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ORY

사무엘상 1장 & 성경주석 본문

성경주석/사무엘상

사무엘상 1장 & 성경주석

Timberners-Lee 2016. 4. 5. 12:58

<사무엘상 1장 흐름정리>

사무엘상은 사사 시대와 왕정 시대를 잇는 가교 역할을 했던 선지자 사무엘의 출생에 관한 기록으로 시작된다. 엘가나에게 한나와 브닌나라고 하는 두 아내가 있었는데,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한나는 브닌나에게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 이에 그녀는 자식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 자식을 하나님께 나실인으로 헌신케 할 것을 서원하였다. 하나님이 한나의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한나는 아들을 낳았고, 자신의 서원대로 그 아들이 젖을 떼자 그를 하나님께 바쳤다.


<사무엘상 1장 줄거리>

1. 아내가 둘인 레위인 엘가나가 매년 실로에서 예배함.

4. 자식이 없어 브닌나에게 학대받지만 엘가나는 한나를 아낌.

9. 한나가 고통 가운데 자식 얻기를 기도함.

12. 엘리가 처음에는 한나를 꾸짖었으나 나중에는 축복함.

19. 한나가 사무엘을 낳은 후 젖 떼기까지 집에 머묾.

24. 서원에 따라 사무엘을 여호와께 드림.


<사무엘상 1장 개역한글>

1.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2. 그에게 두 아내가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하더라

3. 이 사람이 매년에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 있었더라

4.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5.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6.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7.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8.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9.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그 의자에 앉았더라

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11.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12.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13.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줄로 생각한지라

14.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15.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것 뿐이오니

16.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

17.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18.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19. 그들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서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20. 한나가 잉태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21. 그 사람 엘가나와 그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22.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뵈게 하고 거기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

23.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선한대로 하여 그를 젖 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그 여자가 그 아들을 양육하며 그 젖 떼기까지 기다리다가

24.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쌔 수소 셋과 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

25. 그들이 수소를 잡고 아이를 데리고 엘리에게 가서

26. 한나가 가로되 나의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나의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27.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28.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사무엘상 1장 성경주석>

1:1 [이제].

 (「개역한글판」에는 이 말이 나타나지 않음-역자 주). 보통 “그리고”라고 번역되는 히브리 단어에서 왔지만 문맥에 따라 “이제”, “그때” 또는 “그러나”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 단어가 반드시 이 책이 선행하는 다른 책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례로 에스겔서도 같은 단어로 시작하지만, 아무도 그 책이 기존의 어떤 문서의 연속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1:1 라마다임소빔.

 문자적으로 “파수꾼의 두 높은 곳” 또는 “숩 사람의 쌍둥이 고지대.” 1:19과 2:11이 라마다임소빔을 단순히 라마로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쌍둥이 성읍을 말하거나 한 성읍의 두 지역을 의미하는 것 같다. 사무엘의 고향인 이 라마의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라마다임소빔으로 지목되는 여러 장소를 알려면 본 장의 끝에 있는 추가적 설명을 참조하라. 

1:1 엘가나.

 문자적으로 “하나님이 산 자.” 에브라임 지파 지역에 살았던 고핫 족속의 레위인이다(대상 6:33~38; 참조 22~28절; 부조와 선지자, 569). 사무엘이 아론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만들고자 한 여호와의 결정을 그렇게 완강히 반대했던(참조 민 16장) 고라의 후손(대상 6:33~38)이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것은 조상의 죄 때문에 자녀가 처벌되어서는 안 되고, “각 사람은 자기 죄에 죽임을 당할 것이다”(신 24:16)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하나의 증거이다. 

1:2 두 아내.

 한나라는 이름은 “은혜로움”을 뜻하고, 반면 브닌나는 “머리숱이 많은 자”라는 의미이다. 세계 역사의 이 시기에는 일부다처제가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하나님도 이를 허락했다(참조 신 14:26 주석). 그러나 경제적인 제약 때문에, 부유 계층과 군주들만 일부다처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통치자들은 다른 군주의 후궁으로 공주를 보냄으로써 평화를 확보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부다처제는 가정과 왕궁에 평화보다는 종종 음모, 시기, 실패를 초래했다. 신약 시대에는 일부다처에 빠진 남자는 어떤 종교적 직무에도 적합하지 않았다(딤전 3:2, 12). 

