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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STORY
창세기 2장 & 성경주석 본문
<창세기 2장 흐름정리>
인간 타락을 설명하기 위한 서론적인 단계로서, 인간의 최초 상태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친히 불어 넣으신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고귀성과 존엄성을 분명하게 부각시키는 내용이다. 그리고 생명나무에 대한 언급은 인간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순종해야함을 강력히 주지시킨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할 때 가장 복된 삶을 살 수 있다. 순종과 불순종이라고 하는 주제는 향후에 전개되는 인간 역사의 복과 화를 결정짓는 근본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창세기 2장 줄거리>
1. 최초의 안식일.
4. 창조의 방식.
8. 에덴동산의 창설.
10. 거기서 흘러나는 강.
17.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19,20. 피조물들의 이름 짓기.
21. 여자의 창조와 결혼 제도.
<창세기 2장 개역한글>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4.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5.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있더라
10.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12.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14. 세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네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20.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창세기 2장 성경주석>
2:1 이루니라.
2장의 처음 세 절과 4절의 전반부에서는 실제로 첫 장의 창조 이야기가 중단없이 계속되고 있다. 1절은 장엄한 회고로 앞선 6 일간의 일, 뒤따른 안식일의 쉼을 연결시킨다. 하나님이 “그 지으시던 일을” 다했을 때, 그는 이루지 못하고 남겨 놓은 일이 없었다(참조 히 4:3). 여기서 “만물”, 곧 차바(s.aba’)라는 말은 창조된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2:2 일곱째 날에.
(「개역한글판」에는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로 되어 있음). 1절과 2절 사이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난제, 곧 전자는 하나님의 일이 여섯째 날에 마쳤다고 진술하고, 후자는 일곱째 날에 마쳤다고 진술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70인역」, 「사마리아오경」 및 「시리아역」은 그 말이 처음 사용되고 있는 히브리 본문의 “일곱째”라는 말을 “여섯째”라는 말로 대체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선택하였다. 어떤 주석가들은 히브리 본문의 “일곱째”라는 말은 필사자의 실수라고 생각하면서 이러한 변경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들 자신이 세운 본문 비평에 대한 기본적인 규칙의 하나, 곧 일반적으로 두 개의 가능한 해석들 가운데 더 어려운 것을 원래의 것으로 취한다는 규칙을 범하고 있다. (이 때문에 「개역한글판」을 만든 사람들은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라고 번역하였다-역자 주) “마치시니”(ended)라는 말은 예칼(yekal)이다. 칼뱅을 필두로 하여 몇몇 학자들은 예칼을 “끝냈다”(had finished)라는 말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문법적으로 가능하다. 다른 해석은 창조 사업이 안식일의 제정 직후에 마쳤다고 생각한다. 창조의 완성은 소극적인 면에서 창조 사업의 정지(停止)에 있으나, 적극적인 면에서는 일곱째 날을 복 주고 거룩하게 함에 있다. 정지 자체가 그 일의 완성의 일부를 이루었다.
2:2 안식하시니라.
“안식하였다”는 동사 샵바트(s∨abbat)는 실제로 노동이나 활동을 “중단하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창 8:22; 욥 32:1 등). 인간 기술공이 자신의 일의 이상을 구현하게 되었을 때 그 일을 끝내는 것처럼, 무한히 더 높은 지각을 지닌 하나님은 어떤 새로운 것을 생산해내기를 중단함으로써 세상의 창조를 완수하고 “안식하였다.” 하나님은 쉼이 필요하여 안식하지 않았다(참조 사 40:28). 그러므로 하나님의 안식은 탈진이나 피로의 결과가 아니라, 앞서 행한 일의 중단이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일곱째 날이라”는 예상되는 구절이 성경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성경 주석가들은 안식의 기간은 앞선 각각의 여섯 날들처럼 24시간만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여섯째 날의 창조가 마칠 때에 시작하여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성경 구절은 그러한 견해를 반박한다. 이 구절은 편견없는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안식이 제7일 동안에만 일어났다는 사실을 인식시켜 주는 유일한 성경 본문은 아니다. 왜냐하면 십계명 자체도 하나님이 6일 동안 일하고 창조 주일의 일곱째 날에 안식하였음을 명백히 진술하기 때문이다(출 20:11).
본문에 담긴 말에 의하면, 6일의 창조의 날들은 일반적인 길이를 갖는 이 땅의 날들이었다. 이와 다르게 해석할 어떤 분명한 빛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일곱째 날을 동일한 방법으로 이해해야 하며, 그것이 이 땅의 안식일의 근거로 언급되는 모든 구절에서 보통의 하루로 간주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출 20:11; 31:17).
