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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2장 성경주석 본문

성경주석/이사야

이사야 2장 성경주석

Timberners-Lee 2017. 9. 5. 23:11

<이사야 2장 흐름정리>

본서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심판의 메시지에 이어 항상 회복될 왕국에 대한 소망의 메시지가 주어진다는 점이다. 이는 타락하여 절망적 상황에 처해 있는 백성들에게 회개하는 길만이 진정으로 살 길임을 깨우치기 위해서이다. 본문 첫머리에 나오는 메시야 왕국에 대한 예언은 바로 이런 의미를 지닌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교만히 행하여 계속해서 행악하는 자들은 메시야의 도래 시에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후반부에서 백성들의 죄악을 지적하면서 거듭 회개를 촉구하였다.


<이사야 2장 줄거리>

1. 이사야가 그리스도의 왕국이 도래할 것임을 예언함.

6. 유다 백성이 그 악행으로 하나님께 버림받음.

10. 이사야가 하나님의 위엄의 강력한 결과들을 열거하며 백성에게 그를 두려워하라고 권고함.


<이사야 2장 개역한글>

1.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      

2.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     

3.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4.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5.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6.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음은 그들에게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그들이 블레셋 사람 같이 술객이 되며 이방인으로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였음이라      

7.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      

8. 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공경하여      

9. 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10. 너희는 바위 틈에 들어가며 진토에 숨어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라   

11. 그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     

12.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한 날이 모든 교만자와 거만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여 그들로 낮아지게 하고   

13. 또 레바논의 높고높은 모든 백향목과 바산의 모든 상수리나무와      

14. 모든 높은 산과 모든 솟아오른 작은 산과      

15. 모든 높은 망대와 견고한 성벽과      

16. 다시스의 모든 배와 모든 아름다운 조각물에 임하리니      

17.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    

18. 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질 것이며      

19. 사람들이 암혈과 토굴로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시는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이라      

20. 사람이 숭배하려고 만들었던 그 은 우상과 금 우상을 그 날에 두더쥐와 박쥐에게 던지고      

21. 암혈과 험악한 바위틈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시는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리라    

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이사야 2장 성경주석>

2:1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참조 1:1 주석.

2:2 말일에…것이라.

 2~4절의 기별에 대하여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었다. (1) 이것은 땅에는 평화가 찾아오고 유대인들은 그들의 옛 땅과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옛 지위를 회복하여 이 땅을 통치하고 또한 온 세상의 회심을 완성시키는 천년기를 일컫는다; (2) 이것은 살전 5:1~15; 계 13:11~17 등에 언급된 것과 같은 지구 역사의 마지막 때 세상을 완전히 바꾸기 위한 목적으로 배도한 기독교에 의해 주도되는 거짓 신앙부흥 운동을 묘사한다; (3)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세상의 구원을 위한 통로가 되도록 하신 하나님의 본래 계획을 묘사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실패와 거절 때문에 여기에 언급된 예언은 오늘날 하나님에 의해 택함받은 사람들이 땅 끝까지 복음 기별을 전하는 것을 통해 성취될 것이다. 

  다른 모든 성경 구절처럼 사 2:2~4도 그 참된 의미와 또한 오늘날의 교회와 관련된 그 의미의 중요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전체적으로 살펴보고 성경 자체가 이 주제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상상에 기초한 여러 해석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점들과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으로의 귀환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유대인들의 역할과 관련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면밀한 관찰을 보려면 36~54쪽을 참조하라. 오늘날의 교회를 위한 “놀라운 격려의 말씀들”을 담고 있는 많은 “실제적인 교훈들” 중 하나로, 미 4:1~3의 평행구절에 대한 엘렌 G. 화잇의 언급을 보려면 부모와 교사와 학생에게 보내는 권면, 455, 456을 참조하라.

  미 4:1~3은 쓰인 단어들까지도 사 2:2~4과 사실상 동일하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가서에 쓰인 이 구절의 문맥에 대한 연구는 이사야서의 평행구절의 뜻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줄 것임이 분명하다. 이사야와 미가는 여러 해 동안 함께 생존해 있던 동시대 인물이었다.

2:2 말일.

 히브리어 아하리트 하이야밈(’ah.arit hayyamim). “마지막”이란 의미의 아하리트는 일반적으로 기간의 길고 짧음에 상관없이 어떤 기간이든지 말하는 사람이 의중에 있는 기간의 끝을 가리킨다. 아하리트는 (1) 이스라엘이 객으로서의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을 소유하게 될 때(창 49:1) 곧 430년의 끝(참조 창 15:13, 16 주석 ), (2) 광야 방랑 생활의 끝(신 8:16), (3) 장차 있을 환난과 유배 생활의 끝(신 4:30; 호 3:5), (4) 역사적 기간의 끝(신 31:29), (5) 어떤 행실의 궁극적 결과(잠 14:12; 23:32; 사 47:7), (6) 한 해의 끝(신 11:12), (7) 삶에서 시련과 시험 기간의 끝(욥 42:12) 등을 나타내는 데 쓰인다. 성경 예언에서는 이 단어가 (1) 헬라 제국의 끝(단 8:23), (2) 1260일과 2300일의 끝, (3) 세상 끝에 이방인들을 모으는 일(사 2:2; 미 4:1), (4) 메시야 왕국이 세워지기 직전에 곡과 마곡이 일으킬 전쟁(겔 38:6, 7, 16), (5) 마지막 큰 심판의 날(렘 23:20; 30:24), (6) 악인들의 궁극적 종말(시 37:38) 등을 나타내는 데 쓰인다.