1:3 올라가서.

 실로에 있는 성막에서 불과 19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살았기 때문에, 레위인인 엘가나가 매년 정기적으로 3대 절기(출 23:14~17; 참조 레 23:2 주석)에 참석한 것이 당연했는데, 특히 이른 봄에 있는 첫 절기요 가장 중요한 절기인 유월절에 참석하는 것은 더욱 그랬다. 이스라엘이 애굽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을 상징하는 이 명절은 그의 큰 희생을 통해 영적 속박의 집에서 구원의 길을 마련한 분(고전 5:7)인 유월절 어린양의 위대한 원형인 예수에게로 사람들의 마음을 향하게 하였다. 사사 시대의 다른 많은 레위인과 마찬가지로 그가 성소에서 봉사하도록 요구되지는 않았지만(삿 17:8, 9), 한 평범한 이스라엘 사람으로 엘가나는 이웃들을 격려하고 좋은 모본을 보이기 위해 자신의 희생제물을 가지고 올라갔다. 그가 악한 환경에서 살았을지라도, 그의 영성은 높은 수준에 있었음이 틀림없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부패했을지라도, 엘가나는 신실하게 예배와 희생제물을 드렸다. 그리스도 당시에 안나와 시므온도 그러했다(눅 2:25~38). 오늘날에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심은 다른 사람의 행동거지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1:3 엘리의 두 아들.

 이처럼 이른 시기에도 친인척을 편애하여 직책에 임명하는 족벌주의가 이스라엘에 굳게 자리잡고 있었다. 각 지파에 흩어져 사는 레위인들이 실직의 공포에 휩싸여 있을 때도, 엘리 가문은 그의 두 아들이 도덕적으로 직무를 이행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생계 수단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의 구현의 실패가 늘 불만과 혁명의 요인이 된다. 

1:5 갑절.

 문자적으로 “두 얼굴의 몫.” 엘가나는 가정의 연합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가족 각 구성원에게 “하나의 몫”을 주었다. 한나에게 자식이 없는 것이 그의 바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공공연히 나타내기 위해, 마치 한나에게 자식이 하나 있는 것처럼 그에게 갑절의 몫을 주었다(참조 부조와 선지자, 569). 

1:6 심히 격동하여.

 브닌나의 태도는 부분적으로는 엘가나의 호의적인 관대함에 기인하였다. 하늘에서 있었던 사단의 경우에서처럼, 가정에서나 밖에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진 관심에 대한 질투심이 남을 조롱하고 격분시키는 악한 생각을 키워서 수많은 조소의 말을 쏟아 붓게 한다. 그런 조소가 한나의 식욕을 빼앗았을 뿐 아니라 축제에 참여하지도 못하게 했다. 한나가 축제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아론이 그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죽고 난 후 느꼈던 것처럼(레 10:19),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느꼈기 때문인가? 이 상황에서 그에게 명절의 영적 축복이 더더욱 필요하지 않았을까? 동료를 비웃도록 자신을 방치했던 브닌나가 명절의 축복을 얼마나 많이 누렸을까 하고 질문해 볼 수도 있다. 이 상황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 그리스도가 언급한 상황(눅 18:10~14)과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한나는 그 세리처럼, 욕을 욕으로 갚지 않고, 고통을 꾹 참으며 조용히 눈물만 흘렸다. 

1:9 한나가 일어나니.

 한나는 슬픔과 자기 연민 가운데 스스로 완고해지거나 남편이 말을 걸 때 시큰둥하지도 않았으며 칭찬할 만한 수준의 자제력을 보여 주었다. 그는 성소에서 피난처를 발견했다. 

1:11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한나는 명절을 통해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적 선물을 수용한 후 곧바로 좀 더 구체적인 선물 곧 아들을 달라고 간청하며 그 선물을 여호와께 거룩히 구별하여 되돌려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아마 하나님은 그런 전적인 굴복을 오래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 이전에 한나의 태를 열 수도 있었으나, 그랬다면 과연 한나가 이 책임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겠는가?