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이 쉼의 날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한 설명이 첨가되고 있다. 여기서 거룩한 기록은 매주의 안식일을 하나님의 창조 사업과 일곱째 날의 쉼과 밀접하게 관련시키는데, 이는 넷째 계명에도 그렇게 나타나 있다. 일곱째 날을 축복했다는 말은 그것에 의해 그 날이 하나님의 은총의 특별한 대상이 되며, 그의 피조물들에게 복을 가져다 줄 날로 선언되었음을 시사하였다.
2:3 거룩하게 하셨으니.
거룩하게 하시는 행위는 그 날이 거룩하며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구별되었다는 선언에 있었다. 나중에 시내산이 거룩하게 되었듯이(출 19:23), 즉 한동안 하나님이 거하는 곳으로 신성함을 입었듯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 직분을 위하여 성별되었듯이(출 29:44), 희년이 종교적인 목적을 위하여 거룩하게 바쳐졌듯이(레 25:10), 여기서는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되었으며, 그와 같이 거룩한 날로 선언되었다. 일곱째 날을 복 주며 그 날이 거룩하다고 선언한 이 행위는 인류를 위해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안식일이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매주의 제7일 안식일은 흔히 유대인 시대에 속한 제도로 간주되어 왔지만, 영감의 기록은 최초의 이스라엘 백성들(야곱-이스라엘의 자손)이 태어나기 2,000년도 훨씬 전에 제정되었다고 선언한다. 더욱이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막 2:27)이라고 선언한 예수의 말씀이 있는데, 그 말은 이 제도가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해서 제정된 것임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2:3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하나님이 사람에게 일곱째 날에 안식하도록 명한 데에는 사람이 그의 창조주의 사랑과 선함에 대하여 숙고함으로 창조주와 같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누리도록 명하는 것보다 더 고귀한 이유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6일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한 것처럼, 사람도 6일 동안 수고하고 일곱째 날에 쉬어야 한다. 이 매주의 안식일은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거룩한 제도이므로, 입법자인 하나님은 그것의 준수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거룩한 시간의 일부나 전부를 빼돌리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의 죄와, 인간의 능력과 그의 시간의 원 소유자인 하나님의 것을 약탈하는 죄를 짓는 것이다. 하나님이 정한 제도인 안식일은 우리의 경의와 존중을 받을 가치가 있다. 하나님은 이를 게을리하는 것을 죄로 여긴다.
안식일은 일상적인 육체적 노동을 삼가며 정신과 마음을 거룩한 사물에 바칠 것을 요구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회(聖會)로 안식일을 사용하도록 훈계를 받았다(레 23:3). 복음서는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안식일을 그렇게 사용하였으며(눅 4:16; 행 17:2; 18:4 등), 그리스도의 지상 봉사가 마친 후에도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계속해서 준수되어야 한다(마 24:20)고 증언한다.
안식일이 새 땅에서도 예배일로서 여전히 기념될 것이라(사 66:23)는 사실은 하나님이 결코 안식일의 준수를 다른 날로 옮기도록 의도하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매주의 안식일은 창조의 기념일로서, 인간에게 매주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에 대하여, 그리고 자비로운 창조자이자 공급자인 그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빚지고 있는지를 상기시켜 준다. 안식일을 거절하는 것은 창조자를 거절하는 것이며, 온갖 종류의 거짓 이론들을 위한 문을 활짝 여는 것이다. “안식일은 그분의 존재에 대한 계속적인 증거이며, 그분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지혜와 그분의 사랑을 상기시켜 주는 방편이다. 안식일이 항상 신성하게 준수되어 왔다면, 무신론자나 우상 숭배자가 결코 생겨날 수 없었을 것이다”(부조와 선지자, 336).