  아하리트가 「70인역」에서는 일반적으로 “마지막”, “끝”이라는 의미의 에스카토스(eschatos)로 번역되었다. 이 단어는 “시작”을 의미하는 레쉬트(re’s∨it)의 반의어인데, 그것의 뚜렷한 실례가 “이전”과 “처음”이 “결국”과 “종말”에 대비되는 의미로 쓰인 사 41:22; 46:10에 나타난다.

  성경에 나온 아하리트의 용례에 근거해 볼 때 미래에 있을 “끝”이 얼마나 먼 미래를 일컫는지는 각 경우마다 문맥에 따라 결정해야 함이 분명하다. 사 2:2에서의 “말일”은 하나님의 “광대하심”이 나타나는 일((10절),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그날”(11, 17절), “여호와의 날”(12절), 그가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시는” 때(19절)와 연관이 있다. 사 2:10~21을 계 6:14~17과 비교해 보라. 평행구절인 미 4:1~4에는 “여호와가 시온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치리하”시는 때가 언급되어 있다(7절). 이는 또한 시온이 바벨론 유수로부터 “이전 권능”을 회복하는 때와도 연관돼 있다(8, 10절). 따라서 사 2:2의 “말일”은 메시야 왕국이 세워지기 직전을 의미한다.

  42, 43쪽에 설명되어 있는 해석 원칙에 따르면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본래 계획 속에서는 메시야 시대가 바벨론 유수에서 회복되는 기간의 절정으로서 도래하도록 되어 있었다(참조 선지자와 왕 703, 704,).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민족적 영광과 만방에 대한 그들의 통치에 관한 많은 언약을 성취하실 수 있는 조건들을 충족시키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사 2:1~4은 실제 이스라엘에게는 결코 성취되지 못하였다.

2:2 여호와의 전의 산.

 「70인역」에는 사 2:2이 “여호와의 산과 하나님의 전”으로 되어 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전”은 통상적으로 모리아산 위에 위치해 있던 성전(참조 왕하 3:1 주석; 렘 26:18; 미 3:12)을 지칭하는 용어이다(왕상 8:63 등). 이곳은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배하는 중심지로 택하신 “곳”(신 12:5, 6, 14; 16:16)으로 유대교의 중심과 상징이 된 장소였다(왕상 8:29, 30 등). 유대 종교 제도는 성전과 그곳에서 행해지는 봉사들과 너무나도 밀접히 연결돼 있었기 때문에 BC 586년과 AD 70년에 성전이 파괴되자 그 제도가 상당 부분 효력 정지 상태가 되어 버렸다. 예레미야가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언하였을 때 그 나라의 종교 지도자들이 그를 죽여야 한다고 외쳐댔다(참조 렘 26:1~9). 예수께서 성전을 파괴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 잘못된 고소는 예수에 대해 거짓 증인들이 날조할 수 있는 가장 악질적인 고소였다(막 14:58; 15:29; 요 2:19). 

  따라서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다른 모든 종교와 신들 위에 높임을 받으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 권능의 상징 곧 국력의 상징으로서의 “산”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사 2:14; 렘 51:25; 겔 6:2, 3; 36:1, 4; 슥 4:7; 계 17:9, 10을 참조하라. 다니엘은 하나님의 나라를 “온 세계에 가득”한 “태산”으로 일컫는다(단 2:35). 이방인들이 “거룩한 산”으로 나아오는 것에 대한 다른 실례를 보려면 사 11:1, 10; 56:6~8을 참조하라.

2:2 모든 산꼭대기에.

 히브리어 브로쉬 헤하림(bero’s∨ heharim). “산들의 꼭대기 위에”, “산들의 가장 중요한 곳에”, “산들의 가장 중요한 곳으로서” 등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어떻게 번역하든지 의미는 동일하다. 만일 “여호와의 전의 산”이 이스라엘의 종교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라면 “모든 산”은 이 땅의 다른 종교들을 일컫는 것임이 분명하다. 종교로서의 유대교와 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공동운명체였다. 하나님이 바로 이 이스라엘을 지상의 모든 민족들 위에 뛰어나게 만들고자 하였다(참조 39, 40쪽; 부조와 선지자, 314).

2:2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세상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택한 도구로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그분의 본래 계획에 따르면 지상의 모든 민족이 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의 우월성과 지도력을 인정하는 날이 이르러오게 되어 있었다(40~43쪽). 한 국가로의 이스라엘이 높임을 받는 영광스런 모습이 구약 전반에 걸쳐서, 그중에서도 특히 이사야서에 계속 반복해서 등장한다(선지자와 왕 367, 368,). 이사야는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그들에게로 달려올 것에 관해서(55:5), 민족들이 이스라엘과 여호와께 연합하기 위하여(14:1; 56:6) 먼 곳에서부터 올 것에 관해서(45:14; 49:6~8, 12, 18, 22),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그들을 그의 “성산”으로 인도하셔서, 그 결과 그곳이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되게 하실 것에 관해서(56:7, 8), 이방인들이 그들의 재물을 예루살렘으로 가져올 것에 관해서(60:3~11) 이야기한다. 예레미야는 이방 민족들이 “땅 끝에서”올 것(렘 16:19)과 “여호와의 이름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모”일 것(렘 3:17)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스가랴는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그의 “백성이 될” 날(슥 2:11)과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을 날(슥 8:21, 22. 참조 슥 14:16)을 내다보았다. 이처럼 결국에 가서는 이스라엘 나라가 지구 전체를 끌어안게 될 것이다(실물교훈, 290; 슥 9:9, 10). 실제 이스라엘에게는 진리가 궁극적 승리를 거두는 이 같은 영광스런 상황이 성취된 적이 결코 없었기 때문에 결국은 이 일이 영적 이스라엘을 통해 성취될 것이다. 따라서 사 2:1~5은 우리 시대의 하나님의 택한 도구 곧 그분의 교회를 통한 복음의 영광스런 승리를 묘사한 것이다(참조 계 18:1 주석; 49~51쪽).