  세상의 지혜자들은, 기도는 꼭 필요한 것은 아니며 기도에 대한 실제적인 응답은 있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연 법칙에도 어긋나므로 기적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 다른 방법으로 줄 수 없는 것을, 믿음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허락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속한다(각 시대의 대쟁투, 525). 왜 그런가? 이는 그리스도가 이 땅에 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사람이 충만케 하며 일을 이루시는 성령의 사역에 자원하는 심령으로 온전히 굴복하는 것이 하늘의 계획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편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언약 성취를 위해 아브라함이 25년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그를 위한 하늘의 계획 속에 아브라함이 온전히 들어갈 수 있는 시점에 왔을 때, 하나님은 과거의 모든 실패를 축복을 위한 디딤돌로 바꿀 수 있었다. 한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그에게 말하지 않고, 비록 불완전하고 개혁이 필요했지만 제사장이라는 지정된 통로를 사용했다. 하나님은 자손을 얻고자 하는 한나의 자연적인 욕망이 마침내 가장 귀한 선물들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열정에 흡수될 것을 아시고, 엘리를 통해 한나의 간청에 응답했다. 

1:14 취하여.

 성소의 수호자요 율법과 신앙의 최고 권위였던 엘리는 예배하러 온 사람의 심장의 고동보다는 눈에 보이는 상황을 토대로 판단했다. 자신의 아들과 관련된 경험을 기준으로 한나를 평가하고 있었으나, 아직 하나님이 나타낸 계시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나님은 마음의 동기를 본다는 사실을 성령이 한나의 경험을 통하여 엘리에게 보여 주었다. 

1:16 여기지 마옵소서.

 한나는 그런 날카로운 꾸지람을 받고도 침착한 마음을 유지하며 온유한 정신과 권위의 자리에 있는 자에게 존경을 표하면서 그의 오해를 야기한 자신의 슬픔을 조심스럽게 언급하고 또한 자신의 결백을 담대하게 단언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그의 고소자들에게 대답할 때 나타낸 것과 동일한 정신이었다. 

1:17 평안히 가라.

 평안은 적대감이 멈출 때 즉 전적으로 승리하거나 굴복할 때에만 온다. 여호와께 전적으로 굴복한 후 한나는 브닌나의 적대감과 놀림이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는 구주처럼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말할 수 있었다. 

  엘리는 재빨리 하나님의 손길을 인식하고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승인하심을 나타냈다. 그리스도는 사랑과 식별의 참된 정신을 보여 주었고, 따라서 그와 동일한 정신을 자기의 부(副) 목자들(undershepherds)에게도 나누어 줄 것이다.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그것을 다른 이에게 전하든 그렇지 않든, 그의 초장의 가장 미천한 양이 그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것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나는 외부 환경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에게 맡겼고, 즉시 응답이 왔다. 

1:20 사무엘.

 이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들으셨다”이며, 성경의 다른 인명과 마찬가지로 중대한 의미를 담고 있다. “사무엘”은 여호와에게 드린 한나의 간청에 대한 기념물이며 그의 서원을 상기시키는 것이고 하나님의 허락에 대한 인정을 의미했다. 시간이 이 모든 것의 사실 여부를 드러낼 것이었다. 사무엘은 유년 시절 초기부터 자신이 여호와의 종임을 인식했다. 

1:22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어머니는 사무엘을 단지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린 제물로 간주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사무엘을 젖먹이 때부터 하나님을 위해 훈련하려고 노력했다. 많은 관심과 기도로 그의 육체적인 필요를 공급했고, 갓난아기 때부터 그의 생각이 만군의 여호와에게 향하도록 지도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위탁된 것을 더 온전히 이루기 위해, 사무엘이 젖을 뗄 때까지 실로를 방문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에서 어머니의 영향력은 얼마나 멀리 미치는가!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처럼 포로요 노예일지라도, 가나안 땅에 사는 레위인 가정의 핍박받는 어머니일지라도, 어머니로서 그들의 시간은 값으로 셀 수 없다. 이것을 인식한 한나는 이 땅에서의 시간뿐 아니라 영원한 시간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영혼에 하나님의 형상을 새기는 것이 그의 책임이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이 세상의 약한 것들을 사용하여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죄에 빠져 낙담한 사람들의 쇠퇴한 믿음을 다시 살리는 임무가 많은 경우 여호와의 미천한 여종에게 위탁되었다.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던 요게벳의 헌신과, 사무엘이 태어날 때 한나가 가졌던 비전과 마리아가 천사의 기별에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라고 대답하며 느꼈던 엄숙한 책임감을 명상해 보라. 

