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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 & 성경주석 본문

성경주석/창세기

창세기 1장 & 성경주석

Timberners-Lee 2017. 6. 21. 17:33

<창세기 1장 흐름정리>

하나님은 태초에 말씀으로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세상 만물은 우연이나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과 의도에 따라 창조된 것이다. 특히 맨 마지막에 창조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로서 창조의 절정에 해당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받아 하나님과 교제하며 모든 피조 세계를 다스리는 권한과 책임을 맡았다.


<창세기 1장 줄거리>

1. 하늘과 땅의 창조.

3. 빛의 창조.

6. 궁창의 창조.

9. 물이 물에서 분리됨.

11. 열매를 맺게 하심.

14. 해와 달과 별들의 창조.

20. 물고기와 새의 창조.

24. 짐승과 가축의 창조.

26.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의 창조.

29. 음식물의 지정.


<창세기 1장 개역한글>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6.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9.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11.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12.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13.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세째 날이니라      

14.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15.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에 비취게 하시며      

18. 주야를 주관하게 하시며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19.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네째 날이니라      

20.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21.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24.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25.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세기 1장 성경주석>

1:1 태초에.

 이 말은 인간적인 모든 것은 시작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시간의 주권자로 좌정해 계신 그분에게만 시작과 끝이 없다. 그러므로 성경의 시작하는 말은 인간적이고 일시적이며 유한한 모든 것과 신적이고 영원하며 무한한 것 사이에 있는 현저한 대조를 드러낸다. 이 말은 우리에게 인간적 한계를 상기시켜 줌으로써 언제나 동일하고 그 연대가 다함이 없는 분을 가리켜 준다(히 1:10~12; 시 90:2, 10). 우리의 유한한 지력은 하나님을 생각지 않고는 “태초”를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근본”(골 1:18; 참조 요 1:1~3)이기 때문이다. 지혜와 그밖의 모든 좋은 것들은 그와 더불어 시작한다(시 111:10; 약 1:17).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우리의 조물주를 닮고자 한다면, 우리의 삶과 계획이 그 안에서 새로 시작해야 한다(창 1:26, 27; 참조 요 3:5; 요일 3:1~3).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리라(빌 1:6)는 확실한 보증을 향유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그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히 12:2) 분이다. “태초에 하나님이”라는 말 속에 함축된 장엄한 사실을 결코 잊지 말자. 

  성경의 이 첫 절은 한편에서는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한편에서는 회의론자들, 무신론자들, 그리고 다양한 갈래의 물질주의자들 사이에 있는 해묵은 논쟁들 중의 하나에 예리한 초점을 맞춘다. 다양한 방법과 다양한 강도(强度)로 하나님을 배제한 채 우주를 설명하려고 애쓰는 후자는 물질/에너지가 영원하다고 주장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고, 물질이 처음에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생물로, 다음에는 더 복잡한 형태의 생물로, 마침내는 사람에게 도달하기까지 진화하는 능력이 있다면, 하나님은 사실상 불필요하게 된다. 

  1:1은 하나님은 다른 모든 것보다 먼저 존재하며, 그는 다른 모든 것의 유일한 원인(原因)임을 확언한다. 이 구절은 물질계와 관련된 모든 바른 생각의 기초이다. 여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세상을 조성하시면서 이미 존재하는 물질에 의존하지 않으셨다”(교회증언 8권, 258)라는 감명적인 진리가 나타나 있다. 

  범신론, 곧 하나님을 온 우주에 분산시킴으로 그에게서 인격성을 빼앗아 피조물 전체와 동일하게 만드는 고대의 이단 사상은 또한 창 1:1에 의해 폭로되며 반박된다. 하나님은 하나의 피조물도 있기 전에 존엄하고 지고한 상태에 있었으며, 그리하여 그가 창조한 것 위에, 그것과 구별되어 있었음을 믿을 때 범신론 교리의 기초는 없어지게 된다. 

  어떤 선언도 성경의 서두만큼 적절할 수 없다. 시작부터 독자는 인격과 의지와 목적을 소유한 전능한 존재를 소개받는데, 그는 만물보다 먼저 존재하므로 그 어떤 것도 의존하지 않고 그의 거룩한 의지를 행사하여 “천지를 창조”한 분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와 관련된 부차적인 질문들-시간에 대한 것이든 방법에 대한 것이든-로 인해 하나님과 지구의 기원 문제에 대한 참 신조와 거짓 신조를 구별하는 진정한 구획선이 이 구절에 나타난 진리를 받아들이느냐 또는 거절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흐리게 되어서는 안 된다. 

  바로 여기서 주의해야 한다. 여러 세기 동안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방법에 대해서 무한한 지혜가 계시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기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발견하려는 희망으로 “태초”라는 말에 대하여 추측해 왔다. 일례로, 이 장 끝의 추가적 설명에 나오는 ‘창조 세계의 파괴와 복원이라는 그릇된 이론’에 관한 논의를 참조하라. 그러나 모든 추측은 부질없는 것이다. 우리는 신비하고 장엄한 음조로 발한 창조의 송가(頌歌), 곧 “하나님이 가라사대” “그대로 되니라”는 모세의 간결한 선언 외에는 창조 방법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세상을 창조할 때 하나님은 틀림없이 이런 저런 식으로 만들었을 것이라든지, 아니면 자연계의 법칙들을 범했을 것이라는 따위의 말을 우리의 사고 기초로 규정하는 것은 권면을 흐리게 하며, 모세의 전체 기록이 자연계의 법칙을 범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없다고 항상 주장해 온 회의주의자들에게 도움과 위로가 될 것이다. 왜 우리는 기록된 것보다 더 현명해지려고 시도하는가? 

  특히, 우리의 행성을 구성하는 물질이 언제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추측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구와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의 창조의 시간적인 국면에 대해서 창세기는 두 가지 진술을 한다: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 (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2:2). 이와 관련된 성경 구절들은 창조에 수반된 시간에 관하여 이 두 본문에 제시된 것에 아무것도 더해주지 않는다. 하나님이 언제 “천지”를 창조하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오직 “태초에”라고 대답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언제 그의 창조를 마쳤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2:2), “이는 엿새 동안에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 일에 쉬었음이라”(출 20:11)고 대답할 수 있을 뿐이다. 

  창조 기사(記事)에 관해 이러한 언급을 하는 것은 토의를 종결시키기 위한 시도가 아니라, 우리가 분명하게 계시된 것 외에는 확실하게 말할 수 없음을 고백하기 위한 것이다. 너무도 많은 것-성경의 전체 구성까지라도-이 창조의 기록에 달려 있다고 하는 바로 그 사실은 독실하고 신중한 성경 학도로 하여금 자신의 주장을 성경의 명백한 말씀에 일치시키도록 촉구한다. 드넓은 추측의 분야들이 그로 하여금 시간과 공간의 미지의 영역을 떠돌도록 유혹할 때, 그는 “기록되었으되”라는 단순한 대답으로 그 유혹에 대항하는 것보다 더 잘 할 수는 없다. 성경 인용부호라는 보호의 영역 안에는 언제나 안전함이 있다.