2:4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이 말은 창세기 2장의 설명을 도입한다. 많은 주석가들은 2:4~3:24를, 1:1~2:4의 기록보다 더 후대에 다른 저자로부터 나온 두 번째의 다른 창조에 대한 기록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이 지지할 수 없는 이론에 관하여는 창세기에 대한 서론을 참조하라. 그 내용을 연구하면 2장은 결코 1장의 창조 이야기에 대한 다른 해석으로 생각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2장의 목적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의 가정에 두는 것인데, 이 일은 추가적인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이루어진다. 하지만 2장은 에덴의 가정이 창설된 이후에 한 그것에 대한 설명이다. 이 정보가 없었다면, 에덴의 상태에 있었던 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설명은 슬프게도 불완전할 뿐 아니라 창세기 3장의 사건들─인간의 타락─도 거의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장(창세기 2장)에는 인간의 창조, 에덴 가정의 묘사,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충성심 혹은 그의 가정에 대한 도덕적 권리에 대한 시금석, 곧 그의 지성 혹은 하나님의 창조물들을 통치할 정신적 자격에 대한 시금석, 그리고 이 첫 가정의 설립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추가적인 세부 사항들이 포함되어 있다.
2:4 천지의 창조된.
1:1에서 시작된 창조 이야기는 이렇게 종결된다. 이 말들은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그것들은 브히바르암(behibare’am)의 번역인데, 때때로 그렇게 해 온 것처럼 “그것들이 창조된 후에”라고 번역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그들을 창조할 때에”(in their crea-tion)를 뜻하며,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는 전체 구절은 “이것은 천지가 창조되었을 때 그것들의 기원에 대한 역사이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다.
2:4 대략이 이러하니라.
“대략”에 해당하는 단어 톨레도트(toledot)는 일반적으로 인간 가족의 역사, 즉 그의 자손들의 출생(참조 5:1; 6:9; 11:10 등)을 언급하는 데 사용된다. 여기서 이 말은 인간의 친족 관계가 아닌, 1:1과 2:1을 되새기는 구절인 “천지”의 창조에 대해 사용된 유일한 경우로 나타난다. 한 주석가는 “대략”(generations)이라는 말이 “그것들의 생성에 대한 역사나 설명”을 적절하게 언급한다고 주장한다. 유대백과사전은 이 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천지의 창조 과정은 2:4에서 족보와 같은 역사로 간주된다”(유대백과사전, “Generation”). “각 날은 세대 또는 발생(generation)이라고 불리었는데 그것은 이 날들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업의 어떤 새로운 부분들을 발생시켰거나 생산했기 때문이었다”.
2:5 초목.
4~6절은 지표면의 모습, 특히 창조 주일의 여섯째 날에 출현한 인간의 창조 직전의 식물에 대해 간략하게 묘사함으로써 7절의 인간 창조를 예고한다. 여기에 땅을 “경작할” 누군가가 출현하기만 하면 완전하게 될 낙원이 있다. 기대에 부풀어 활기에 넘친 모든 자연은 마치 관현악단이 모든 악기를 조율한 가운데 그들의 지휘자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들의 왕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다.
2:6 안개.
“안개”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드(’ed)는 다소 모호한 뜻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이 본문 외에는 유일하게 욥 36:27에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이 말을 “홍수”를 뜻하는 앗수르어 에두(edu)와 비교하여, 그 뜻을 성경에 나타난 이 두 구절에 적용시켰다. 그러나 “홍수”라는 말은 이들 본문의 어느 쪽과도 맞지 않으며, “안개” 또는 “수증기”는 두 경우 모두 의미가 통한다. 고대의 번역자들은 이 말을 대개 “샘”으로 표현하였는데, 이 번역은 그들이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음을 나타낸다. “샘” 하나가 온 땅을 적실 수 있었을 것 같지 않은 사실로 볼 때, “샘”이 에드에 대한 바른 번역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히 나타난다. “안개”는 가장 훌륭한 번역으로 보이며, 이 경우 우리는 “안개”를 “이슬”과 같은 뜻으로 생각할 수 있다.
노아 당시의 사람들이 하늘에서 비가 내려 홍수로 이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비웃고, 노아가 “아직 보지 못하는 일”(히 11:7)을 믿으므로 칭찬을 받은 사실은 비가 홍수 전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음(부조와 선지자, 84 85)을 나타낸다. 노아의 믿음의 눈만이, 물이 하늘에서 떨어져 자신이 지은 방주를 피난처로 찾지 않은 모든 생물을 익사시키는 장면을 그려볼 수 있었다. 홍수 후에 무지개가 제정되었으며(9:13~16),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되는 사실은, 비가 그 사건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는 의견에 무게를 더해 준다.
2:7 흙으로.
사람이 땅에서 유래한 물질들, 곧 땅의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과학에 의해 확증되고 있다. 죽은 다음에 일어나는 인체의 분해는 동일한 사실을 증명한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주된 요소들은 산소, 탄소, 수소 그리고 질소이다. 다른 많은 요소들도 적은 비율로 존재한다.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으며, 또한 취함을 입은 “땅으로 돌아”갈(전 12:7) 것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사실적인가.