  그러나 어머니의 가장 진지한 배려가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아이는 인생에서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예를 들면 삼손의 경우가 그렇다. 삼손도 자신을 섬겼던 오랜 시간 후에야 그의 생애를 전적인 헌신으로 이끈 하나님을 보게 되었고, 그와 같은 헌신이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믿음으로 승리한 기라성 같은 사람들 중에 그를 있게 하였다. 사단은 특별한 사업을 위해 하나님이 도구로 쓰기로 작정한 사람조차도 미혹하는 일을 위해 고용하려 든다. 

1:22 영영히.

 참조 출 12:14; 21:6 주석. 한나는 이 “영영히”라는 말로 사무엘이 평생 나실인이 될 것임을 의미했다(삼상 1:11; 참조 창 49:26; 민 6:2 주석). 키르베트 쿰란(Khirbet Qumra

 n) 제4 동굴에서 발견되어 1954년에 출판된 사무엘상의 한 단편은 사무엘이 나실인(Nazirite)이었다고 명확하게 언급한다. 

1:23 그 남편 엘가나가…이르되.

 엘가나는 아내의 서원에 동의했으며(민 30:6, 7), 삼상 1:21에 의하면 자신도 그 서원에 동참했다(참조 민 30:6 주석). 

1:23 여호와께서…이루시기를.

 즉 “사무엘에 대한 여호와의 계획이 이루어지기를.” 하나님은 이미 한나의 기도와 서원을 성취하는 일에서 그분의 역할을 알고 계셨다. 엘가나는 (1) 하나님이 진실로 엘리를 통해 말씀하셨다는 사실(17절)과, (2) 사무엘의 출생은 엘리의 약속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확인한다는 것(20절)과, (3) 그 약속이 사무엘의 평생 사역을 통해 온전히 성취될 것을 믿었다.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많은 것이 남편과 아내의 협력에 의존한다. 엘가나는 아내의 헌신에 깊이 감동하였으며 그녀의 소망에 전심으로 동조하였다. 그는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 5:25)는 바울의 권면에 대한 훌륭한 예증이다. 그는 아내의 서원에 대한 책임을 떠맡고, 그 서원에 자신을 깊이 관련시킴과 동시에, 아내의 선택의 자유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선택한 아내의 뜻이 성공하기를 바랐다. 그의 태도는 각 사람이 자신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도록 개인과 동역하며,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품성의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우주에 보여 주려는 그리스도의 가슴 속에 있는 소망을 예증한다. 

1:24 수소 셋.

 「70인역」에는 “삼 년 된 수소 한 마리”라고 되어 있다. 25절에 의하면 “그들이 수소 [하나]를 잡”았다. 아브라함은 헌신 제물(consecration sacrifice)로 3년 된 암소를 드렸다(창 15:9). 서원을 실행하기 위해 드린 엘가나의 희생제물(11, 21절)은 수소 한 마리와 그에 따른 소제와 전제로 구성되었다(민 15:9, 10). 엘가나와 한나가 온전한 한 에바의 가루를 가져왔는데, 수소 한 마리에 요구된 양은 가루 한 에바 10분의 3이기 때문에(민 15:8~10), 25절에 언급된 수소 한 마리는 아이 사무엘을 여호와께서 바치는 번제였고, 나머지 수소 두 마리는 각각 가루 한 에바 10분의 3이 필요한 속죄제와 화목제로 드려진 것 같다. 엘가나가 수소 세 마리에 충분한 가루 한 에바를 가져왔다는 사실은 “삼 년 된 수소 한 마리”라고 되어 있는 「70인역」과 다른 역본들이 잘못된 것임을 암시한다. 

1:27 이 아이.

 젖 뗄 때의 사무엘의 나이는 알려져 있지 않다. 동방에서는 보통 세 살까지 젖을 먹었으며, 일례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상속자로 세우며 잔치를 베풀었을 때(참조 창 21:8) 이삭이 5세였을 가능성이 꽤 높다. 사무엘이 태어난 이후 한나가 명절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 엘리는 그 사건을 잊고 있었을 것이다.