1:1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조하다”로 번역된 동사는 히브리어 바라(bara’)에서 나왔는데, 여기에 사용된 형태는 결코 인간의 활동이 아닌 하나님의 활동을 묘사한다. 하나님이 “바람”(암 4:13)과 “정한 마음”(시 51:10)과 “새 하늘과 새 땅”(사 65:17)을 창조한다. 우리가 “만들다”, “조성하다”로 각각 번역하는 히브리어 아사(‘asah)와 야차르(yas.ar) 등은 흔히(전적으로 그렇진 않지만) 인간의 활동과 관련해서 사용되는데, 이것은 선재하는 물질을 암시한다. 이 세 단어는 모두 인간의 창조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성경의 맨 처음 말들은 창조가 하나님의 활동 흔적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성경의 첫 장에서 독자는 생물과 무생물이 모두 존재의 빚을 지고 있는 하나님을 알게 된다(참조 히 11:3). 여기에 언급된 “땅”[地]은 분명히 셋째 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물과 분리된 뭍이 아니라, 지구 전체를 가리킨다.

1:2 혼돈하고 공허하며.

 더 정확한 번역은 “황폐하고 공허하며”(tohu wabohu)이다. 이것은 황폐하고 텅빈 상태를 의미하지만, 지구가 한때 완전하였다가 후에 황폐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토후 와보후(tohu wabohu)라는 말이 사 34:11; 렘 4:23과 같은 다른 성경절에 함께 나타날 때, 그것은 이 본문에서 차용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토후(tohu)만 단독적으로 사용될 때 흔히 이것은 무(無) 또는 비(非)존재(사 40:17, 23; 49:4)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욥 26:7은 이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나타낸다. 이 구절의 하단은 하나님이 “땅을 공간(nothing)에 다시며”라고 진술하며, 상단은 “그는 북편 하늘을 토후[허공]에 펴시며”라는 평행절로 되어 있다. 욥기의 이 본문은 창 1:2에 나오는 토후의 의미를 분명하게 보여 주는데, 이 말과 이것의 동의어인 보후(bohu)는 땅이 형태가 없고 생명이 없었음을 나타낸다. 땅의 구성 요소들은 모두 한데 섞여 있었으며, 질서가 전혀 없고 생명이 없었다.

1:2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으르렁거리다”, “격노하다”를 뜻하는 어근에서 유래한 “깊음”은 분노한 물결이나 으르렁거리는 파도 또는 홍수 등에 자주 적용되며, 여기서 바다의 깊음이란 말이 나왔다(시 42:7; 출 15:5; 신 8:7; 욥 28:14; 38:16). “깊음”(deep)은 고어(古語)이며 여기서는 고유 명사처럼 사용되고 있다. 수세기 동안 참된 창조에 대하여 다소 희미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던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실제로 이 단어 트홈(tehom)을 의인화하여 그들의 신화 가운데서 티아맛(Tiamat) 신에게 적용하였는데, 그들은 세상이 그의 시체로부터 창조되었다고 믿었다. 성경의 기록은 본래 세상에는 빛이 없었으며, 지표면의 물질은 유동체 상태로 있었음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이 절에서 “깊음 위”는 “수면”과 평행구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1:2 하나님의 신은…운행하시니라.

 “신”은 루아흐(ruah.)이다. 성경의 용례에 비춰 볼 때, 하나님의 신은 신성의 제3위인 성령이다. 이곳에서부터 성경 전체에 걸쳐 하나님의 신은 세상이든, 자연이든, 교회든, 새 생명이든, 새 사람이든지를 막론하고 모든 창조 행위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대리자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와 창조의 관계에 대해서는 26절의 주석을 참조하라. 

  여기에 “운행하다”로 번역된 말은 므라헤페트(merah.epet)로서, 비록 그것이 성경 이후 시대의 아람 방언인 수리아어로 “품다”의 뜻도 지니고 있지만, 그렇게 번역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 그 말은 구약의 다른 곳에서 두 번만 나타난다. 그것은 렘 23:9에 나타나는데, 거기서는 “떨다”, “흔들다”라는 의미를 지니며, 한편 신 32:11에서는 독수리가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는 것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독수리는 산 새끼들을 품지 않고, 지켜보고 보호하면서 그것들 위에 너풀거린다. 

  하나님의 신의 역사(役事)는 곧 개시되어야 했던 활동, 곧 혼돈에서 질서를 이끌어내는 활동과 어떤 관련이 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신은 이미 현존해 있었으며, 명령이 주어지면 곧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성령은 항상 바로 이런 일을 해 왔다. 이 거룩한 대리자는 창조와 구속의 사업에 조력하고, 방황하는 영혼들을 견책하고 힘을 주며, 슬퍼하는 자들을 위로하고, 신자들의 기도를 하나님에게 가납될 수 있는 형태로 제시하기 위하여 항상 임재해 왔다.

1:3 하나님이 가라사대.

 6 일간의 창조의 각 날에 대한 기록은 이와 같은 선언으로 시작한다. 시편 기자가 천명한 것처럼,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9). 그리고 사도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히 11:3)을 우리가 이해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말은 하나님을 인간과 너무 흡사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어떤 이들의 마음에 거슬린다. 그러나 영감의 저자가 죽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서 어떻게 무한하신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 창조의 행위를 유한한 인간의 마음에 전달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에 의해 수행된 활동(7, 16, 21, 27절)과 반복적으로 연관된 사실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의 계시가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고 있음을 설득력 있게 나타낸다.

1:3 빛이 있으라.

 빛 없이는 아무런 생명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창조주가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가져오고 땅으로 각종 식물과 동물을 끌어오는 일을 시작하였을 때, 빛이 존재하는 일이 필수적이었다. 빛은 볼 수 있는 형태의 에너지로서, 식물(植物)에 작용하여 무기물과 화합물을 인간과 짐승을 위한 음식물로 변화시키며 생명에 필요한 다른 많은 자연적 과정을 조절한다. 

  빛은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다. 물리적인 빛이 물리적인 삶에 필수적이듯, 이성적인 존재들이 도덕적이고 영적인 생명을 소유하고자 한다면 거룩한 빛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빛”(요일 1:5)이다. 그러므로 마음에 거룩한 형상을 재창조하는 일이 신속히 진행되고 있는 자들에게, 그는 오늘도 다시 와서 “빛이 있으라”고 말함으로 죄의 그늘과 불안과 낙담을 몰아낸다.

1:4 하나님의 보시기에.