2:7 사람을 지으시고.
아담의 창조에 관하여 추가적인 중요한 사항들이 제시되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하나님의 작업실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의 손이 창조의 신비한 일을 수행하는 것을 살펴보도록 허락된다. “지으시고”에 해당하는 단어 야차르(yas.ar)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고안(考案)과 모습에 일치하도록 형체를 빚어 모양을 만들어내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 말은 토기장이(사 29:16; 49:5 등), 우상을 만드는 금장색(사 44:9; 합 2:18) 그리고 하나님의 활동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며, 하나님은 다양한 것들, 그 중에서도 특히 빛(사 45:7), 사람의 눈(시 94:9), 마음(시 33:15), 계절(시 74:17)을 조성한다.
2:7 생기.
“숨”[氣]은 느샤마(nes∨amah)의 번역이다.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생명을 주는 원리가 아담의 생명 없는 몸에 들어갔다. 생명의 불꽃이 그의 육체로 전가되도록 해준 매개체를 하나님의 “(생)기”라고 말한다. 동일한 사상이 욥 33:4에도 나타난다. “전능자의 기운(nes∨amah)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사람에게 나누어진 그 “(생)기”는 그의 생명과 같다. 그것은 생명 자체이다(사 2:22). 사망 시에는 “숨(nes∨amah, 생명)이 끊어진”다(왕상 17:17). 사람에게 있는 이 “생명의 호흡”은 동물들에게 있는 “생물의 기식”과 결코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만물은 그들의 생명을 하나님에게서 받기 때문이다(창 7:21, 22; 전 3:19). 그러므로 그것은 정신이나 지능이 될 수 없다.
2:7 생령.
사람의 생명 없는 형체에 이 하나님의 “(생)기”(nes∨amah)가 불어넣어졌을 때, 사람은 살아 있는 “영”, 네페쉬(nepes∨)가 되었다. 네페쉬라는 말은 다양한 뜻을 지니고 있다. (1) 숨(욥 41:21), (2) 생명(왕상 17:21; 삼하 18:13 등), (3) 애정의 자리로서의 마음(창 34:3; 아 1:7 등), (4) 살아 있는 존재(창 12:5; 36:6; 레 4:2 등), (5) 인칭 대명사를 강조하기 위해(시 3:2; 삼상 18:1 등). 네페쉬는 하나님에 의해 조성되며(렘 38:16), 죽을 수 있으며(삿 16:30), 죽임을 당하며(민 31:19), 먹히며(은유적으로, 겔 22:25), 구속(救贖)되며(시 34:22), 소성케 된다(시 19:7)는 것을 주목하라. 이 중 아무것도 혼, 즉 루아흐(ruah.)에 적용되지 않으며, 이것은 두 용어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가리킨다. 위의 조사에서 2:7의 네페쉬를 「제임스왕역」이 “영혼”(soul)으로 번역한 것은, 만일 그것이 흔히 사용되는 표현인 “불멸의 영”이라는 의미라면, 적절치 않다는 것이 위의 검토를 통해 명백해진다. 이 개념은 널리 퍼져 있지만, 성경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바르게 번역될 수 있다: “사람이 산 존재가 되었다”(「개정표준역」). “영”을 “존재”와 동의어로 간주할 때, 우리는 이 본문에서 네페쉬의 성경적인 의미를 얻게 된다.
2:8 하나님이…동산을 창설하시고.
에덴 동산의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홍수가 본래의 지구의 물리적인 특징을 너무 바꿔놓았기 때문에 과거의 위치를 현재에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이 동산을 “공원”을 뜻하는 페르시아어에서 유래한 말인 “낙원”(paradise)이라고 부른다. 낙원을 뜻하는 히브리어 파르데스(pardes)는 구약에서 몇 번밖에 나타나지 않는데(느 2:8; 전 2:5; 아 4:13), 에덴 동산에 대한 이름으로보다는 나무를 언급하기 위해 나타난다. 헬라어로 파라데이소스(paradeisos)인 “낙원”은 「70인역」 역자들에 의해 우리의 첫 부모의 가정에 처음으로 적용되었다.
2:9 나무.