  이 성경절에 의하면, 한나는 처음에 엘리에게 자신의 기도의 내용을 말하지 않고, 이제야 큰 기쁨으로 말하고 있다. 자신의 기쁨에 대해 말하면서, 한나는 “구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단어 샤알(s∨a‘al)에 변화를 주어 동사의 다른 형태를 사용하였다.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본문은 이렇다.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개입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내가 그분께 요청한 요구를 나에게 주셨고, 그러므로 나 또한 여호와를 위하여 그를 요구하되 그가 살아있는 한 그는 여호와를 위해 요구되었나이다.” 한나는 하나님께 드린 자신의 선물이 하나님이 먼저 그에게 주신 선물이었음을 기꺼이 인정했다. 그도 다윗과 같이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라고 말할 수 있었다.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 1:17)라고 외쳤던 룻과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빌 1:21)라고 단언한 바울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했던 것도 다 이와 같은 사랑이었다.

  사무엘의 고향인 라마다임소빔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여러 장소가 제안되어 왔다. (1) 에브라임 지역에 위치한 베이트 리마(Beit Rima). 실로에서 서쪽으로 18킬로미터 지점인데, 여기에서 중앙 팔레스타인 산맥이 셰펠라 구릉지로 바뀐다. 또는 더 서쪽으로 8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렌티스(Rentis)일 가능성이 있다. (2) 베냐민 지역의 에르-람(er-Ram). 예루살렘에서 북쪽 약 8.8킬로미터 떨어져 세겜으로 가는 도로 상에 있다. (3) 에브라임 지역의 라말라. 예루살렘 북서쪽으로 14.4킬로미터, 실로 남서쪽으로 19.2킬로미터, 벧엘의 남서쪽 2.8킬로미터 지점이다. 

  실로의 서쪽 17.6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베이트 리마(Beit Rima)와 좀 더 서쪽에 위치한 렌티스(Rentis)는 사무엘의 고향이라고 하기에는 사울의 기브아(베냐민 지역에 있는)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삼상 9:1~10:9; 참조 부조와 선지자, 608 609). 사울이 아버지의 잃어버린 나귀를 찾아 이틀 동안에 집에서 40~48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여행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셋째 날까지 그 산맥 지역의 모든 언덕과 골짜기와 계곡을 자신과 종 둘이서 자세히 수색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셀(수 19:29), 납달리(수 19:36), 시므온(수 19:8), 므낫세 지파(라못 길르앗, 신 4:43; 참조 왕하 8:29; 대하 22:6) 내에 있는 라마이라는 이름의 다른 성읍들은 더 멀리 떨어져 있어서 더욱 가능성이 없다.

  비중있는 증거를 볼 때, 베냐민 접경 근처 남부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한 라말라(Ra- mallah)가 맞는 듯하다. 이 지역에 위치한 한 성읍이 사무엘의 고향에 관해 기존에 알려진 세부적인 모든 사항을 충족시킨다. 삿 4:5에 언급된 라마는 근처에 드보라의 종려나무가 있었고 벧엘에서 멀지 않았다. 이미 말했듯이, 벧엘의 남서쪽 약 2.8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라말라는 베냐민 지역의 라마일 수는 없는데, 그렇다면 기자가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벧엘보다는 베냐민의 라마에 더 근접한 여러 성읍 가운데 하나를 언급했을 것이다. 

 

사무엘상 1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

  사무엘은 라마에서 출생했다(삼상 1:1, 19, 20; 부조와 선지자, 572). 그는 바로 이곳에서 제사장으로, 선지자로, 사사로 이스라엘을 섬겼고, 초기 선지자 학교 두 개 중 하나를 이곳에 세웠다(삼상 7:17; 8:4; 15:34; 19:18~20; 부조와 선지자, 593 604). 이곳이 분명히 사울이 처음으로 사무엘을 만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그 성읍이다(삼상 9:5, 6, 11, 14, 18; 부조와 선지자, 608 609). 사무엘이 여기서 죽어 묻혔다(삼상 25:1; 28:3).