 여섯 번(10, 12, 18, 21, 25, 31절)이나 반복된 이 표현은 하나님의 활동을 인간의 언어로 전달한다. 이것은 곧, 창조의 각 행위가 조물주의 계획과 의지를 완전히 충족시킨 것으로 보는 평가이다. 마치 우리가 자신의 노력의 산물들을 바라보고 살핌으로써 그것들이 우리의 계획과 목적에 부합한다고 선언하고 싶듯이, 하나님도 창조 행위 다음에는 항상, 그의 산물들이 그의 계획에 완전히 일치한다고 선언한다.

1:4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시초에 이 무질서한 지구에는 오직 어둠만이 존재하였다. 빛이 들어옴으로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 어둠과 빛은 나란히 존재하지만, 서로 구분된다.

1: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빛과 어둠에 이름이 주어진다. 고대에는 이름을 부여하는 일이 항상 중요한 행위였다. 이름들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주의 깊이 선택되었다. 하나님은 나중에 동물들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일을 아담에게 맡겼다. 그는 때때로 종들의 이름을 그들의 생애의 경험이나 성격과 일치하도록 바꾸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육신적 부모가 구주에게 부여해야 할 이름에 대하여 그들에게 지시하였다. 창조 주일 동안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창조의 능력의 산물들인 무생물에게까지도 이름을 부여하는 것을 본다.

1:5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라.

 문자적으로는 “저녁이 있었고, 아침이 있었으며, 첫째 날이라.” 이렇게 하나님의 창조 주일의 중요한 첫날에 대한 신비한 묘사는 끝난다. 이 구절에 대해 다양한 설명들이 주어졌다. 그것은 창조 주일의 일곱 부분의 각 시간을 분명하게 나타내며, 1장에서 다섯 번(8, 13, 19, 23, 31절) 더 반복된다. 어떤 사람들은 각 창조 행위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하룻밤 동안 계속되었다고 생각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은 영감의 기록에서 저녁이 아침에 선행한다는 것을 분명히 진술하는데도 모든 날은 아침과 더불어 시작했다고 생각하였다. 

  많은 학자들은 이 표현을 장구하고 불명확한 기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이어지는 날들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활동들 중 어떤 것들, 예를 들어 식물과 동물의 창조는 실제적인 하루 동안에 완성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들은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다(벧후 3:8)는 베드로의 말에서 이와 같은 해석의 정당성을 발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천 년이 하루 같”다는 그 구절의 나머지 부분을 읽을 때, 이 성경 본문이 창조의 하루 길이를 확인하는 데 사용될 수 없음이 명백해진다. 베드로가 한 말의 문맥을 보면 그가 하나님의 초(超)시간성을 강조하려고 했음이 확실해진다. 창조주는 천 년간의 일을 단 하루에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자들에게는 천 년이 긴 기간이지만 그에게는 단지 한 날로 여겨질 수도 있다. 시 90:4은 동일한 사상을 나타낸다. 

  문자적으로 “저녁이 있었고[뒤따르는 밤 시간과 더불어], 아침이 있었고 [계속되는 낮 시간과 더불어], 이는 첫째 날”이라는 진술은 분명히 천문학상의 하루, 곧 24시간의 하루에 대한 묘사이다. 그것은 「제임스왕역」이 “날들”(여기서는 예언적인 날들을 의미함)로 번역한 후대의 히브리어 복합어인 단 8:14의 “주야”(에렙-보케르[‘ereb-boqer])와, 역시 “주야”(고후 11:25)로 번역된(「개역한글판」에는 두 경우 다 “주야”로 되어 있으나 원어 성경에는 모두 “저녁과 아침”[夜晝]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바울의 헬라어 누크데메론(nuchthemeron)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이 표현의 의미에 대하여 결코 의심하지 않는 히브리인들은 하루를 일몰에서 시작하여 다음날 일몰로 마쳤다(레 23:32; 신 16:6). 더욱이 넷째 계명의 언어는 창조의 기록상 저녁과 아침은 지구상의 하루를 구성하는 요소라는 사실에 대해 의심의 그림자도 남기지 않는다. 오해할 수 없는 말로 창조 주일을 언급하는 이 계명은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출 20:11)고 선언한다. 

  매우 많은 주석가들이 창조의 날들은 오랜 기간, 심지어 수천 년의 기간이었다는 사상에 집착하며 고집을 부리는 이유는 주로 그들이 영감된 창조의 기록을 진화론과 일치시키려고 시도하는 사실에서 그 설명을 찾게 된다. 지질학자들과 생물학자들은 이 지구의 초기 역사는 수백만 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그 동안 지질학적 형성이 천천히 이루어졌고, 생물의 종(種)들이 진화했다고 믿도록 사람들을 가르쳤다. 성경은 그 신성한 기록 전체를 통하여 이 진화론을 반대한다. 하나님이 발한 말씀의 결과로 이루어진 즉각적인 창조에 대한 믿음은, 오늘날 대다수의 과학자들과 많은 신학자들이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헤아릴 수 없는 기간 동안 지속된 완만한 진화의 과정을 통하여 존재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론의 정반대에 서 있다.

  많은 주석가들이 창조의 날들은 오랜 기간이었다고 선언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제7일 안식일을 거절하기 때문이다. 한 유명한 주석은 이러한 사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필연적으로 제7일의 기간이 다른 6일의 길이를 결정한다.…성경의 가장 훌륭한 해석자들은 하나님의 안식일의 쉼이 창조를 마칠 때부터 현재까지 계속돼 온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앞선 6일도 짧지 않은 무제한의 기간으로 간주해야 일관성이 있다”(풀핏 주석). 이런 유형의 추론은 순환 논법으로 움직인다. 성경에 주일마다 되풀이되는 쉼의 날로 그처럼 명백하게 정의되어 있는 제7일 안식일이 이렇게 거절되기 때문에, 창조 주일의 제7일은 현재까지 계속되는 것으로 선언된다. 이 비(非)성경적인 설명에 기초하면, 창조 주일의 다른 모든 날의 길이가 또한 확장된다. 건전한 성경 해석은 이와 같은 유형의 추론에 동조하지 않으며, “기록되었으되”(마 4:4, 7, 10)라는 선언으로써 원수의 모든 공격을 막아낸 말씀의 거룩한 해설자의 모본을 따라 본문에 실제적인 의미를 부여할 것을 주장한다. 

  성경은 분명하고 명백하게 7 일간의 창조를 말하며(출 20:11), 확실하지 않은 기간의 시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녁이 있었고, 아침이 있었으며, 이는 첫째 날”이라는 히브리어 표현에 나타난 대로 창조의 첫날은 24시간의 하루였음을 강조해서 선언하지 않으면 안 된다.

1:6 궁창.

 또는 “창공”(expanse). 두 번째 창조일의 역사(役事)는 궁창의 조성이었다. 최초의 큰 “물” 덩어리는 별도의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주석가들은 일반적으로 “궁창 위의 물”(7절)을 수증기로 간주한다. 본래 완전했던 지구의 기후 조건은 오늘날과는 달랐다. 

