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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4장 & 성경주석 본문

성경주석/사무엘상

사무엘상 4장 & 성경주석

Timberners-Lee 2016. 4. 12. 07:04

<사무엘상 4장 흐름정리>

홉니와 비느하스의 죽음, 여호와의 언약궤를 빼앗김, 늙은 엘리의 죽음 등은 2장 31~34절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이었다. 첫 전투에서 패배한 이스라엘은 자신의 영적 상태를 먼저 돌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언약궤만 가지고 가면 승리할 수 있으리라고 오판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마치 승리를 보장하는 부적인 양 여겼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다시 대패하고 언약궤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사무엘상 4장 줄거리>

1. 이스라엘이 에벤에셀에서 블레셋에게 패함.

3.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가져오자 블레셋이 두려워함.

10. 그들이 다시 패하고, 궤는 빼앗기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함.

12. 엘리가 소식을 듣고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짐.

19. 비느하스의 아내가 이가봇을 낳는 산고 중에 낙담하여 죽음.


<사무엘상 4장 개역한글>  

1.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은 아벡에 진 쳤더니

2. 이스라엘을 대하여 항오를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명 가량이라

3. 백성이 진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4. 이에 백성이 실로에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 있었더라

5.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6. 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히브리 진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찜이뇨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7.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가로되 신이 진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가로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일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8.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9.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어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것 같이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10. 블레셋 사람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이었으며

11.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12. 당일에 어떤 베냐민 사람이 진에서 달려나와 그 옷을 찢고 그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실로에 이르니라

13. 그가 이를 때는 엘리가 길 곁 자기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그 마음이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떨릴 즈음이라 그 사람이 성에 들어오며 고하매 온 성이 부르짖는지라

14. 엘리가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이 훤화하는 소리는 어찜이뇨 그 사람이 빨리 와서 엘리에게 고하니

15. 때에 엘리의 나이 구십 팔이라 그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16. 그 사람이 엘리에게 고하되 나는 진중에서 나온 자라 내가 오늘 진중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엘리가 가로되 내 아들아 일이 어찌 되었느냐

17. 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륙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18.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 많고 비둔한 연고라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지 사십년이었더라

19. 그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가 잉태하여 산기가 가까왔더니 하나님의 궤 빼앗긴 것과 그 시부와 남편의 죽은 소문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

20. 죽어갈 때에 곁에 섰던 여인들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하되 그가 대답지도 아니하며 관념치도 아니하고

21.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 시부와 남편이 죽었음을 인함이며

22.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사무엘상 4장 성경주석>

4:1 사무엘의 말이.

 1절의 첫 문장이 3장의 마지막 절에 따라와야 한다고 대부분의 주석자가 동의하는데, 이스라엘에게 블레셋과 싸우라고 한 것이 사무엘의 권고가 아니기 때문이다. 궤가 기럇여아림에 있었던 여러 해 동안 사무엘이 다시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아마 이스라엘의 방백들이 새롭게 임명된 이 선지자에게 자문을 구하지 않았던 것 같다(7:3). 하나님의 선지자는 실로에서 궤를 내보내는 것을 결코 조언하지 않았을 것이다(참조 3절 주석). 그러나 여호와께 드리는 예배에 관한 그분의 지시를 거절했던 그들은 법궤를 미신적인 두려움으로 바라보았고 이것을 그들에게 온갖 종류의 복을 가져다줄 마술적인 힘이 있는 부적처럼 간주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모든 사람은 사무엘과 엘리의 아들들의 차이를 인식했고, 영적인 백성들은 이 새 선지자에게 와서 조언과 도움을 구했다. 그들은 엘리와 그의 집에 대한 예언을 알고 있었고, 사무엘의 임명이 여호와로부터 온 것임을 확신하였다. 지도자가 잘못을 저지를 때 많은 이들은 자기들의 삶의 도덕적 품격이 떨어지도록 방치한다. 그러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이들의 나쁜 행실을 보고도 의의 길을 떠나지 않는 소수의 사람이 항상 있다. 

4:1 블레셋 사람.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블레셋에게 종노릇했고(삿 13:1), 그 기간 중 20년을 삼손이 사사로서 다스렸다고 사사기는 기록한다(삿 15:20; 16:31). 엘리의 사사 직분은 삼손의 그것에 바로 따라오거나 또는 겹친다. 엘리는 40년 동안 사사의 직분을 수행하였다(삼상 4:18). 엘리가 너무 늙어서 국정에 대한 통제를 상실했을 때, 블레셋인들은 산지 지역에 대한 장악력을 획득할 때가 왔다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정권의 중심이 실로에 있는 것을 알고 군대를 당연히 그쪽으로 보냈을 것이다. 

