루살렘으로 운반하는 책임이 그들에게 부여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법궤를 레위 지파 고핫 자손들이 어깨에 메야 한다는 여호와의 뚜렷한 지시(민 4:15; 7:9)에 벗어난 것임에 틀림없다. 이 사건에서 하나님의 지시를 무시한 것에 대한 타당한 구실은 없었다.
6:3 그 새 수레를 모니라.
그들이 수레를 몰긴 했지만 그 위에 타고 가지는 않았다. 아효는 수레 앞에서 걸어갔고(4절) 웃사는 법궤를 주시할 수 있는 옆이나 뒤에서 걸어갔을 것이다(참조 6절).
6:5 수금과.
다양한 종류의 악기 목록은 다윗 시대에 음악 기술이 풍부했음을 나타낸다. 이때보다 적어도 1,000년 전인 애굽과 메소보다미아에서도 음악이 상당히 발달했다는 증거가 있다.
6:5 여호와 앞에서 주악하더라.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것은 인상적일 뿐 아니라 즐거운 행사가 되어야 했다. 거기에는 기악은 물론 동행하는 군중의 노래도 있었다. 법궤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으므로 그들은 그분 앞에서 기뻐한 것이다(참조 대상 13:8).
6:6 나곤의 타작 마당.
“기돈의 타작 마당”(대상 13:9)으로도 기록되었는데, 상이한 철자법이거나 사람 혹은 장소 이름이 둘 이상인 경우이다. 이곳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무런 단서가 없다. 아마도 소들이 타작 마당에 이르자 흩어진 곡물을 얼른 먹으려고 돌아서다가 문제가 발생했을 것이다.
6:6 손을 들어.
법궤는 거룩했다.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 외에는 아무도 만지지 못했다(민 4:15).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요구사항에 관해서는 엄격한 분이시다. 물론 블레셋 사람들은 법궤를 만지고도 아무런 해를 당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모르는 일까지 책임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께서 내리신 지시를 알았는데도 불순종했다.
6:7 진노하사.
사람은 외양만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심령을 살피신다. 웃사와 동행한 사람들은 웃사의 의도가 매우 훌륭하며 단지 법궤가 흔들리지 않도록 손을 뻗어 거들려고 했을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못하였다. 법궤를 만진 그의 행동은 참람한 행동이었다. 죄 많은 존재는 감히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만져서는 안 되었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명시된 명령을 무시하는 극악함을 못 본 척 지나치지 않으셨다. 웃사의 죄를 처벌하지 않고 지나갔다면 다른 많은 사람까지도 그 범죄에 휘말릴 뻔하였다. 웃사가 저지른 것 같은 잘못이 징계받지 않으며 범죄자가 하나님께 가납될 수 있다고 결론짓도록 허용되었다면, 웃사의 결점을 알게 된 사람들은 죄에 대해 매우 담대해졌을 것이다. 웃사의 죽음은 여호와께서는 모두에게 철저한 순종을 요구하시는 의로운 하나님이심을 많은 사람에게 보여 준 경고가 되었다.
6:7 저를…치시니.
웃사의 죽음을 지나치게 혹독한 심판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 사건은 민사 형벌로 종교적 위반 행위를 다루고, 현재는 더 이상 적용되지 않지만 범죄에 사형을 구형하던 신정체제(神政體制) 하에서 일어났다(출 22:20; 레 20:2, 9, 27; 민 15:32~36; 참조 행 5:1~11). 악을 막기 위해서는 엄격한 형벌이 필요하다. 만약 범죄에 대한 현재의 엄격한 법률이 느슨해지면 무법이 급증할 것이다.
웃사는 법궤와 함께 너무 오래 있어 익숙해진 나머지 불경의 정신이 그 안에 조성되었다. 그는 경솔하고 무분별한 참람죄를 지었기에 여호와께서도 그 죄에 맞게 그를 다루셨다. 이 놀라운 참사로 운집한 이스라엘 군중은 하나님의 명시된 명령의 중요성과 불경죄의 무서움을 인식하게 되었다.
6:8 다윗이 분하여.