  북극에서 실시한 탐사들은 지금은 만년설과 얼음으로 뒤덮인 그 지역들을 한때 무성한 열대 수림(樹林)들이 덮고 있었음을 입증하였다. 이 지구의 초기 역사 동안에는 쾌적한 기후 조건이 지배적이었음에 대해 일반적으로 동의한다.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삶을 불쾌하게 만들 수 있고 또 실제로 어떤 지역에서는 삶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극도의 추위와 더위는 알려지지 않았다.

1: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창조 주일 첫째 날의 빛이 이름을 얻었던 것처럼, 둘째 날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창조력의 산물도 이름을 얻었다. 현대의 번역본들과 마찬가지로 히브리어에서도 “하늘”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거처와 궁창을 모두 일컫는 이름이다. 이 구절에서 “하늘”은 인간의 눈에 우리의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일반적으로 창공으로 불리는 덮개나 둥근 천장처럼 보이는 대기권 하늘을 가리킨다. 

  공기 없이는 아무 생명체도 존재할 수 없다. 식물들도 살아 있는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공기를 필요로 한다. 대기(大氣)가 없다면, 우리 지구도 달처럼 생명이 없는 곳이 되어 태양에 노출되는 부분은 엄청나게 덥고 다른 부분은 극도로 추울 것이다. 어떤 곳에서도 단 하나의 식물의 싹이 발견되지 않을 것이며, 어떤 생물이든 일순간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준 대기에 감사하고 있는가?

1:9 물이…모이고.

 셋째 날의 전반부 동안에 이루어진 세 번째 창조의 행위는 뭍과 물을 분리하는 일이었다. 시편 기자의 영감의 펜은 이 사건을 그림 같은 시어(詩語)로 묘사한다: “물이 산들 위에 섰더니 주의 견책을 인하여 도망하며 주의 우레 소리를 인하여 빨리 가서 주의 정하신 처소에 이르렀고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갔나이다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시 104:6~9). 물이 한 곳으로 모인 것은 단지 그것들이 이날부터 “한 곳”으로 모이게 되고, 또 저절로 일정한 곳의 경계 내에 제한되어 땅이 드러나게 하였음을 의미한다. 지구의 표면을 그처럼 완전히 뒤덮은 물 속에서 언덕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는 것은 하늘의 목격자에게도 틀림없이 장엄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먼 곳까지 물뿐이었던 곳에서, 갑자기 거대한 육지가 솟아나 이 지구가 전혀 새로운 모습을 띠게 되었다.

1:10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제 하나님의 눈길은 기쁨과 만족으로 창조의 셋째 날의 완성된 결과에 머물렀다. “좋았더라.” 그 원시의 마른 땅은 우리에게는 그다지 좋은 것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물 아래에서 융기한, 초목도 없는 골짜기와 언덕과 평지의 세계였다. 어느 곳에도 초록의 잎이나 이끼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만든 용도와 관련해서 그리고 그가 이끌어들이려는 새로운 경이에 이르는 적합한 준비 단계로서, 그것을 볼 수 있는 조물주에게는 좋게 보인 것 같다.

1:11 땅은…내라.

 마른 땅이 물과 분리된 후에, 하나님의 또 다른 명령이 셋째 날에 내렸다. 식물이 존재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사용된 세 가지 용어 가운데 첫 번째 것을 두 번째와 세 번째 것도 포함하는, 식물을 가리키는 총체적인 용어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별개의 부류로 간주하는 것이 더 낫다.

1:11 풀.

 히브리어는 데셰(des∨e‘)로서 그 뜻은 “푸르다”, “푸르게 되다”, “싹이 트다”이다. 이 말은 푸른 싹과 연한 풀, 곧 동물에게 먹이를 공급해 주는 각양한 식물을 가리킨다. 아마도 여기서 “풀”(데셰)은, “채소”(에셉[‘eseb])가 “씨 맺는”(참조 30절; 시 23:2)이라는 수식어적 표현 없이 나타날 때는 에셉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1:11 씨 맺는 채소.

 “채소”, 에셉(‘eseb)은 좀 더 성숙된 풀로서 그 속에 씨가 있는 것이 가장 현저한 특징이며, 인간이 먹도록 하나님이 고안한 두 종류의 식물(食物) 가운데 하나이다(29절).

1:11 과목.

 여기서는 열매를 맺는 나무들의 세 가지 특징을 주목할 수 있다: (1) 열매를 맺음, (2) 열매 속에 씨가 담겨 있음, 그리고 (3) 열매가 “지면”(地面)에서 혹은 땅위에서 맺힘. 이 나무들은 인간에게 또 하나의 식물(食物)의 근원을 제공할 것이었다(29절).

1:12 땅이…내니.

 셋째 날의 식물은 땅으로부터 돋아 올랐다. 이것은 생명을 간직한 식물을 생산하는 능력이 땅에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연적 발생이라는 사상은 과학에 위배되듯이 성경에도 위배된다.

1:12 종류대로.

 이 표현은 창 1장에 10번 나타난다. 그리고 모세의 책에서는 모두 30번 등장하는데, 특히 창 1, 창 6장, 창 7장, 레 11장, 신 14장에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은 동물과 식물의 종류에 대한 언급이지, 그것들의 생식(生殖) 활동에 대한 언급은 아니다. 하지만 생명체가 그의 부모를 닮은 자손을 재생산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일정한 한계 내의 변화는 가능하나, 그 한계는 전혀 새로운 종류의 식물과 동물을 창조하는 일에는 미치지 못한다(참조 창 6:20; 7:14; 레 11:14~16, 29; 신 14:13~15).

1:13 5절을 참조하라.

1:14 광명이 있어.

 “광명”, 므오로트(me’orot)는 3절과 4절의 “빛”, 오르(’or)와 같지 않다. 그것은 빛의 근원, 빛의 보유자, 발광체들을 의미한다. 그것들이 궁창이나 하늘의 공간에 놓여 있다는 표현이 선택된 것은 지상의 거민들이 그것들을 보기 때문이다.

1:14 주야를 나뉘게 하라.

 빛과 어두움의 차이, 곧 첫째 날에 하나님이 빛을 명한 이래로 존재해 왔던 차이를 그 이후에 지속하고 조절하기 위하여.

1:14 징조.