  사무엘의 라마가 또한 “숩 땅”에 있는(삼상 9:5; 참조 부조와 선지자, 608 609) 라마다임소빔으로 언급되었다(삼상 1:1, 19). 숩은 고핫 계통의 레위 자손이며, 사무엘의 5대 조상이다(대상 6:33~38). 고핫 족속의 레위인은 가나안 땅을 분배할 때 유다, 베냐민, 에브라임을 포함한 여러 지파의 지역에 있는 성읍을 배정받았다(참조 여호수아 21:4, 5; 대상 6:54~70). 숩(Zuph)의 자손들 곧 숩 사람들(the Zuphites)이 살던 지역은 “숩 땅”(삼상 1:1; 9:5)으로, 그들의 성읍인 라마는 라마다임소빔(Ramathaim-zophim), 곧 문자적으로 “숩 사람의 라마다임”(Ramathaim of the Zuphites)으로 언급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는 “에브라임 산지” 출신이고, 아마 그의 조상 숩처럼 에브라임 사람이었을 것이다(삼상 1:1). 에브라임 사람(Ephrathite)은 베들레헴 거주민(룻 1:2; 삼상 17:12) 혹은 에브라임 지파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을 지칭한다(왕상 11:26). 엘가나는 분명 후자의 의미에서 에브라임 사람이었다. 에브라임 산지는 단순히 에브라임 지파에 할당된 지역 안에 위치한 산악 지역을 말하며, 따라서 베냐민 지파 내의 산악 지역 어떤 부분도 포함하지 않았다(참조 삿 18:12, 13; 19:13~16; 삼상 9:4). 성경에서 베냐민 땅의 어떤 장소도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후에 여호와가 사무엘에게 사울을, “베냐민 땅에서 [온] 한 사람”(삼상 9:16)이라고 묘사하였다. 나중에, 사울은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사무엘의 고향 라마를 떠나 베냐민 지역 기브아에 위치한 그의 집으로 오기 위해 베냐민 지파 경계를 넘었다(삼상 10:2~9; 부조와 선지자, 608 609). 

  삼상 9:1~10:9에 나타난,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성읍을 베들레헴으로 간주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보는 것은 라헬이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다고 진술한 창 35:16~19과 라헬의 묘실이 “베냐민 경계 셀사에” 있는 것으로 언급한 삼상 10:2에 근거한다. 그러나 라마와 마찬가지로 라헬의 묘실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 묘실은 벧엘에서 베들레헴에 이르는, 24킬로미터 정도 되는 길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다(창 35:16~19). 그러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라고 말한 창 35:16의 히브리어 본문은 문자적으로 “에브랏에서 어느 정도 거리”이며, 따라서 상당한 거리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참조 창 35:16 주석). 

  베들레헴 북서쪽 1.8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라헬의 묘실의 전통적인 위치는 베냐민 지파 경계선에서 약 6.4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그러나 삼상 10:2의 히브리어 본문에 의하면, 라헬의 묘실은 이곳보다 베냐민 경계에 훨씬 더 가까이 있었고, 심지어 베냐민 지경 내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만일 이것을 베냐민의 남쪽 경계가 아니라 북쪽 경계로 이해하면, 창 35:16의 히브리어 본문과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셀사의 위치와도 모두 조화된다.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소리(렘 31:15; 참조 창 35:16~19)가 “라마에서” 들린다는 예레미야의 언급이 라헬의 묘실이 라마에서 멀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며, 이것은 삼상 10:2에 나와 있는 사울에게 준 사무엘의 지시와도 부합된다. 그러나 베들레헴에 가까운 전통적인 장소는 베냐민의 라마에서 14.4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으며, 에브라임의 라말라에서는 거의 20.8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한다는 예레미야의 언급은 바벨론으로 떠나기 위해 유대 포로들이 라마에 모였던 역사적인 사건에 기초한 것이다(참조 렘 31:1~17; 40:1). 예레미야의 진술이 마 2:18에서 예언적으로 적용되었다(참조 신 18:15 주석). 이 라마가 라헬의 묘실과 가깝지 않다면,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한다는 예레미야의 언급은 무의미할 것이다. 더 나아가 예레미야가 사마리아와 에브라임 산에 대해 언급한 것을 볼 때(렘 31:5, 6), 베냐민과 에브라임 경계 가까이에 있는 라마가 적당하며, 삼상 10:2에 주어진 자료와도 논리적으로 맞는다. 


출처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제3권


'성경주석 > 사무엘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무엘상 5장 & 성경주석  (0) 2016.04.12
사무엘상 4장 & 성경주석  (0) 2016.04.12
사무엘상 3장 & 성경주석  (0) 2016.04.11
사무엘상 2장 & 성경주석  (0) 2016.04.11
사무엘상 서론  (0) 2016.04.05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