2:3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만방”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 것에 관한 2절의 진술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구약의 선지자들이 반복적으로, 때로는 동일한 용어들을 사용하면서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는 말을 제시하고 있다. 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의 명백한 우월성을 인정하면서(신 4:6, 7; 28:10; 사 61:9, 10; 62:1, 2; 렘 33:9; 말 3:12), 또한 그들의 “열조의 계승한 바는 허무”한 것임을 고백하면서(렘 16:19), 이방 민족들이 서로에게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고 말할 것이며(슥 8:21, 22), 또한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고 말할 것이다(슥 8:23). 열방이 참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하여 모일 것에 대한 이 약속은 실제 이스라엘에게는 결코 성취된 적이 없었는데, 이는 그들이 그 일의 성취에 필요한 조건들을 충족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약속은 현 세대의 하나님의 백성에게 영적으로 성취될 것이다(참조 45, 46, 49쪽).

2:3 오라 우리가…에 오르며.

 만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신실하였다면 열방 민족들이 참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의 매력을 깨달음으로 이방인들의 입술에서 이 같은 말이 흘러나왔을 것이었다. 슥 8:21, 23의 “우리가 속히 가서…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라는 구절과 비교해 보라.

2:3 여호와의 산.

 2절의 “여호와의 전의 산”과 같은 의미임.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자”는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가자”라는 말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사해 두루마리 1QIsa(참조 제1권, 32; 이사야 서론)에는 “여호와의 산에”라는 구절이 빠져 있다.

2:3 야곱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같은 의미임. 이스라엘은 야곱의 언약 이름이었다(참조 창 32:28 주석). 이방인들이 단순히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라고 말한 사실은 그들이 이스라엘의 위대함이 그 백성이 하나님의 계획에 협력하고 또한 참하나님을 섬긴 것에서 기인하였다는 사실을 바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2:3 전.

 즉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참조 2절 주석).

2:3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55:5에서 이사야는 열방이 “여호와 네 하나님”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으로 달려올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들이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게 될 때 그 성전이 실제로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었다(56:6~8).

2:3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관심사를 이스라엘의 관심사와 연합하기 위하여 모든 나라들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슥 8:23)라고 말할 것이었다. 마침내는 지상의 모든 사람들 중에 “남아서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올(9:7) 사람과 열국이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할(14:16) 것이었다. 이 일은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16절)이 하나님이 내릴 재앙으로 고통을 당하고(12, 13, 19절) 난 후,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9절)으로서 통치하실 때 실현되도록 되어 있었다. 겔 38:8, 16, 18, 20~23; 39:1~2; 슥 12:2, 3, 8, 9; 14:1~3과 비교해 보라.

2:3 시온에서부터.

 예루살렘은 “열국의 여왕으로 번영을 자랑”하며 또한 “강력한 지상의 수도로 세워”지도록 되어 있었다(시대의 소망, 577). 성전(선지자와 왕, 46)과 그 성읍 둘 모두 “영원히 남아 있”을(각 시대의 대쟁투, 19) 것이었다. 지상의 나라들이 유대인들을 존중하고 또한 그들이 만민에게 주신 하나님의 율법의 수탁자임을 깨닫게 될 것이었다(신 4:7, 8; 롬 3:1, 2). 이스라엘을 통하여 나타난 원칙들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을 회복시키는 방편이 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실물교훈, 286). 또한 “이스라엘 백성의 수효가 증가됨에 따라 저희는 국경선을 점점 넓혀서 마침내 저희의 나라가 온 세계에 미쳐야 했다”(실물교훈, 290).

2:4 그가…판단하시며.

 지상의 모든 사람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오는 “여호와의 말씀”(3절)을 즐겨 순종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유대인들을 통해 행사된 그분의 권위에 복종하기를 거절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품성을 하나님의 율법에 조화시키는 일을 통해서는 얻고자 하지 않았던 그것을 무력을 사용해 손에 넣기 위하여 함께 동맹하게 될 것이었다(렘 25:32; 겔 38:8~12; 욜 3:1, 12; 슥 12:2~9; 14:2).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 성읍을 포위하고 나서야 그들은 자신들이 하늘의 하나님과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렘 25:31~33)과 그분이 자신들을 심판하여(욜 3:9~17) 그곳에서 멸하실 것임(사 34:1~8; 60:12; 63:1~6; 66:15~18)을 발견하고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될 것이었다.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의 바로 동쪽에 위치한 여호사밧 골짜기 근방에 모여 있을 때 하나님이 “거기 앉아서 사면의 열국을 다 심판하”실(욜 3:12) 것이었다. 여호샤파트(Yehos∨apat.)라는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여호와가 심판하실 것이다”이다.

2:4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천하만국”이 예루살렘을 “치려고 모”이지만(슥 12:3), 하나님이 “예루살렘 거민을 보호하”시고(슥 12:8)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열국을”(슥 12:9) 멸하실 것이다. 여기에 묘사된 사건들은 실제 이스라엘에게는 전혀 성취된 적이 없는데, 이는 그 나라가 자기에게 부여된 사명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계시자 요한이 지적한 것처럼(계 20:7~15) 이 예언은 천년기의 끝에 사단이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며(8절) 저희로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게(9절) 할 때 부분적으로 성취될 것이다. 악인들은 “보좌 앞에 서”서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데(11, 12절),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13절). 지상의 나라들이 모두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알게” 될 것이다(겔 38:23). 슥 12:4; 계 19:19~21과 비교해 보라.

2:4 보습.