 이 천체들은 여호수아(수 10:12, 13)와 히스기야 당시(왕하 20:11)와 십자가에 못박히던 날(마 27:45)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호의나 불쾌함을 드러내는 특별한 행동을 나타냈다. “별의 떨어짐”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징조(마 24:29) 가운데 하나로 작용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천체들이 사람들의 개인적인 운명을 결정하기 위해서도 고안되었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였다. 점성가들은 그들의 행습을 정당화하는 근거를 14절에서 찾는다. 그러나 성경은 어떤 형태의 점과 운명 예언도 강력히 반대하므로, 인간의 일과 운명을 예언하는 데 해와 달과 별들이 길잡이 구실을 하도록 하나님이 지정하였다는 점성가들의 사상은 단호히 배격되어야 한다. 예레미야는 히브리인들에게 하늘의 징조들, 곧 그것들 앞에서 이방인들을 쓸데없는 공포로 떨게 하는 징조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경고한다(렘 10:2). 그리고 이사야는 모욕적인 풍자(諷刺)로 “하늘을 살피는 자, 별을 보는 자, 예언하는 자들”을 비웃는데, 그들의 권면을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고 사악한 일이라고 말한다(사 47:13, 14). 비록 별들을 보고 사람의 운명을 점치는 미신이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결코 뿌리를 내리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들은 일반적으로 이웃 이방인들의 별 숭배의 모본을 저항할 만한 충분한 도덕적 힘이 없었다(렘 19:13; 겔 8:16; 습 1:5).

1:14 사시.

 매년 돌아오는 절기와 다른 정해진 시간들은 천체들의 움직임에 의하여 조절될 것이었다(시 104:19; 슥 8:19). 더욱이 이 천체들은 동물의 번식기와 새들의 이동과 같은 동식물의 생명 과정뿐 아니라 농업과 항해와 인간의 다른 직업에도 주기적으로 일정한 영향을 끼친다(렘 8:7).

1:14 일자와 연한.

 일자와 연한은 태양과 관련하여 지구의 움직임에 따라 정해지는데, 태양은 달의 움직임과 함께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달력, 곧 음력이나 양력 또는 이 둘을 조합하여 만든 달력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1:15 광명.

 이 말이 이 세상에 빛을 처음으로 소개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첫째 날에 빛을 명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 빛을 발산하는 영구적인 장치가 되도록 주어졌다.

1:16 별들을 만드시고.

 “만드시고”라는 말이 첨가되었다. 별들의 기원에 관하여 두 가지 중요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1) 별들은 달과 해와 더불어 창조 주일 동안에 존재하게 되었다. (2) “별들”은 더 일찍 창조되었지만, 모세가 하늘의 발광체들을 거론하면서 여기서 함께 언급하고 있다. 첫 번째 견해를 따른다면, 창조 주일 이전에는 광대한 우주가 빈 공간이었다는 결론이 불가피하게 된다. 이 결론은 보증을 얻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의 신비한 행위에 관한 성경의 다른 많은 숨겨진 선언에 비추어 우리는 이 점을 교리화하는 데 속단하지 말아야 한다. 해와 달과 별들의 기원에 대하여 모세가 제시하고자 하는 기본적인 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 능력의 결과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 물질의 영원성에 대하여 고대로부터 항상 되풀이되어 온 이단 사상에 대한 구체적인 반박이 있다.

1:18 좋았더라.

 죄가 들어온 결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난 현재의 지구와는 달리, 천체들은 인간의 범죄의 결과로 고통을 당하지 않았으며, 창조주의 능력을 반사한다. 모든 천체들이 우주의 법칙을 충실하게 지키고 있다는 것은 전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천문학자들과 항해사들은 전체 세계에서는 기존의 법칙을 벗어난 어떤 이탈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들은 이 천체들이 자신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며, 그것들을 위하여 마련된 법칙에 계속적으로 순종할 것이기 때문에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1:20 물들은…하라.

 우리는 여기서 물과 궁창이 해양 생물과 날짐승의 창조로 번성케 되는 것을 본다. 원문은 “물들은 움직이는 생물을 많이 내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이는 문자적으로 “물들은 무리들로 가득 차게 하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구절을 영어로 더 분명하게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가득차다”라고 번역된 동사는 또한 “많이 번성하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 용어는 물고기뿐만 아니라 가장 큰 것에서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해양 동물에 적용되며, 파충류에도 적용된다.

1:20 생물.

 이 구절의 원어인 네페쉬 하이야(nepes∨ h.ayyah)는 동물과 이틀 전에 창조된 식물 사이를 분명하게 구분한다. 식물도 동물처럼 생명이 있으며 동물의 그것과 닮은 어떤 기능이 있는 것이 틀림없으나, 식물계와 동물계 사이에 현저한 차이점이 존재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 정도가 크든 작든, 동물들에게는 결정하게 하고, 먹을 것을 찾아 움직이게 하며, 고통, 기쁨 또는 슬픔을 느끼게 하는 기관들이 있다. 

  이러한 사실에서 그것들은 식물에는 적용될 수 없는 말인 “생물”(creatures)로 불릴 수 있다. 이것은 수많은 논의 대상인 히브리어 네페쉬의 의미임이 분명하며, 이 구절에서 “생물”로 올바르게 번역되었다. 네페쉬는 식물에 비하여 생명의 더 고등한 형태인 동물에 해당하는 용어이다. 초기의 번역자들은 그 용어가 이 구절에서는 “영혼”(soul)을 의미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영감받은 저자의 사상을 올바르게 전달하는 방법으로 표현하였다.

1:20 새가 날으라.

 물은 「제임스왕역」이 지적하듯이 새가 아닌 수중 생물들을 생산해야 했다. 2:19는 “공중의 각종 새”가 하나님에 의해 “흙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말한다. 1:20의 대한 히브리어 본문의 정확한 번역인 “그리고 땅위에는 새가 날으라”는 말은 곤란하게 보이는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해 준다. 문자적으로 “날개를 가진 존재”라는 단어 “fowl”(「제임스왕역」, 이 단어는 “가금”을 뜻한다-역자 주)은 오히려 “새들”(birds)이라고 읽어야 한다. 이것은 가금(家禽)과 야생 조류를 다 포함한다.

1:21 하나님이 큰 물고기…창조하시니.

 이 장에서 전혀 새로운 어떤 생명체의 창조를 소개하기 위하여 “창조하였다”를 뜻하는 바라(bara’)라는 단어가 두 번째 사용되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을 실행함으로써 큰 바다 동물, 곧 탄니님(tanninim)을 창조하였다. “고래”라는 번역은 범위가 너무 제한적이다. 그 말은 “뱀”(출 7:9, 10, 12)과 “용”(사 51:9; 겔 29:3)처럼 서로 다른 의미들을 지니지만, 이 구절과 시 148:7에서는 “바다 괴물”을 뜻해야 한다.

1:21 움직이는.

 “움직이다”라는 동사 라마스(ra-mas)는 특별히 땅위(창 7:14)나 바다에서(시 69:34) 기어다니는 동물을 묘사하는 말이지만(창 9:2), 여기서는 분명히 수중 생물을 뜻한다.

1:21 그 종류대로.

 셋째 날에 창조된 식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새뿐만 아니라 물고기도 “그 종류대로” 창조되었다고 진술한다. 이것은 우리가 보는 동물들의 뚜렷한 종류들이 창조 때에 확립되었으며,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발달의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나타낸다(참조 12절). 