4:1 아벡에 진 쳤더니.

 “요새” 또는 “울타리”라는 뜻의 아벡은 “강제하다”, “강요하다”, “억제하다”를 뜻하는 동사에서 나왔다. 이 성읍은 욥바에서 북동쪽으로 약 18킬로미터 떨어진, 사론 평지의 한 성읍 안티파트리스(Antipatris)로 확인되어 왔다. 이곳은 언약궤를 가져왔던 실로에서 불과 40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4:10, 11). 안티파트리스 외에는 아벡으로 간주될 만한 뚜렷한 장소가 없다. 아셀 지파의 아벡(수 19:30)은 고려해 보기에는 너무 북쪽에 있다. 아벡이 “요새”를 뜻한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영구적이든 일시적이든 여러 요새화된 지역에 그 이름이 적용되었을지도 모른다. 

4:2 이스라엘이…패하여.

 이전의 많은 경우에 이스라엘 군대가 적군과의 싸움에 나가는 것을 하나님이 지시하였고, 그들이 그의 명령에 따라 그렇게 했을 때 승리가 그들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그들이 언약궤를 전쟁터에 가져가고(3절) 블레셋이 그것을 포획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힘에 대한 그릇된 확신으로 선제공격을 가했고, 쉽게 승리를 거두리라 예상했다는 증거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겸허한 믿음보다는 자신의 영리함과 무력에 대한 자만심으로 싸움에 나갔다. 하나님이 함께했을 때 그들 앞에 설 적군이 없었지만, 그분이 없을 때 패배는 분명했다. 

4:3 어찌하여.

 다신(多神)을 숭배하는 근동 지방의 사람들에게 불운이 닥치면, 그들은 보통 자신들의 신이 분노했으므로 앞으로 더 큰 고통을 피하려면 더 많은 정성으로 신의 노여움을 달래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당시의 이스라엘의 낮은 영적 수준을 고려할 때 그들도 여호와에 대해 거의 같은 태도를 가진 사실이 그리 놀랄 만한 것은 아니다(참조 부조와 선지자, 584). 아마도 엘리가 사사로 있을 당시의 승리가 그들이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대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자만심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지도자들이 주변 국가의 우상을 섬기려고 고의로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이 스스로 심은 씨의 결과를 거두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겸비하게 하는 대신, 그들은 언약궤를 단지 성공을 보장해 주는 어떤 부적으로 간주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미신적인 태도를 증명하였다. 

  하늘로부터 온 어떤 조언도 없이, 방백들은 결코 전에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제안하였고 백성들은 이에 동조했다. 그들은 성소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져 있었고, 만일 언약궤가 그들 수중에 있다면, 승리는 틀림없이 그들의 것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이 고귀한 상징물은 천 보자기로 싸여 있었고, 수종하는 레위인들이 휘장 안에 있는 보관장소에서 궤를 꺼내 왔다(민 4:5, 6). 그들이 경외를 표하는 그 모든 절차는 잊은 채 더 이상의 살육을 피하려는 희망으로 싸움터까지 몇 킬로미터를 황급히 왔으리라는 사실이 엘리 아들들의 과거 행적에 비춰 볼 때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4:3 그러나 그 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고, 지도자들이 하늘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제어하는 손길을 그들 위에 영원히 둘 수는 없었다.

 지도자들이 마음을 낮추고 죄의 길에서 돌이켰다면, 그들은 후년의 경우처럼 사무엘 선지자에게 지도받았을 것이다. 그리스도 당시 군중들은 제사장들의 지도에 따라 맹목적으로,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외쳤다. 이와 똑같이 에벤에셀의 이스라엘 군대가 재난에 직면하여 자신들의 상상의 지푸라기를 붙잡으면서 이제 승리가 보장되었다고 외쳤다. 정치 단체든 종교 단체든 지도자의 태도와 행위가 그 조직체의 재난과 번영을 크게 좌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은 소속된 단체의 운명과 다르게 독립적으로 자신의 영적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 그날의 어리석음의 결과로 이스라엘에게 초래된 굴욕을 사무엘도 함께 당했지만, 이 때문에 하나님이 사무엘을 개인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아합 시대에 지도자들이 바알에게 향했을 때, 엘리야는 자신만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섬기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여호와는, 엘리야와 마찬가지로 바른 길을 선택한 자가 이스라엘에 수천 명 있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려 주었다. 이스라엘에 닥쳤던 3년 동안의 기근도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뢰와 충성을 바꾸지 못했다. 

4:7 신이…이르렀도다.