 히브리어 잇팀(’ittim). 농업 기구의 일종으로 아마도 “보습”이나 “곡괭이”일 것으로 생각된다. 악갓어에서는 이 단어가 “쟁깃술”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 전쟁 무기들이 평화의 도구들로 바뀌는 현저한 대조를 발견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모두 정복당한 후에 그 남은 자들은(참조 슥 14:16) 자신들이 사용했던 전쟁 무기들을 다시 평화의 도구들로 바꾸어 만들 것이다. 이 같은 하나님의 계획은 실제 이스라엘에게는 전혀 성취된 적이 없었다.

2:4 이 나라와 저 나라가…서로 치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패배를 당한 후에 남은 나라들은 모두 자원하여 이스라엘의 지도력에 복종하게 된다. 예루살렘 성벽으로부터 “평화의 비둘기가 모든 민족에게 날아”간다(시대의 소망, 577). 예루살렘은 “안연히 서”게 된다(슥 14:11). “다시는 이방 사람이 그 가운데로 통행하지 못”한다(욜 3:17, 18). 그 성읍은 그 이름의 의미처럼 참으로 “화평의 소유자” 혹은 “화평”의 근원이 된다. 물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본래 계획은 배도로 인하여 성취되지 못하였다.

2:4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호 2:18; 시 46:9과 비교해 보라. 실제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한 것을 그들이 구약 시대에 언약 백성으로서 지녔던 지위를 다시 회복할 것에 대한 예시라고 믿는 사람들은, 사 2:1~4과 미가서에 나오는 평행구절(4:1~3)을 평화의 천년기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해 왔다. 그들은 천년기 동안에 유대인들이 이 땅을 통치하며 또한 온 세상을 하나님께로 회심시킬 것으로 믿고 있다. 물론 이 같은 해석은 성경에서 전혀 근거를 찾아볼 수 없는 해석이다. 이 비성경적인 가르침을 논박하고자 시도하는 중에 이사야서의 이 성경절들을 거짓 신앙 부흥 운동에 대한 언급으로 설명한 사람들이 있다. 이 견해에 대한 고찰은 이사야서의 이 구절과 구약 전반에 걸쳐서 발견되는 이와 유사한 구절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36~54쪽에 언급된 것처럼 성경은 지속적으로 여기에 나타나 있는 광경을 만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신실하였다면 실현되었을 상황 곧 이방인들이 그들에게로 모여드는 일에 적용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이스라엘의 신실하지 못한 행위로 인해 이 목적의 실현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예언은 지상의 모든 민족에게 최후의 복음을 선포하는 영적 이스라엘에게 성취될 것이다(계 14:9~11; 18:1~4. 참조 49~51쪽).

  부모와 교사와 학생에게 보내는 권면 454, 455에 사 54:11~14; 렘 31:33, 34과 더불어서 미 4:1~3에서 발견되는 그 평행구절의 일부가 그리스도께서 “교사들과 부모들이 학교와 가정에서 어린이들에게 이러한 교훈들을 가르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는 “실제적인 교훈들” 가운데 하나로 인용된다. 이 구절은 또한 “놀라운 격려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귀중한 보석들을 쌓아둔 보물 창고”와 같은 성경 구절 중 하나로 인용되기도 하였다(부모와 교사와 학생에게 보내는 권면, 456). 만일 사 2:1~4과 미 4:1~3이 오늘날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놀라운 격려의 말씀”의 실제적인 교훈을 담고 있다면 이 구절들을 구약에 나오는 이에 필적하는 구절들과 더불어 고찰해 보아야만 참뜻을 이해할 수 있다. 다음은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유의해야 할 사항들이다.

  1. 이사야는 2~5절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것임을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다(사 2:1. 참조 미 4:2). 구약 전반에 걸쳐서 “유다와 예루살렘”은 비록 불완전하고 결점이 있다 해도 항상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 또한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신다(참조 민 23:21).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은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불린 적이 없다. 그는 결코 바벨론이나 애굽이나 에돔을 “유다와 예루살렘”이라 부르지 않으신다. 5절에 나오는 “야곱 족속”에게 하시는 호소의 말씀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 신실히 행한 결과로 인해 얻어질 영광스런 미래가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빛에 행하”고자 하는 강력한 동기를 부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참조 부모와 교사와 학생에게 보내는 권면, 455, 456).

  2. 어떤 사람들은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3절)이라는 말을 언급하면서 그들의 하는 말이 여호와의 하신 말씀과 조화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 언급된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의 다른 곳들에서 발견되는 그분의 뜻에 전적으로 조화되는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만 한다. 그들이 하고 있는 말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입술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말이다. 게다가 이와 동일한 사상이 종종 단어 하나도 틀리지 않게 구약 전반에 걸쳐서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의 입술에서 발해진다. 예를 들어서 슥 8:21~23과 비교해 보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날에는 방언이 다른 열국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하려 하노라 하리라.” 여기에서 “열국”의 “백성”은 사 2:3과 내용이 동일한 말을 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열국이 이스라엘로 모여드는 것에 대한 표상임을 확인해 주신다. 슥 8:21:23을 참된 부흥 운동에 대한 표상으로 해석하면서 사 2:2~4을 거짓 부흥 운동에 대한 표상으로 해석한다면 이는 매우 모순된 일이다. 참조 신 4:6, 7; 사 45:14; 49:6, 12, 18, 22; 55:5; 56:6~8; 61:3~11; 렘 3:17; 16:19; 슥 2:11; 14:16; 말 3:12.

  3. 사 2:2의 말은 “많은 백성”(3절)이 하는 말이 아닌 여호와가 하시는 말씀이다. 2절에서 “만방”이 “여호와의 전의 산”으로 “모여”드는 사실을 확언하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하나님이 요구하고 계신 일을 거짓 신앙 부흥 운동으로 보는 것은 곧 하나님이 자신이 지금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2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만방”이 “여호와의 전의 산”으로 “모여들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3절에서는 “많은 백성”이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자고 말한다. 그들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모순되지 않고 잘 조화된다. 