  새와 물고기가 동일한 날에 창조된 이유는 루터, 칼뱅 및 다른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공기와 물 사이의 어떤 가상적 유사성에 의해서는 설명될 수 없다. 또한 각 종류대로 오직 한 쌍만이 창조되었다고 진술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물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는 말이 암시하는 것처럼 동물들이 매우 다양한 종류대로 창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개체로 창조되었음을 나타내는 것 같다. 처음에 한 인간만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동물들도 하나씩만 창조되었다는 결론을 결코 보증하지 않는다.

1:21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조주가 다섯째 날 마지막에 땅을 보았을 때, 그것은 그를 가장 기쁘게 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푸른 잎이 무성한 언덕과 반짝거리는 시내, 파란 호수뿐 아니라 움직이며 헤엄치고 날아다니는 생물들에게 처음으로 전에는 이 세상에 없었던 생명의 본질을 부여하였다. 마땅한 먹이를 찾고(마 6:26) 거처할 보금자리를 만들며(마 8:28) 이동할 때를 알만큼(렘 8:7) 어느 정도의 지력을 부여하신 창조주를 찬양할 수 있는 생물들이 이곳에 있었다. 

  앞선 날들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도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으나, 천연계는 다섯째 날에 장식물들로 채워졌다. 셋째 날에 창조된 식물들이 없었다면, 세상은 극히 볼품없는 모습을 나타냈을 것이다. 세상을 가득 채운 무수한 생명들이 없었다면, 세상은 매력과 즐거움이 훨씬 덜한 곳이 되었을 것이다. 크고 작은 이 피조물들은, 각각 모든 생명의 창시자요 보존자로서 우리가 경배를 드려야 할 위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솜씨에 대하여 우리에게 교훈을 주어야 한다. 이 피조물들은 생명에 대한 건전한 존경심을 우리에게 심어 주어야 하는데, 이는 우리가 생명을 나누어 줄 수 없으므로 그것을 조심스럽게 보호하며 파괴하지 말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1: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다섯째 날의 일은 창조주에 의해 좋았다고 선언되었을 뿐 아니라 복을 받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산물들 가운데 무생물이나 식물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의 번식과 증가에 초점을 맞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은 복의 표준 공식이 되었다(35:11; 48:4).

1:24 생물.

 셋째 날과 마찬가지로 여섯째 날은 육지 동물의 생산과 인간의 창조라는 이중의 창조 행위로 인해 부각된다. 바다와 공중의 생물들, 네페쉬 하이야(참조 20절)로 채워진 다음에, 종류대로 산 존재들을 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땅에 발해졌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세 부류로 나누어진다.

1:24 육축.

 이것은 “말 못하다”를 뜻하는 어근 바함(baham)에서 유래한 브헤마(behemah)의 번역으로, “말 못하는 동물”을 의미한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더 큰, 길들여진 네 발 짐승을 지칭하지만(참조 창 47:18; 출 13:12 등), 때로는 더욱 큰 육지 동물을 총괄적으로 나타낸다(잠 30:30; 전 3:19 등).

1:24 기는 것.

 이 말은 벌레, 곤충 및 파충류와 같이 발이 없거나 거의 식별할 수 없는 발을 가지고 움직이는 작은 동물들을 지칭하는 레메스(remes)에서 왔다. 여기서는 육지 레메스를 의미한다. 바다의 레메스는 바로 전날에 창조되었다.

1:24 땅의 짐승.

 하예토 에레츠(h.ayeto ’eres.)에서 왔다. 이 오래된 흔치 않은 히브리어는 자유롭게 배회하는 야생 동물들을 지칭한다.

1:25 땅의 짐승.

 여기에 언급된 생물의 창조 순서는 24절의 순서와는 다르다. 여기서는 앞 절에서 마지막에 언급된 그룹이 첫 번째로 열거되고 있다. 이것은 히브리어의 어법에서 “반전(反轉) 대구법”(inverted parallelism)으로 불리는 잘 알려진 배열이다(참조 창 10:1, 2, 6, 21; 잠 14:16, 17).

1:25 그 종류대로.

 이것은 모두 세 부류의 생물에 대해서 진술하는데, 각 부류는 그 종류가 독특하다. 이 영감의 말은 더 고등한 형태의 생명체는 더 낮은 생명체에서 발전했으며 무생물인 땅에서 생물체가 생성될 수 있음을 주장하는 진화론을 반박한다. 모든 유기체는 흙으로 만들어졌으며 흙이 함유하고 있는 요소 외에 다른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는다는 성경의 선언이 과학적 연구에 의해 확증되고 있다. 또한 과학자들은 결코, 생명이 없는 물질로부터 살아 움직이며 그 종류를 복제해 낼 수 있는 단 하나의 세포도 만들 수 없다.

1:25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통상적인 시인(是認)의 말로 모든 육지 동물의 창조에 대한 짧은 기록을 마치고, 저자는 서둘러 창조 사업의 절정인 인간의 창조에 대해 설명한다.

1:26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은 외모나 품성에 있어서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게 될 것이었다”(부조와 선지자, 45). 그 형상은 영적인 본성에 의해 매우 분명히 나타났다. 그는 “생령”, 다시 말해 자유 의지, 자의식이 있는 인격을 부여받은 산 존재가 되었다. 

  이 본성은 죄가 하나님의 모습을 망쳐 버리기까지 그 조물주의 신적 거룩함을 반영하였다. 우리의 본성이 다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골 3:10; 엡 4:24)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요 “그 본체의 형상”(히 1:3)인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1:26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신성한 기록은 바로 시초부터 지상의 다른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난 인간의 탁월성을 선언한다. “우리”라는 복수는 초기 교회의 신학자들에 의해 거의 만장일치로 신성의 삼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우리”라는 말은 적어도 함께 의논할 두 분의 존재를 요구한다. 사람이 “우리”의 형상대로 만들어질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다는 진술은 의논하는 당사자들이 모두 동일한 신성의 위격(位格)을 지니고 있음이 틀림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여기서 논의되고 있는 구절과, 창 3:22; 11:7; 단 7:9, 10, 13, 14 등과 같은 다양한 구절들을 통해 구약에 함축되어 있는 이러한 진리는 신약에서 충분하고 분명하게 계시되고 있다. 신약에서는 아버지 하나님 자신에 의해 하나님으로 불린(히 1:8), 신성의 제2 위(位)인 그리스도가 창조 사업에서 그의 아버지와 연합하였다는 것이 오해할 여지가 없는 말로 제시되어 있다. 요 1:1~3, 14; 고전 8:6; 골 1:16, 17; 히 1:2는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을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이 그리스도에 의해 유지되고 있음을 가르쳐 준다. 