사람의 훌륭한 거처를 준비하는 일에 실용성뿐 아니라 장식(裝飾)에도 주의가 기울여졌다. 그의 필요와 기쁨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각종 식물들이 제공되었다. 꽃과 나무와 관목들은 그 향기로는 사람의 감각을 기쁘게 해주었고, 그 절묘한 형태와 매혹적인 색깔로는 눈을 즐겁게 해주었으며, 감미로운 과일로는 미각을 만족케 하였다. 온 시대를 통하여 에덴은 세상적 탁월함에 대한 인간의 가장 높은 개념이 되었다.
2:9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이 말들이 나타나는 순서는, 마치 그것들이 사후 고안인 것처럼 현대 언어권에 사는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보인다. 이 때문에 어떤 비평적인 학자들은 9절의 후반부가 나중에 첨가된 것이거나 본래의 것이 와전(訛傳)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영어로 번역되었을 때 이상한 것처럼 보이는 이 배열은 히브리어에는 보통 있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본문의 순수성에 대해 의심할 구실이 전혀 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 12:17은 문자적으로 “여호와께서 바로에게 큰 재앙을 내리시며, 그리고 그의 집에도”라고 읽을 수 있다. 이와 동일한 문장 구조에 대한 다른 실례들은, 비록 영어 번역에서는 그렇게 인식할 수 없을지라도, 창 28:14; 민 13:23; 신 7:14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담과 하와는 안식일을 준수함으로써 그들의 창조주에 대한 믿음과 충성을 나타냈던 것과 마찬가지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생명의 유지자인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표현할 기회를 가져야 하였다. 이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은 이 나무에 초자연적인 효력을 부여하였다. 그 열매는 사망에 대한 해독제가 되고 그 잎은 생명과 불멸을 유지하는 요소가 됨으로, 인간은 그것을 먹는 한 계속해서 살게 될 것이었다.
그 나무들 중 하나는 “생명”의 나무, 문자적으로는 “그 생명”(the life) 곧 하하이임(hah.a-yyim)의 나무라고 하였다. 이 말이 형태상 복수인 사실은 그것을 추상명사를 나타내는 복수로 인식함으로써 설명되는데, 여기서 정관사는 이 나무가 “그” 생명 자체와 어떤 관련이 있으며, 다시 말해 생명은 그 나무의 열매를 사용함으로써 얻어지거나 보존될 것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먹기에 좋은” 동산의 다른 나무들도 생명을 유지하도록 되어 있었다. 만일 한 나무가 “생명나무”라는 특이한 이름으로 다른 나무들과 구별된다면, 그 열매도 다른 나무들의 열매와는 다르고 가치가 뛰어난 어떤 방법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이 나무의 열매를 먹는 일이 인간으로 “영생”할(3:22) 수 있게 할 것이라는 진술은 이 나무의 가치가 동산에 있는 다른 많은 유용한 나무들의 가치와는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준다.
두 번째 나무의 이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인데,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이다. “지식”이라는 말 앞에 붙은 정관사 “그”는 그 나무가 어떤 종류의 지식이나 모든 종류의 지식을 다 제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과 대조된 “악”에 대한 슬픈 지식만을 제공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나무들의 이름은 중요하다. 두 경우 모두에서 “나무”라는 말은 생명과 지식이라는 추상적인 용어와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이 두 나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선언할 아무런 이유도 제공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에게 영적인 의미를 부여해 준다. “언약궤”가 성전 기구의 실제적인 한 품목이었으나, 그것도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이름을 받았다. 우리를 대신하여 구주가 흘린 속죄의 피 또한 매우 실제적인 물질이었다. 마찬가지로 그 두 나무도 성취해야 할 중요한 목적이 있는 사실적인 나무들로 간주되어야 하며, 이것들의 물질적이고 도덕적인 목적들은 그 이름에 나타난다.
2:10 강.
10~14절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 많은 학자들이 노력을 기울였으나, 홍수 후의 지표면이 이전 것과는 같은 모습이 거의 아니기 때문에 아마도 만족할 만한 설명을 결코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높은 산맥들을 융기시키고 광대한 대양을 형성하게 한 그처럼 엄청난 규모의 격변은 강과 같은 보다 약한 지표면의 특징들을 그대로 남겨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영감의 말씀이 제시하는 것 외에 현재의 지표면의 모습으로 홍수 전의 지리적인 조건을 확인하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
2:11 비손.
첫째 강의 이름인 비손은 성경 외의 자료에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으며, 심지어는 성경 자체에서도 이 강은 다른 곳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이 강을 인도의 인더스나 갠지스, 애굽의 나일 또는 아나톨리아에 있는 강들과 동일시하는 학자들의 견해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2:11 금이 있는 하윌라.