  4. 만일 3절에서 사람들이 하는 말이 거짓 신앙 부흥을 표상하는 것이라면 구약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는 이와 유사한 표현들도 모두 이와 동일하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5. 사 2:3의 말을 살전 5:3의 “평안하다, 안전하다”라는 외침과 동일시하는 것은 시 46:9; 호 2:18 등과 같은 구약 구절들의 의미를 간과하는 것이다. 여호와가 미 4:4에서 하신 추가적인 약속을 문맥(5~8절)에 비추어 연구해 보면 이 말이 메시야 왕국의 영원한 평화에 대한 언급임을 명백히 알 수 있다(참조 사 32:15~18).

  영감의 말씀은 마지막 때 큰 거짓 신앙 부흥 운동이 일어날 것임을 명백히 진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사야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 같은 종류의 부흥 운동이 아니다. 거짓 부흥 운동에 대한 다음과 같은 증언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예수께서는 거짓 신앙 부흥 운동을 이끄는 성직자들의 기별은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는 특성을 지니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마 24:213~27). “거짓 것이 참것과 너무도 유사할 것이므로 성경이 아니면 그것들을 분간할 수 없을 것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593). 그때가 이르게 되면 오직 진리에 대한 참된 사랑과 성경과 예언의 신이 지시하는 바에 최선의 주의를 기울이는 것만이 우리를 원수의 미혹과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의 교훈들에서 보호해 줄 것이다(호 6:6; 살후 2:9~12; 교회증언, VI, 401; 교회증언, VIII, 298; 목사와 복음 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475). 

  진리를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세상이 이 같은 미혹에 빠져서 타락하게 될 것이다(참조 계 13:13~15; 각 시대의 대쟁투, 562). 기독교의 이름만 가지고 있는 교회들이 연합하게 될 때 유명한 종교 지도자들은 이 연합을 온 세계를 복음화하기 위한 대부흥 운동으로 여길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구체적으로 온 세계가 회심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각 시대의 대쟁투 588, 589,; 초기문집, 261; 참조 초기문집, 282). 이 거짓 부흥 운동은 계 18:1~4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마지막 자비와 경고의 기별이 선포되기 바로 직전에 일어나서 사람들이 이 기별을 받아들이는 것을 막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464). 이것은 “평안하다, 안전하다”하는 외침으로, 사단은 바로 이 외침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안전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심어 주어 그들로 안심하게 만들 것이다. 사람들이 이것이 거짓된 외침이었음을 깨닫게 될 때는 이미 너무 늦게 될 것이다(살전 5:1~5. 참조 렘 6:14; 8:11; 초기문집, 282; 부조와 선지자, 104; 각 시대의 대쟁투, 562; 실물교훈, 411; 교회증언, V, 715). 이 큰 거짓 신앙 부흥 운동에서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모든 자들이 다 연합할 것이다(딤후 3:1, 5).

  거짓 부흥 운동이 참부흥 운동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참부흥 운동에 대한 성경의 묘사도 당연히 어느 정도는 거짓 부흥 운동에 대한 묘사와 유사하다. 따라서 영감의 말씀이 복음 사업의 말미를 장식하게 될 경건한 자들의 참부흥 운동에 대한 묘사임을 명백히 지적하고 있는 계 14:6~11; 18:1~4 등과 같은 성경절에서 사단이 모방하고자 애쓰는 점들이 발견되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교회 앞에 놓여 있는 큰 위기의 때를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영감의 말씀에 나타나 있는 이와 관련된 모든 구절을 연구해야만 한다. 

  구약의 예언에 기발한 해석을 갖다 붙임으로 그 예언을 혼동시키고 잘못 적용하는 시온주의와 다른 운동들에 대한 거짓 주장들, 또한 다른 여러 잘못된 해석들과 마주치게 될 때 우리가 “전혀 건전하지 않은 논법을 사용하도록 우리 스스로를 결코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반대자들을 침묵시킬 뿐 아니라 가장 주도면밀하고 가장 엄중하게 살펴보게 하는 건전한 논법을 제시해야 한다”(교회증언, V, 708). 거짓 신앙 부흥 운동에 관해서는 영감의 말씀이 우리에게 풍부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 같은 운동에 대하여 명백히 예언하고 있는 다양한 성경 구절들에 의존하여 이 중대한 문제를 다룰 수 있다. 이 일을 할 때 우리는 모든 성경 연구와 해석, 그중에서도 특히 구약의 선지서에 대한 연구와 해석에서 그러하듯이, 36~54쪽에 제시되어 있는 원칙에 조화되게 해석하기 위하여 마땅히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2:5 야곱 족속.

 이사야 선지자가 이 기별을 기록할 당시에는 북방 왕국의 열 지파가 아직은 사로잡혀 가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비록 이사야의 기별이 주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을 향한 것이긴 하지만(참조 1:1 주석),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빛에 행하”라는 그의 호소는 여기에서 열두 지파 전체에게로 대상이 확대된다. 북방 왕국의 배도가 거의 무르익은 때였는데도 하나님의 자비는 여전히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날이 지나가기 전에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호소하였다.

2:5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1~4절에 묘사되어 있는 이스라엘을 위해 예비된 영광스런 미래가 선지자를 고취시켜 “여호와의 빛에 행하”라고 하는 고무적인 호소를 하게 하였다.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들을 위해 예비해 두신 것에 대한 이상을 본 사람은 통상적인 성취로는 더 이상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하나님의 자비의 초청을 받아들였다고 하는 사람의 고백은 그가 자기에게 주어진 의무에 충실한 때에만 진실성이 뒷받침된다. 실로 순종의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의 고백은 “죽은” 것이다(약 2:26). 성경은 여호와의 말씀을 듣긴 하지만 그 말씀을 행하는 데에는 게으른 사람을 움직이는 모래 위에 자기의 집을 짓는 사람에 비유하고 있다(마 7:26, 27).