  이와 같은 진리의 충만한 빛이 신약에 포함된 계시에 앞선 이 구약 본문들에는 비치지 않았고, 신성의 각기 다른 위격들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구약의 성경 구절만으로는 그처럼 쉽게 간파(看破)될 수 없었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창조 시에 그의 아버지의 동역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한 최초의 증거는 성경의 첫 페이지에 나타나 있다. 이 본문들은 구약뿐 아니라 신약의 영감성을 믿는 자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데, 이는 한 쪽이 다른 쪽을 설명하며 양쪽은 아름다운 모자이크를 이루는 돌들처럼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 때문에 그렇다. 26절과 27절은 이 창조 사업에서 신성의 제2 위(位)인 그리스도의 활동에 대한 암시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2절은 동일한 사업에서 성령이 협력하고 있는 것으로 언급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성의 장엄한 신비에 대한 최초의 증거가 성경의 첫 페이지에서 발견된다고 선언해도 무방한데, 이 신비는 성경의 다른 다양한 저자들의 영감의 펜이 이 진리를 더 완전하게 나타냈을 때 더욱 분명한 빛 가운데 놓이게 된다. 

  “사람”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담(’adam)인데, 하나님은 바로 그 말을 인류의 시조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였다(참조 5:2). 이 말의 의미는 다양하게 설명되었다. 그것은 “붉다”는 뜻의 아담(’adam)에서 유래한 그의 피부색을 묘사하거나, “빛나다”는 의미의 아랍어 어근에서 유래한 그의 용모를 묘사하므로 아담을 “빛나는 자”로 보게 하거나, “모양”을 뜻하는 담(dam)에서 유래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그의 본성을 가리키거나, 또한 그의 기원인 “땅”, 곧 아다마(’ada-mah)에서 유래한 “땅에 속한 자”를 가리키는데 이것이 가장 그럴 듯하다.

1:26 그로…다스리게 하자.

 (「제임스왕역」에는 “그들로 다스리게 하자”로 되어 있음-역자 주). 나머지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통치자의 입장에 서는 것이었다. “그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이 애초부터 사람을 한 사람 이상 창조할 계획이었음을 보여 준다. 아담에게 “온 땅”을 다스리는 권세를 줌으로써, 하나님은 사람을 이 지구성에 군림할 그의 대리자, 곧 지배자로 삼을 계획이었다. 어떤 주석가들은 들판의 짐승들이 언급되지 않은 사실을, 지금은 야생 동물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아담에게 복종하지 않았다는 암시로 간주하였다. 이 견해는 지지할 수 없다. 사람이 현재까지 식물을 지배할 권리를 가졌으며 “온 땅”이라는 구절에는 식물도 틀림없이 포함되었음을 부인할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아담에게 복종한 피조물들의 언급 가운데는 식물들도 빠져 있다. 실제로 이 구절은 “들짐승”(시 8:6~8)을 포함하여 지구에 살고 있는 이름이 거론되지 않은 모든 것을 총망라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에게 천체를 지배할 통치권을 주지 않음으로써 사람의 주권을 이 지구로 제한하였다.

1:27 자기 형상.

 “자기”라는 단수형을 사용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26절의 복수형은 신성이 단일성을 지닌 복수성을 소유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반면, 27절은 하나님의 복수성이 하나님의 단일성을 부정(否定)하지 않음을 강조한다.

1:27 남자와 여자.

 다른 성(性)을 언급함으로써 사람의 창조에 관하여 주어진 정보를 통해 새로운 요소가 소개된다. “남자”와 “여자”라는 말은 두 사람의 성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형용사의 번역이다. 동물들에게 선언된 번성에 대한 축복(22절)은 틀림없이 그것들도 성의 차이를 두고 창조되었음을 암시하지만, 이 사실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 아마도 사람의 창조와 관련해서 그것을 언급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람의 경우에만 거룩한 혼인 제도를 통해 성의 이중성이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 절은 2장에 제시되는 가정의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관한 계시를 위하여 우리를 준비시킨다.

1:27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에 대한 이야기는 히브리 성경의 모든 시적인 글들에서 흔히 나타나는 히브리 시의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구절에서처럼, 히브리 시에서 한 연(聯)의 첫 부분에 표현된 사상은 그 연의 두 번째나 심지어는 세 번째 부분에서 의미상에는 변함이 없으나 말에 약간의 변화를 주면서 반복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모세는 그의 시적인 능력에 대한 다른 실례들(출 15; 신 32:32, 33; 시 90)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데,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솜씨를 시적 언어로 말한 모든 영감 받은 저자들 가운데 첫 번째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기록에 이 지상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작품의 극치인 인간의 창조에 대해 언급할 지점에 이르러서는 통상적인 이야기 형식을 버리고 시의 형식을 사용하였다.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 전날 생물들에게 수여된 하나님의 복은 사람에게 적합한 특별 부언(附言)으로 여섯째 날의 끝에 반복되었다. 하와의 창조는 여섯째 날이 지나가기 전에 일어났음이 틀림없으며 두 사람에게 주어진 축복과 책임은 그들이 동일한 방법으로 공유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은 “그”가 아닌 “그들”에게 복을 주었다.

1:28 그들에게 이르시되.

 22절과 28절의 축복들의 도입부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라고 선언된 동물들을 위한 축복은 그들에 관하여(regarding them)로 되었지만, 반면에 인간을 위한 축복은 “그들에게”(unto them)로 표현되었다. 지적 존재들로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와 교통할 수 있었다. 이 절은 인간에게 준 하나님의 첫 번째 계시를 담고 있다.

1:28 생육하고.

 창조주의 축복은 처음에는 종의 번식 및 존속과 관련이 있었는데, 그것은 결코 하나님에 의해 폐지되지 않았으며, 지금 이 세상의 온 대륙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수십억이나 되는 인간들의 근원이 된 축복이다. 여러 주석가들은 이 하나님의 명령을, 인간의 재생산은 끝없이 계속되지 않고 세상이 인간과 그들의 지배를 받을 동물들로 가득 차게 될 때 중단되어야 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충만하라”고 번역된 말은 아득한 과거의 어떤 시점에 이 세상은 폐허가 되었으며, 창세기 1장은 그것의 복원(復原)에 대한 기록이라는 거짓 교리를 지지하지 않는다. “땅에 충만하라”는 말은 “땅을 가득 채우라”(「개정표준역」)는 말로 정확하게 번역될 수 있다. 이 장 끝에 있는 추가적 설명을 참조하라.

1:28 땅을 정복하라.

 이 계시도 세상의 창조물들을 다스릴 인간의 의무와 운명에 관한 지시, 곧 26절에 기록된 하늘의 회의에서 발한 말과 거의 동일한 말로 표현된 사명을 담고 있다. 유일한 차이점은 “땅을 정복하라”는 추가된 구절인데, 이것은 경작하고 채굴함으로써, 지질학적인 조사와 과학적인 발견과 기계적인 발명을 통하여 땅의 막대한 자원들을 자신의 필요를 위해 이용할 권리를 인간에게 허락하는 것이다.

1:29 모든 채소.