이와 동일한 고유 명사가 다른 본문들에서도 나타나지만, 그것은 홍수 후 시대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본문들은 2:11의 “하윌라”의 위치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2:12 베델리엄.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베델리엄은 그 원산지가 아라비아, 인도, 페르시아 및 바빌로니아인 나무로서, 투명하고 향기로운 수지(樹脂)였다. 이것이 홍수 전 시대의 베델리엄과 동일한 것이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호마노. 이것은 아마도 붉은 색깔을 띤 보석 혹은 준보석들 중의 하나였음이 틀림없다. 고대의 번역들은 호마노(onyx), 붉은 줄무늬 마노(sar-donyx), 홍옥수(sardius) 및 녹주석(beryl)으로 다양하게 번역한다. 그러므로 “호마노”란 번역이 정확한지는 확실치 않다.
2:13 기혼.
이 절과 14절에 대하여는 10절의 주석을 참조하라.
2:15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자신이 창조한 사람을 위하여 거처를 준비한 하나님은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라”는 분명한 사명과 함께 이 에덴의 가정에 그를 두었다. 이 명령은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왔을 때 완전하였다는 사실이 경작, 곧 인간의 노동의 필요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인간은 동산을 받았을 때와 같은 완전한 상태로 그것을 보전하기 위하여 자신의 육체적 및 정신적 능력을 사용해야 하였다. 새 땅에서 육체적 노동이 삶의 즐거운 모습이 될 것이라는 사실(사 65:21~23)은 일이 저주가 되도록 의도되지 않았음을 가리킨다.
아담에게 준 동산을 “지키라”는 명령은 아마도 그가 경계하지 않으면 그에게서 그것을 앗아갈 위험이 닥칠 것이라는 숨겨진 암시일 것이다. “지키다”, 샤마르(s∨amar)라는 동사는 “경계하다”, “주시하다”, “보전하다”, “관찰하다” 그리고 “굳게 잡다”라는 뜻이다. 어떤 주석가들이 이 본문을 해석한 것처럼, 아담이 동산을 야수의 공격으로부터 지키도록 요청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확실히 합당하지 않다. 타락 이전에는 지상에서 동물들 사이에나 사람과 동물 사이에 어떤 적대감도 존재하지 않았다. 공포와 적대감은 죄의 결과이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세상의 통치권과 동산의 소유권을 강탈하려고 하는 매우 실제적인 다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한편 동산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그것을 “다스린다”는 말과 동의어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자신의 의도를 사람에게 먼저 알리지 않고는 영향을 끼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보증이 있다(암 3:7). 만일 인간에게 유익한 것만을 행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목적을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가 이 세상을 위협하는 위험에 대하여 아담에게 알려 주었을 것임이 틀림없다(부조와 선지자, 36 52, 53).
2:16 동산 각종 나무.
이 구절과 관련된 명령은 사람이 하나님이 말한 언어와, “할지니라”와 “말지니라” 사이의 구별을 이해하였음을 전제로 한다. 그 명령은 한 나무만 제외하고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자유롭게 먹도록 허락하면서 긍정적으로 시작한다. 다른 모든 나무를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는 권리는 “먹고 또 먹을지니라”, 곧 아콜 토켈(’akol to’kel)이라는 강세형 관용구에 의해 강조되며, 이것은 하나님의 금령에도 적극적인 측면이 있음을 나타낸다.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그러므로 이 자유에 대한 제한은 훨씬 더 구체적이다. 사람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이름을 지닌 한 나무(9절 주석 참조)의 열매를 먹어서는 안 되었다. 이것은 계시되지 않았으므로, 그 나무가 어떤 종류의 열매를 맺었을까 하고 추측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동산에 이 나무가 있는 그 자체가 사람이 자유로운 도덕적 존재였음을 나타냈다. 인간의 봉사는 강요되지 않았다. 그는 순종할 수도 불순종할 수도 있었다. 결정은 그의 것이었다.
열매 자체는 무해(無害)했다(교육, 25). 그러나 그것을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은 이 나무를 인간의 충성과 순종을 시험하는 근거가 되도록 구별지었다. 도덕적인 존재로서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그의 양심에 기록하였다. 그러나 그의 율법을 어떤 특별한 상황에 적용시킴으로 그 법의 원칙들을 밝혀 조물주에 대한 인간의 충성을 공정하게 시험하려는 듯이 인간에게 금령이 부과되었다. 하나님은 만물의 진정한 소유자였으며, 심지어는 아담이 위탁받아 가지고 있는 것들의 소유자였으며, 이러한 사실은 그 자신을 위하여 피조물의 어떤 부분이라도 확보해 둘 수 있는 권리를 그에게 부여하였다.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여 이 세상의 많은 부분을 확보해 두고 아담에게 오직 작은 부분만을 사용하도록 허락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은 불합리한 것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사람은 한 나무를 제외하고는 동산에 있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이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을 금지한 것은 명백히 하나님에 대한 충성의 분명한 증거를 보이도록 하는 것 외에는 어떤 다른 목적으로도 사용되지 않았다.