웃사의 죽음에 대해 다윗이 불편해한 것은 그 마음이 전적으로 바르지 못했던 사실에 크게 기인하였다. 그가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에 있었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며 여호와의 뜻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나 완전하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행사를 불쾌하게 여긴다는 것은 그의 경험에 뭔가 잘못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윗이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의 잘못을 찾는 대신 마음에 숨겨진 악을 살폈다면 훨씬 나았을 것이다.
6:9 두려워하여.
다윗은 자기 생애의 몇몇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까봐 두려워하였다(참조 부조와 선지자, 706).
6:10 가드 사람.
(「제임스왕역」에는 “깃 사람”(Gittite)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블레셋의 가드 사람이 아니라 단이나 므낫세에 있는 레위인의 성읍으로 고핫 자손에게 할당된 가드림몬(수 21:24~26)에 한때 거주했던 주민일 것이다. 그러므로 오벧에돔은 특별히 법궤를 운반할 임무를 부여받은 족속의 일원이었을 것이다(민 4:15; 7:9).
6:10 오벧에돔.
이 이름이 대상 15:18, 21; 26:4, 8, 15에도 나오지만 신원은 명확하게 입증되지 않는다.
6:11 오벧에돔…복을 주시니라.
법궤가 거함으로 오벧에돔의 집에는 저주가 아닌 축복이 임하였다. 오벧에돔은 법궤가 모욕당했을 때 여호와께서 그 불경을 얼마나 무섭게 벌하셨는지를 알았다. 그는 다윗과 수천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법궤의 존재를 두려워하며 무서워 떠는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에도 그는 법궤를 자기 집으로 기쁘게 맞아들였다.
6:11 그 온 집.
오벧에돔에게 임한 축복은 그뿐 아니라 그의 온 집을 위한 것이었다. 신실한 아브라함을 통하여 지상의 모든 가족이 복 받을 것이었다(창 12:2, 3). 한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를 누릴 때 그를 통해 행복과 번영과 평화가 많은 사람에게 임한다. 복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된다.
6:12 혹이…고하여.
오벧에돔에게 임한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지만 겸손하고 순종하는 자에게 공포의 대상이실 필요가 없음이 입증되었다. 백성은 가드 사람 오벧에돔과 그 가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주시하였다(부조와 선지자, 706). 그에게 임한 축복으로 인해 웃사의 죽음으로 야기된 암울함과 불길한 전조가 사라졌다.
6:13 궤를 멘 사람들.
다윗은 하나님의 요구에 완전히 순종해야 한다는 교훈을 배웠다. 이번에는 법궤를 수레로 옮기지 않고, 다윗의 명령(대상 15:2)과 하나님의 말씀(민 4:5, 6, 15; 7:9; 대상 15:15)대로 레위인들이 운반하였다. 법궤의 송환에 관한 역대기의 기록이 이곳의 기사보다 훨씬 더 자세하고 명백하다(참조 대상 15:1~29).
6:13 여섯 걸음.
앞서 법궤를 옮기다가 웃사가 죽었기 때문에 다윗은 이번에는 극도로 주의하며 진행했다. 우선 법궤를 여섯 걸음만 옮긴 뒤에 여호와께서 불쾌해하신다는 징표가 나타나지 않자,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심과 그분의 선한 뜻이 베풀어짐에 대한 백성의 감사를 표현하는 의미로 희생제물을 드렸다.
6:13 소와 살진 것.
「70인역」에는 13절 내용이 없고, 그 대신 이렇게 되어 있다. “일곱 악단(혹은 찬양대나 합창단)과 희생제물로 송아지 한 마리와 어린양들이 궤를 옮기는 그와 함께하였다.”
6:14 여호와 앞에서…춤을 추는데.