 여러 신(神)을 숭배했던 블레셋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그들의 신들의 차이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7절에서 “신”(「제임스왕역」에는 “God”이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에 해당하는 단어 엘로힘(’Elohim)은 복수형이지만 동사는 단수 형태이다. 그러나 8절에서 동사는 복수형으로, 참 하나님과 아스돗 신전에 있는 그들의 신들 사이의 분명한 대조를 보여 준다. 

4:8 이 능한 신들(Gods).

 “능한”에 해당하는 단어는 “위엄 있는”을 뜻하는 앗디림(’addirim)으로, 하나님이 전에 여러 나라와 민족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블레셋인들이 듣고 깨닫게 된 하나님의 고귀한 능력에 대한 추가적인 생각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들은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서, 지난 수 년간 자신들에게 종노릇했던 자들에게 다시 종노릇하게 되는 운명을 죽기까지 저항하자는 비장한 결의로 분발했다. 

4:11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이 사건에 대해 말하면서 시편 기자는 “[그가] 실로의 성막…을 떠나시고 그 능력된 자를 포로에 붙이시며 자기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시고…저희 제사장들은 칼에 엎드러지고”(시 78:60~64)라고 기록했다. 승리에 대한 이스라엘의 기대가 그들의 대적의 기대보다 더 컸고 이길 것이라고 확신하며 싸움에 나갔지만, 그들은 철저히 패해서 생존자 모두는 3절에서처럼 진이 아니라 “각기 장막으로” 도망쳤다. “장막”에 해당하는 단어는 오헬(’ohel)로, “거처”, “주거지”를 뜻하며 이 말은 그들의 패배가 너무 커서 자신의 안전을 위해 각기 집으로 도망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4:11 홉니와 비느하스.

 이때 엘리는 비느하스를 위해 자신의 대제사장 직분을 사임했으나, 궤가 실로를 떠날 때 “만일 궤가 빼앗긴 후에도 그들이 살아남으면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두 아들에게 지시했다고 요세푸스는 말한다(Antiquities v. 11. 2). 만일 그 두 젊은이가 대적에게서 여호와의 임재의 상징물을 수호하기 위해 지금 했던 것처럼, 과거에 여호와의 지도를 열정적으로 따랐다면, 이스라엘의 이후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지도를 거절했고, 이제는 목숨 그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굴복에 달려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교훈을 배웠지만 너무 늦었다! 

4:15 구십팔.

 「70인역」에는 “구십”이라고 되어 있다(참조 2:22 주석). 

4:17 이스라엘이…도망하였고.

 하나님의 얼굴을 찾고자 한 지도자가 몇 명만 더 있었더라도 이스라엘의 역사가 얼마나 달라졌을까.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므로 패배의 길을 열었던 이기적인 지도자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은 당신의 얼굴을 신실히 찾는 개인의 부르짖음에 귀를 닫지 않는다.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 거민이 포로로 잡혀갔을지라도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자신들을 포로로 잡은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할 만큼 여호와와 가까이 살았다. 빛은 가장 어두운 밤에 가장 밝게 비치며, 최고의 품성은 종종 최악의 환경 가운데 계발된다. 하나님은 비참한 굴욕의 순간들을 영광스러운 기회의 시간으로 바꾸는 능력을 가졌는데, 이것은 비단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도 가능한 일이다. 

4:22 영광이…떠났다.

 “이가봇”(Ichabod)이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영광스럽지 않은” 또는 “수치스러운”을 뜻하는 이 카보드(’i kabod)라는 두 개의 히브리어 단어에서 나왔다. 이 말이 비느하스의 아내에 의해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문자적으로, “포로로 잡혔다”]”라고 정의되었다. 본 장은 악하고 이기적인 대제사장과 결혼했지만 남편의 성품을 닮지 않았던 한 젊은 여인에 대한 묘사로 마친다. 남편과 시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런 애정의 증거이지만, 하나님의 궤를 잃어버린 것에 더 큰 관심을 보인 것은 하나님과 성물에 대한 헌신의 증거였다. 가족의 죽음조차도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것에 대한 그의 관심을 능가하지 못했다. 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겼지만, 그는 이스라엘 실로에서 태어난 한 아이 때문에 작은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타락한 시대에 살면서, 경건치 못한 남편의 아내로서 참으로 경건하게 살았던 한 여인. 국가적인 혼란의 시기에 이보다 더 큰 용기를 어떻게 발견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임재는 언제나 최고의 축복으로 여겨져야 하고, 그분의 임재와 악에 대한 통제력의 상실을 가장 비참한 재앙으로 여기고 두려워해야 한다! 누구든지 유다처럼 성령의 인도를 의도적으로 거절할 때 삶은 절망적이다.


출처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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