2:5 여호와의 빛.

 즉 하나님이 당신의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보내신 은혜로운 진리의 빛. 이사야의 시대에는 이 빛이 약속된 메시야를 통해서 나타나게 될 구원의 빛이었다.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는 스스로를 “세상의 빛”이라 칭하셨다(참조 요 8:12 주석). 그는 “참빛” 곧 “사람들의 빛”이셨다(요 1:9, 4). 빛이 그들 중에 있을 동안에 그 빛에 행하라고 하신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향한 우리 주님의 진지한 호소와 비교해 보라(요 12:25, 26. 참조 요 1:9~12).

2:6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음은.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위해 예비하신 영광스런 미래를 깨닫기는커녕 오리려 사실상 배도를 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여호와께 참되고 신실하고 순종적인 백성이 아닌 자신들이 범한 큰 죄악으로 인해 내쳐지고 버려진 사람들이다. 그들이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이제는 그들과 함께하시지도, 그들을 위하시지도 않고 오히려 그들을 대적하신다. 바로 이것이 이사야가 방금 전에 말한 영광스런 미래와는 현저하게 대조적인 그들의 엄연한 현실적 상황이었다. 6~9절이 현재 이스라엘의 실제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데 반하여 10~22절은 “여호와의 날”(12절)에 경험하게 될 피할 수 없는 결과를 묘사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배도하였기 때문에 그날은 세상의 나머지 모든 사람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야곱 족속”에게도 흑암과 공포의 날이 될 것이다.

2:6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팔레스타인의 동편에는 술객과 점쟁이와 술사가 많기로 이름 나 있던 바벨론이 있었다(단 2:2, 27; 4:7; 5:7, 11).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서 당신의 은총을 거두신 것은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동방의 거짓 종교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2:6 블레셋 사람같이.

 팔레스타인의 거민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복술자의 말을” 들으며 많은 가증한 일들을 행한 것으로 인해 이스라엘 앞에서 쫓겨남을 당하였다(신 18:10~14). 바벨론처럼 블레셋에도 초자연적인 일들을 행하는 사제들과 점쟁이들이 있었다(삼상 6:2). 또한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공언하는 자들까지도 그들의 본을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빛을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대신에 흑암의 왕과 결탁되어 있던 지도자들에게로 나아갔다.

2:6 손을 잡아 언약하였음이라.

 (「제임스왕역」에는 “그들이 만족하였음이라”-역자 주). 이렇게 번역된 히브리어가 어떤 단어인지 명확하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이 단어를 “그들이…와 손을 잡았음이라”로 번역하기도 한다. 이 두 번역에는 모두 이스라엘이 이방인들과 “손을 잡”음으로 그들과 협력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하는 동일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방인들과 “손을 잡”았다는 것은 곧 그들과 협정을 맺고 협력 관계를 시작하였음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이제 더 이상 구별된 특별 백성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치, 무역, 종교 및 죄악에서 주변 세계와 하나가 되어 있었다. 고후 6:14과 비교해 보라.

2:7 은금.

 유다는 이제 물질적 이윤 추구를 자신들의 최상의 관심사로 여기는 상업적인 백성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금과 은에는 부유하였지만 의와 믿음에는 가난하였다. 웃시야의 긴 치세는 유다가 크게 번성한 시대였다. 그는 블레셋 사람들과 아라비아 사람들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또한 암몬 사람들로부터는 공물을 거둬드렸다(대하 26:7, 8). 이 같은 번영이 사치와 도덕적 타락의 결과를 가져왔다. 산헤립이 히스기야에게 받았다고 주장하는 공물의 양을 통해서 이사야의 시대에 유다의 부유함이 어느 정도나 되었는지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 그 공물에는 금 30달란트(약 2.25톤. 미터법으로는 약 2톤. 참조 제2권, 108)와 은 800달란트(약 30톤. 미터법으로는 약 27톤), 그리고 보석들과 다른 여러 종류의 보물이 포함되어 있었다.

2:7 마필.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을 많이 두지 말”라고 명령하셨다(신 17:16). 그는 또한 사무엘을 통하여 왕을 임명하는 일은 그에게 말들과 병거들을 제공해야만 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셨다(삼상 8:11, 12). 솔로몬은 많은 말과 병거를 가지고 있었다(왕상 10:25~29). 웃시야도 이 문제에서 솔로몬의 선례를 따랐음이 분명하다. 구약 시대에는 말이 주로 전쟁을 수행하는 데 사용되었다. 말과 병거의 수효를 늘리는 일은 사람들로 그들의 눈을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서 물질을 신뢰하는 데로 돌리게 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었다. 미 5:10, 12, 13은 여호와가 복수의 날에 우상들과 복술들과 점쟁이들과 함께 말들과 병거들도 훼파하실 것이라고 선언하다.

2:8 우상도 가득하므로.

 아하스의 치세는 왕과 백성이 모두 참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의 길로 나아간 도덕적으로 엄청나게 타락한 시기였다. 바알의 형상들이 만들어졌고(참조 제1권, 154, 155), 이방신들에게 사람을 희생제물로 드렸으며, 예루살렘 이곳저곳에 제단들이 세워졌다. 또한 전 국토에 걸쳐서 우상에게 분향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없이 많은 산당이 봉헌되었으며, 솔로몬의 놋 제단이 세워져 있던 성전 뜰의 바로 그곳에는 이방 신을 위한 제단이 세워졌다(대하 28:2~4, 23~25; 왕하 16:10~14).