2:17 네가 먹는 날에는.
이 금령을 범할 경우 심각한 형벌, 즉 죽음이 수반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형벌을 언급하고 있는 어법이 그 명령을 범한 바로 그 날에 형벌을 시행할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발표와 그것의 성취 사이에 중대한 모순이 있음을 본다. 그러나 “네가 먹는 날에 정녕 죽으리라”, 문자적으로 “네가 죽고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선언은 범죄한 날에 판결이 선고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사람은 조건적 불멸의 신분에서 무조건적 불멸의 상태로 옮겨갈 것이다. 타락 직전에 아담은 생명나무에 의해 그에게 허용된 불멸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파국과 더불어 발생한 그의 죽음은 매우 확실하였다. 이것이 바로 육체적 죽음이 즉각적으로 올 것이라는 사실 이상으로 그 말이 함축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사람이 원칙들을 선택할 것을 요구하였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 자신을 그것에 복종시키고, 그 결과로 그가 잘될 것이라고 믿든지, 아니면 자기 자신의 선택에 의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함으로 아마 그에게서 독립해야 하였다. 그러나 생명의 근원으로부터의 분리는 필연적으로 죽음만을 가져올 뿐이다. 동일한 원칙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형벌과 죽음은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역에 빠지기로 자유롭게 선택한 것에 대한 확실한 결과들이다.
2:18 돕는 배필.
즉 그의 필요에 적절한, 그를 보완해 주는 배필. 짐승들은 떼나 무리로 창조되었지만, 사람은 적적한 개인으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사람이 오랫동안 홀로 있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었다. 외로움은 인간의 복리(福利)에 손해가 될 것이므로,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반려자를 만들고자 하였다.
2:19 각종 들짐승.
어떤 주석가들이 하나님은 인간에게 반려자를 제공하기 위하여 각종 동물들을 창조함으로써 여러 가지 성공적이지 못한 시도들을 하였다고 표현한 사상은 창조 이야기 중 이 부분의 의도를 오해한 것이다. 모세가 기록한 것은 동물의 창조의 시점이 아니라 단지 그에 대한 사실이다. 「제임스왕역」에서 “지으시고”(formed)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형태는 “지으셨다”(had formed)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며, 따라서 그것은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 초반의 창조 행위를 돌이켜 보게 한다. 따라서 이 절의 첫 부분은 바로 뒤에 오는 것에 대한 머리말로 주어졌다.
2:19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은 이 동물들을 연구하고 그것들에게 적절한 이름을 부여하는 중요한 일을 수행해야 하였다. 그는 그 일을 위해서 그것들과 그것들의 습관을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이 일은 그에게 그것들을 지배할 자격을 부여하였거나 아마도 그 자격이 있음을 입증해 주었을 것이다. 동시에 그는 그것들이 누리고 있는 가족 생활에 대해서 알고 자신에게는 그 교제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동물들보다 무한히 높게 창조하였다는 사실도 인식하였으므로, 그는 그것들 중에서 반려자를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만일 여자를 조성하는 일이 창조주의 목적을 충분히 충족시키는 것이었다면, 아담은 그 자신의 불완전함을 자각하고 교제의 필요성, 다시 말해 그가 홀로 남아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2:20 아담이 모든 육축…에게 이름을 주니라.
사람은 언어의 기능을 지닌 존재로 창조되었음이 분명하다. 아담은 이제 이 능력을 사용하여 자신의 동물 연구에서 이루어진 관찰을 표현하였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자연과학에 입문하게 되었으며, 동물들의 이름을 지음으로써 그것들을 다스리는 일을 시작하였다. 육축들은 그들의 미래의 관계에서 다른 동물들보다도 인간에게 더 가까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먼저 언급되었을 것이다. 사람이 좋아하는 새들, 그 중 그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될 어떤 종류의 새들은 두 번째로 열거된다. 아담과 홍수 이전의 세계가 어떤 언어를 사용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이름들이 무엇이었는지 밝혀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2:20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동물의 창조에 대한 아담의 연구는 그에게 상당한 지식을 제공하였으나 그와 동등한 다른 존재와 더불어 교제하고 싶은 그의 갈망을 충족시켜 주지는 못했다. 이러한 사실은 여자가 남자와 더불어 누려야 할 동등한 동반자 관계를 지적해 준다. 그보다 열등한 피조물 가운데서는 아담에게 어울리는 진정한 반려자를 발견할 수 없었다.