다윗의 춤은 엄숙하고 거룩한 기쁨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이상하게 보일지 몰라도, 당시 동방에서는 그러한 활동이 자연스런 표현 방식이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다윗은 감사에 넘치는 찬송을 표현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에 경의와 영광을 돌렸다. 다윗의 춤에는 현대의 춤을 정당화시키거나 성격상 유사한 것은 없었다. 통속적인 춤으로는 아무도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거나 더욱 순결한 사상이나 더욱 거룩한 삶에 대한 영감을 받지 못한다. 오히려 품위를 떨어뜨리고 타락시킨다. 그로 인해 사람은 기도나 하나님 말씀 연구에 부적합하게 되며 의로움에서 떠나 환락의 길로 빠져든다. 품행은 타락하고 시간은 크게 낭비되며, 건강이 희생되는 경우도 흔하다(참조 부조와 선지자, 707).
6:14 베 에봇.
대상 15:27과 비교하라. 다윗은 이런 경사에 왕복을 벗어두고 제사장과 다른 이들이 주로 입는 단순한 베 에봇을 입었다(참조 삼상 2:18 주석; 삼상 22:18; 대하 5:12). 그는 이렇게 함으로 제사장의 특권을 취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하나가 되고 싶다는 것을 백성에게 보여 주었다.
6:16 저를 업신여기니라.
미갈은 다윗이 백성과 합심하여 여호와 안에서의 기쁨을 그렇게 생생하게 표현하도록 이끈 열정을 올바로 인식하거나 이해하지 못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었을 때, 그의 예배 행위를 하늘에서는 귀히 보았지만 그의 아내는 업신여겼다. 두 번 이상 무아경에 빠졌던 아버지(삼상 10:10; 19:22~24)를 둔 미갈로서는 다윗의 희열을 불평할 권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그녀는 억압된 원한을 분출할 구실을 찾았을 것이다. 그녀는 한 때 젊은 영웅이었던 다윗과 사랑에 빠졌지만 그들의 결혼은 그가 사울에게서 도망함으로 금방 끝나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20여 년이 흘렀고 그 동안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살았지만, 다윗과 그녀의 아비 집과의 오랜 전쟁 후에 정치적인 보상 차원에서 억지로 현 남편을 떠나 전 남편에게로 넘겨졌다. 도도한 사울의 딸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다윗에게서 결점을 찾을 각오가 되어있어서 당시 용인된 찬양 형태로 여호와를 경외했던 그의 열심마저도 흠잡았다.
6:17 장막.
당시 기브온에 있던 옛 장막(대상 16:39)이 아니라 다윗이 법궤를 위하여 특별히 마련한 새 장막이었다(대하 1:3, 4).
6:17 번제.
정식 번제단은 당시 모세 장막과 함께 기브온에 있었다(대상 21:29). 하지만 또 하나의 제단이 예루살렘에 세워졌음이 분명하다. 번제는 봉헌의 성격을 띠지만, 화목제는 행복하고 기쁜 경우에 드렸으며 대부분의 화목제물은 백성들이 잔치 음식으로 먹었다. 삼하 6:16~19은 대상 15:29~16:3과 평행 구절이다. 하지만 역대기에는 의식에 관하여 사무엘서에서 발견되지 않는 많은 세부 사항이 첨가되어 있다(대상 16:4~42).
6:18 백성에게 축복하고.
다윗은 백성들에게 현세의 지도자인 동시에 영적 지도자였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께 그 지위를 부여받은 자로서 백성에게 신령한 축복을 선언하는 것은 전적으로 적절하였다. 솔로몬이 성전 봉헌에서 한 축복과 비교하라(왕상 8:14, 55).
6:19 모든 백성…나눠 주매.
다윗은 천성적으로 후한 사람이었다. 백성이 떠나려고 할 때 왕궁의 하사품이 각 사람에게 지급되었다. 이로 인해 그들은 행복하고 만족한 기분으로 집을 향해 가며, 각자의 어려움을 잊고 하나님과 왕에게 찬양할 것이었다.
6:19 고기 한 조각.
히브리어 에쉬파르(’es∨par). 이 단어는 평행 구절인 대상 16:3과 이곳에만 나온다. 그 의미는 확실하지 않다. 「제임스왕역」의 번역은 유대인이 그 단어를 해석한 내용이다. 「불가타역」에는 “구이용 소고기 한 조각”으로 되어 있다. 일부 현대 학자들은 에쉬파르의 의미를 “여행자 음식”, “조리되거나 조리되지 않은 곡류와 대추야자로 이뤄진 식량”, “대추야자 과자”라고 한다.