2:9 천한 자도…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천한”이라는 단어와 “귀한”이라는 단어는 번역자들이 “사람”이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아담 (’adam)과 여자와 구별되는 “남자”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이쉬(’is∨) 사이의 구분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으로 첨가한 것이다. 여기서 아담은 인간을 의미하고 이쉬는 여자와 반대되는 의미로서의 남자를 의미한다. 시 49:2의 히브리어 원문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단순히 아담 곧 인간이 되는 것보다는 이쉬 곧 남자가 되는 것이 더 영예로운 일로 여겨졌다. 여기서의 의미는 사람들이 여호와 앞에서 굴복당하고 쇠퇴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은 마음속에 자존심과 거만함이 가득하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들을 하나님께 굴복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주가 오시는 그때에는 자신들을 굴복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참조 사 2:10~12).

2:9 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의 한 날”(12절)이 이르러 오면 죄인들을 위한 은혜의 시기가 영원히 지나가 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그들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참조 호 13:14; 히 9:28).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실 수 없는데, 이는 그들이 용서받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2:10 바위틈에 들어가며.

 팔레스타인에는 위험이 닥칠 때 피하여 숨을 수 있는 천연적 은신처인 틈새와 동굴들이 많이 있었다(참조 삿 6:2; 15:8; 삼상 13:6; 14:11; 24:3; 왕상 18:4). 여호와의 큰 날에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인 채 이 땅에 내릴 재앙들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서 어디든 숨을 만한 곳이 있으면 그리로 도망할 것이다(참조 계 6:15). 사해 두루마리 1QIsa에는 사 2:9의 마지막 구절과 10절 전체가 빠져 있다.

2:11 그날.

 “그날”은 “여호와의 한 날”(12절) 곧 예수께서 그의 백성은 구속하시고 악인들은 멸하시면서 이 땅의 통치자로 다시 오시는 날이다(13:9; 34:8).

2:11 눈이 높은 자.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항하였으며, 또한 자신들의 의견을 하나님의 명령보다 더 높였다. 하지만 마지막 큰 심판의 날에는 지상에 있는 교만과 오만이 가득한 이 사람들이 하늘의 여호와 앞에서 낮아지게 될 것이다(참조 3:11).

2:11 여호와께서 홀로.

 시 46:10과 비교해 보라. 하나님이 그 권능과 영광으로 임하실 때 모든 육체는 그의 앞에서 풀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그때에는 이 지구뿐이 아닌 온 우주의 창조주요 유지자로서 그의 크고 위엄 있는 모습이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날 것이다. 그는 높임을 받아 모든 백성의 심판자요 온 우주의 통치자로서 그의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다.

2:12 여호와의 한 날.

 “여호와의 한 날”은 하나님의 진노가 각 나라들과 전 세계에 임하는 날이다. 어떤 나라가 죄악이 너무나도 커서 운명이 이미 확정되고 여호와가 그 나라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을 선고하신 날이 바로 그 백성에게는 “여호와의 날”이다. 이스라엘(암 5:18), 유다와 예루살렘(애 2:22; 겔 13:5; 습 1:7, 14, 18; 2:2, 3; 슥 14:1), 바벨론(사 13:6, 9), 애굽(렘 46:10; 겔 30:3) 그리고 에돔과 이방인 전체(옵 15절)에게 임한 이 지엽적이고 개인적인 여호와의 날들은 장차 전 세계에 임할 여호와의 큰 날에 대한 표상이다(살전 5:2; 벧후 3:10). 참조 사 34:8; 욜 1:15; 2:1; 3:14; 슥 14:1; 말 4:5. 지엽적인 “여호와의 날”에 대한 예언들이 세상 끝에 임할 전 세계적인 “여호와의 날”도 동시에 묘사하는 경우들도 종종 있다. 예수께서도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예언과 재림에 관한 예언을 서로 혼합하여 말씀하셨다.

2:12 교만자와 거만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교만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서게 하며, 또한 그들로 동료 인간들을 학대하게 만든다. 교만은 사람들을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여 그들로 그분을 대적하게 만든다. 그 결과로 하늘의 권세도 그들을 대적하게 된다. 그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악행들과 더불어서 멸망하는 것은 단지 그 시기가 문제일 뿐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공언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자랑하며 자신들이 이룬 일들에 영광을 돌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또한 그들이 여호와의 큰 날에 창조주 앞에서 땅에 굴복하는 모습도 보았다.

2:13 레바논의…백향목.

 종종 교만과 영화 중에 있는 나라들과 개인들이 잘려서 그 영화를 빼앗길 수도 있는 품위 있는 나무들에 비유된다(사 14:8; 겔 31:3~14; 단 4:10~23; 슥 11:1, 2).

2:14 높은 산.

 성경에서 산은 종종 나라를 상징한다. 하나님의 진노의 큰 날에 교만한 사람들에게 그의 진노가 임할 때 그 진노가 교만한 나라들에도 함께 임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스스로를 자랑하고 만군의 여호와께 대하여 자신을 높이던 나라들이 낮춤을 당하고 황폐케 될 것이다.

2:15 모든 높은 망대.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제공하시는 방언 수단과 대조를 이루는 사람이 고안해 낸 방어 수단이다. 웃시야는 예루살렘에 튼튼한 망대들을 세우고, 그 성벽을 증축하고, 또한 지방에도 여러 망대를 세움으로 유다의 방어력을 크게 강화시켰다. 그의 후계자들도 이 같은 일들을 계속 진행해 나갔다(대하 26:9, 10; 27:3, 4; 32:2~6; 사 22:8~11; 호 8:14).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는 이 모든 방어 수단들이 파괴되어 없어질 것이다.