 다음으로, 새로 임명된 군주와 그의 신민들의 생존을 위한 식량이 마련된다. 우리는 거룩한 기록으로부터 사람은 들판과 나무의 소출들, 바꾸어 말하면 곡식과 견과와 과일을 먹고 동물들은 “모든 푸른 풀”, 곧 야채나 푸른 식물과 풀을 먹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규정의 언급은 사람이 동물들을 죽여 식물을 삼거나 동물들이 다른 동물들을 잡아먹는 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폭력과 인간과 동물에 의해 발생하는 고통스런 생명의 파괴는 세상에 죄가 들어온 결과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동물의 고기를 먹도록 허락한 것은 홍수 후의 일이었다(참조 9:3). 심지어는 고대의 이교 전설도 인간이 동물을 죽이는 일을 삼갔던 무죄한 황금 시대(Ovid Met. I. 103~106)에 대해 말하고 있다. 어떤 종류의 동물도 처음에는 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새 땅의 상태에 대해 사 11:6~9; 65:25에 언급된 예언적 공고(公告)로부터 유추할 수 있다. 그곳에서는 죄의 종식과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로 완전히 변화되는 일이 있을 것이며, 이와 함께 하나님의 피조물 중 어떤 것도 살해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죽음이 죄를 통하여 세상에 들어왔다는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은 본래 사람이나 짐승이 스스로의 식물을 얻기 위하여 생명을 취하지 않도록 의도하였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동물들의 과도한 증가를 억제하기 위하여 그것들을 죽여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전제에 기초한 모든 주장은 그 진의가 의심스럽다. 만일 동물과 인간이 억제되지 않고 영구히 증가하였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 것인지에 대해 추측하는 일은 무익하다. 하나님은 확실히 그러한 일들이 일어날 때 변모하는 상황에 대처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계획은 우리에게 계시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과도한 재생산(28절)을 억제할 필요가 발생하기 전에 죄가 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1:31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인간의 창조와 세상의 통치자로서의 그의 취임으로 인해 세상 만물의 창조는 끝났다.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은 자주 자신이 한 일을 돌이켜보고 좋았다고 선언하였다(4, 10, 12, 18, 21, 25절). 여섯째 날의 마지막에 취해진 점검에는 앞선 날들 동안 이루어진 모든 일이 포함되었으며, 결과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모든 것은 그 종류대로 완전하였다.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가 정한 목적에 부합되었으며, 그것이 창조된 목적을 성취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에 “좋았더라”는 말을 적용하고 창조의 마지막, 곧 창조의 극치와 영광인 인간에게 “심히”라는 강조와 더불어 그 말을 반복한 것은 하나님의 손에서 불완전한 것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 감탄의 표현은 시험을 받는 동안 아담과 하와에 의해 표출된 약점은 창조에 나타난 어떤 불완전함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한다.


제1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

 창세기 1장의 시작하는 구절은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하여 줄곧 신학 분야에서 많은 토론의 주제가 되어 왔다.

  어떤 사람들은, 이 절은 창조 주일의 7일보다 오래 전의 한순간에 있었던 물리적인 세계와 그 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창조를 언급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견해는 파괴와 복원 이론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토후 와보후(tohu wabohu), 곧 “혼돈하고 공허”함(2절)이라는 히브리어 표현을 곡해한 사변적(思辨的)인 신학자들에 의해 수세기 동안 주장된 것으로, 장구한 시간의 간격이 1절과 2절 사이에 있었다는 사상이다. 토후 와보후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게 되었다”는 말로 해석되었다. 본문에 대한 이러한 해석에 기초하여 그들은 세상이 아득히 먼 과거 어느 순간에 완전하게 창조되었으나(1절), 섬뜩한 대격변으로 이 세상에 있던 생명의 모든 흔적이 말살되었으며 지표가 “혼돈하고 공허”하다고 묘사할 만한 상태가 되었다는 견해를 주장한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은 창조가 반복되었으며, 각 창조 이후에 전 세계적인 대격변이 뒤따랐다고 믿는다. 마침내 헤아릴 수 없이 장구한 시간이 흐른 후에, 하나님은 다시 한 번 혼돈 속에서 질서를 이끌어냈으며 2~31절에 기록된 대로 땅을 생명체로 채웠다고 한다. 

  대략 한 세기 전에 여러 개신교 신학자들은 창조에 대한 모세의 설명과 당시 어떤 과학적인 사람들이 제안하던 사상, 곧 지구는 지질학적 변화의 긴 시대를 통과하였다고 하는 사상을 조화시키는 방법을 이 구절 안에서 발견하였다고 생각하면서 이 견해를 강력하게 지지하였다. 이 견해는 근본주의자들 사이에 인기가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지표면의 많은 부분을 구성하는 암석의 층들은 가상된 대격변의 과정을 거치면서 퇴적되었으며, 그 속에 묻힌 화석들은 그 이전에 이 지구상에 존재한 생명의 흔적들이라고 추정된다. 

  다른 사람들은 그 이론 가운데서 하나님은 2~31절에 기록된 창조 사업을 행할 때, 선재하던 물질에 힘입었다는 사상을 지지하는 논증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은 물질을 존재케 하였으며,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최소화시킴으로써 그의 능력을 제한하고자 하였다. 그 이론의 다양한 국면들이 현대의 많은 성경 번역서들 가운데 반영되었다. 

  “복원” 이론은 다음의 이유들 때문에 전적으로 거부해야 한다: (1) 히브리어 토후 와보후는 페허가 된 채로 놓여 있다는 사상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조직되고 생명이 없는 물질의 상태를 묘사한다. 그러므로 이 말에 대한 해석은 전혀 근거가 없다. (2)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 사업이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이루었”(히 4:3)음을 명백히 가르친다. (3) 그 견해는 선행된 창조, 특히 인간의 창조 시에 하나님이 행한 시도는 그가 제한적인 통제만을 할 수 있는 힘의 작용 때문에 불완전하고 좋지 못한 결과를 냈다는 신성모독적인 교리를 암시하고 있다. (4) 그 논리적 귀결을 따라, 이 견해는 창조주가 창조 주일의 사역에 기존의 물질을 사용했다고 국한시킴으로써, 그리고 그를 자연법칙 아래에 둠으로써, 성경 전체의 영감과 권위를 명백히 부정한다. (5) 창조 주일의 사건 전에 계속적인 창조와 대격변이 있었다고 하는 사상은 과학이나 영감의 말씀에서 그것을 지지하는 한 오라기의 타당한 증거도 갖지 못한다. 이것은 순수한 추측일 뿐이다. (6) 말하자면 이 견해의 기원과 발전은 다양한 이교 종파의 이교적인 철학적 사유에 의해 채색되고, 자연주의와 진화론의 합리주의적인 개념에 물들어 있다는 것을 첨언할 수 있겠다.


참고자료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 제1권, 시조사.

- 「열린노트성경」, 아가페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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