6:19 건포도떡 한 덩이.
히브리어 아쉬샤(’as∨is∨ah).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건포도를 일정 형태로 압착하거나 굳힌 “과자”라고 정의된다.
6:19 백성이…돌아가니라.
축제와 봉헌 행사 설비에 관한 더 자세하고 많은 내용은 대상 16:4~42을 참조하라.
6:20 다윗을 맞으며.
다윗은 법궤를 새 장막으로 수행하는 길에 자기 집을 지나갔는데 이를 미갈이 지켜보았다(16절). 다양한 봉헌의식을 마친 다윗이 집으로 돌아오자 미갈이 맞이하였는데, 그녀는 분노로 안달이 나서 법궤 송환 관련 의식에서 충만한 기쁨을 보인 남편을 책망할 기회를 기다리기 힘들었다. 미갈은 그 축제 행사의 정신과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신앙은 공언하지만 기뻐해야 할 때에 증오에 차 있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여호와 안에서 기뻐해야 할 때에도 형제들에게 분노한다. 하나님의 일에 시선을 고정하는 대신에 그들은 여호와 안에서 기뻐하는 자들의 결점을 찾는 데 시간을 보낸다. 이 점을 지적한다고 해서 흥분과 열정이 영성에 반드시 이바지한다고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감정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것이 항상 영혼의 헌신을 재는 척도는 아니며, 좀 더 조용한 기질이 영혼을 내면으로 고양시키거나 사랑의 행위를 함으로 하나님께 대한 더 깊은 헌신을 표현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면의 무관심이나 냉담 때문에 외면의 표현이 부족하다면 그 위엄은 형식주의로 전락한다.
6:20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남편을 기쁘게 환영하며 인사하는 대신에 미갈은 날카롭고 빈정대는 말투로 다윗을 힐책하며 왕이 아니라 익살꾼에 가까운 행동을 했다고 비난했다.
6:20 몸을 드러내셨도다.
즉 왕복을 벗고 제사장이나 다른 사람들이 입는 단순한 베 에봇을 입고 공중 앞에 나타났다는 것이다(참조 14절 주석).
6:21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미갈은 다윗이 그렇게 행동한 진정한 이유를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또한 이기적 자만심이 자기가 품은 증오심의 이면임을 알아야 했다. 다윗은 미갈이 왕이 아니라 여호와와 그분의 예배를 멸시했다고 느꼈다.
6:21 네 아비와…버리고.
다윗은 미갈에게, 그녀의 아버지가 여호와께 버림받았지만 자신은 택함받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행사가 그분께 기쁨이 됨을 보셨다. 하지만 미갈은 그녀의 아버지를 왕위에서 물러나게 했던 것과 같은 거만한 태도를 취하였다. 다윗의 말이 상냥하지는 않았지만 옳은 것이었다.
6:21 내가…뛰놀리라.
다윗은 미갈이 신랄하게 비난할 정당한 이유가 없으며 그녀의 비난으로 자신의 열정이 꺾이거나 방침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알렸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행하신 모든 일에 감사를 표현하며 여호와 앞에서 계속 즐거워하며 기뻐하고 싶었다.
6:22 낮아져.
히브리어 칼랄(qalal), “하찮다”, “시시하다.” 이곳에 사용된 히브리어 형태는 “업신여김을 받다”를 뜻한다.
6:22 스스로…보일지라도.
「70인역」에는 “너의 눈에는”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만일 이것이 정확한 독법이라면, 그 의미는 이렇다. 미갈이 보기에 다윗의 행동이 이후로 더욱 그의 품위를 떨어뜨리게 하는 행동이 되었을 것이다. 이에 반해 만일 히브리어 독법을 수용한다면, 그 의미는 다윗이 비록 자신에게도 천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를 위한 것이라면 어떠한 길도 따를 각오가 되어 있다는 뜻일 것이다.
6:22 계집종에게는.
다윗은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의 신앙 열심을 이해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미갈의 의견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그녀의 의견을 높이 평가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출처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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