2:16 다시스의 모든 배.

 이 배들은 먼 나라들과 교역을 위하여 금속들을 싣고 지중해와 홍해를 항해하던 큰배였다(참조 왕상 10:22; 22:48; 대하 20:36). 이처럼 교역을 행하는 자들에게도 하늘의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인데, 이는 그들이 이기심과 탐욕에 이끌려 그 일을 행하기 때문이다.

2:16 모든 아름다운 조각물.

 전에는 이렇게 번역된 히브리어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명확치 않은 것으로 여겨졌었다. 하지만 근자의 연구에서 이전에 “조각물(혹은 그림)”로 여겨졌던 히브리어 세키이야(sekiyyah)가 “배”를 의미하는 것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이 구절은 “모든 아름다운 배들” 혹은 “모든 탐나는 배들”로 번역해야 한다. 이 절의 앞부분을 고려해 볼 때 문맥적으로도 이 같은 해석이 옳음을 확인할 수 있다. 「70인역」에도 이 단어가 “배”로 번역되어 있다. 애굽어에서는 스크티(skti)가 “배”를 의미한다.

2:17 자고한 자.

 참조 11절. 교만하고 불손한 자들에 대한 정죄의 기별이 여기에서 다시 강조를 통해서 반복된다. 굴복과 수치가 하늘에 계신 여호와의 뜻에 반하여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들의 최종적인 운명이 될 것이다.

2:19 암혈.

 참조 10절 주석. 여기서 다시 팔레스타인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천연 동굴과 암혈에서 피난처를 찾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동굴들과 암혈들은 종종 위기의 때 효과적인 도피와 방어의 수단이 되었다. 호 10:8; 계 6:15, 16과 비교해 보라.

2:19 진동시키시는.

 히브리어 아라츠(‘aras.), “충격을 받다”, “떨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큰 지진이 일어날 것이다. 사 2:21; 계 11:19; 16:18과 비교해 보라. 이 지진은 큰 도시들을 삼켜버리며 섬들을 그 자리에서, 또한 산들을 그 있는 곳에서 옮겨 이 지구 전체를 황폐하게 만들 것이다. 이 땅에서 발생하는 이 같은 진동은 바로 하나님이 발하시는 음성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이다(참조 각 시대의 대쟁투, 637).

2:20 은 우상.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도망한 사람들은 자신의 우상들이 더 이상 자신들을 도울 수 없음을 깨닫고 그 우상들을 내버린다. 실제 우상들뿐 아니라 그들이 자신들을 위해 축적한 금과 은도 이 우상들 속에 포함될 수 있다. 이제 그들은 이것들이 자신들을 구원하는 데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는 전혀 쓸모 없는 것임을 깨닫고는 그것들을 모두 내버린다.

2:20 두더지.

 땅속, 동굴, 폐허, 버려진 건물 등에 사는 짐승. 사람들이 피난처를 찾아 도망하는 곳들이 바로 이런 곳이다(10, 19, 21절).

2:21 암혈.

 이사야가 다소의 첨가와 변화를 주면서 19절의 묘사를 반복한다. 이것은 이사야가 본 장차 이 땅에 임할 두려운 광경들 중에 절정을 이루는 장면이다. 이 예언이 성취되며(참조 교회증언, VII, 141) 또한 여호와께서 이 땅을 무섭게 진동시키시고 고의적으로 당신의 자비를 거절하고 당신의 율법을 범한 자들을 공의로 다스리실 시기가 매우 임박하였다.

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만일 이것이 악인들이 맞이할 운명이라면 그들을 더 이상 의지해야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 자신의 영리함과 그들의 이방인 이웃들의 도움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그분 안에서 그들의 도움과 힘을 찾아야만 하였다.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는 그리스도가 마 10:17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하신 “사람들을 삼가라”는 권고의 말씀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와 유사하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이스라엘에게 그것이 자신들의 힘이든 아니면 애굽이나 앗수르 같은 이웃 나라들의 힘이든 어떤 인간의 힘도 의지하지 말고 오직 그들이 하나님께 신실히 행한다면 그가 그들을 위해서 행하실 수 있고 또한 틀림없이 그렇게 행하실 그 일들만을 의지하라고 경고하셨다. 홍해에서, 여리고에서 그리고 산헤립의 때에 예루살렘 성문 앞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힘을 충분히 나타내 보이셨다.

2:22 그의 호흡은.

 이 구절은 인생의 연약성을 강조한다(참조 창 2:7; 7:22; 시 146:3, 4). 사람에게 호흡과 생명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호흡이 사람을 떠나면 그의 생명은 멈추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또한 우리에게 힘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데, 우리가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들에게 도움을 청해야만 하는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2:22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또는 “그가 무슨 가치가 있느냐?” 우리가 그토록 크게 의존하는 그 사람은 과연 누구이며, 또한 어떤 일들을 행할 수 있는 존재인가? 사람들은 스스로를 자랑하고, 또한 하늘에 계신 크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의 뜻을 따라 살기를 거부함으로 그분에게 도전한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행한 일들과 더불어서 완전히 멸망할 것이지만 하나님과 진리는 영원히 멸망치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돌아선 그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해야만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사람이 건설해 놓은 오만스런 문명과 사람을 끝없이 교만하게 만드는 것들 중에서는 보존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가 세운 높은 망대들과 성벽들, 그가 부리는 다시스의 배들, 그의 금은 보화들, 이 모두가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시는” 날에 다 멸망할 것이다(19절). 그날에는 교만하고 오만한 자들은 낮춤을 당하고 오직 여호와만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다.


참고자료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 제7권, 시조사.

- 「열린노트성경」, 아가페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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