2:21 깊이 잠들게 하시니.
아담의 몸으로부터 그의 반려자를 창조하기로 계획한 하나님은 그를 마취로 인한 무의식 상태와 비교될 만큼 깊은 잠에 빠지게 하였다. 아담이 잠든 동안 하나님이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그 자리를 살로 채운 일은 사실상 외과 수술이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측면”, “문짝”, (건물의) “익면”(翼面), (벽 덮개의) “판벽”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첼라(s.ela‘)가 여기서는 “갈빗대”라는 뜻을 지닌다. 「70인역」과 「불가타역」으로부터 현대어 성경에 이용된 이 전통적인 번역은 설형 문자의 기록을 통해 정확한 것으로 증명되었다. 히브리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던 앗수르어에서 갈빗대를 가리키는 말은 셀루(se∨lu)였다.
2:22 여자를 만드시고.
모세는 히브리어를 잘 구사하였으며 독자들에게 감명을 주기 위하여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알았다. 하나님의 창조 활동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는 1장의 이야기에서 “창조하다”(1:27), “만들다”(1:26), “이루다”(2:7)라는 동사를 사용하였다. 이제 그는 여기에 다소간 같은 뜻의 용어인 “짓다”(to build)라는 동사를 첨가한다. 이 각각의 용어는 그 나름대로 독특한 뉘앙스를 지닌다. 아담의 갈빗대는 그의 반려자가 그것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기본적인 물질을 형성하였다. 그 여자는 남자와 더불어 분리될 수 없는 연합과 생명의 교제를 나누도록 지음을 받았으며, 그녀가 창조된 방식은 결혼에 대한 도덕적 법령을 위한 실제적인 기초를 놓는 것이어야 하였다. 여자는 “동등한 자로서 그의 곁에 서서 그의 사랑과 보호를 받아야” 하였다. 결혼은 주와 그의 교회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과 생명의 교제의 표상이다(엡 5:32).
2:22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하나님이 친히 첫 결혼식을 엄숙히 거행하였다. 여자를 만든 후, 하나님은 그 여자를 아담에게로 인도하였는데, 그는 틀림없이 그때쯤 깊은 잠에서 깨어나 있었을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것처럼(눅 3:38), 하와도 하나님의 딸로 불려진 것이 당연하였다. 그녀의 아버지로서 하나님은 그녀를 아담에게로 인도하였으며 그녀를 아담에게 선물하였다. 그러므로 결혼 언약이 그 신성한 제도의 창시자를 의미하는 이름인 하나님의 언약(잠 2:17)으로 불린 것은 적절하다.
2:23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아담은 그녀를 소망하던 반려자로 알아보고 자신의 신부로 기쁘게 환영하였으며 자신의 기쁨을 시적인 외침으로 표현하였다. “이는 바로”라는 표현은 그가 여자에게서 그의 마음의 소원의 성취를 보았을 때의 유쾌한 놀라움을 반영한다. 그가 세 번씩이나 반복한(히브리어 본문에서) “이것”이라는 말은 즐거움과 놀라움 가운데 그의 눈이 지금 첫사랑의 강렬한 전율을 가지고 머물고 있는 그녀를 생동감 있게 가리킨다. 본능적으로 또는 하나님의 지시의 결과로 그는 그녀가 그 자신의 일부임을 인식하였다. 그는 이제부터 그녀를 그 자신의 몸처럼 사랑해야 하였다. 왜냐하면 그녀를 사랑함으로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강조한다(엡 5:28).
2:23 여자라 칭하리라.
아담이 그의 새롭게 창조된 반려자에게 준 이름은 그녀가 창조된 방식을 나타내었다. “여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잇샤(’is∨-s∨ah)는 “남자”를 뜻하는 이쉬(’is∨)라는 말에 여성형 어미가 더해져 이루어진다. 영어의 “여자”(woman은 앵글로-색슨어로 wife-man이라는 뜻임)와 “남자”(man)라는 말의 관계도 이와 비슷하다. 다른 여러 언어들에서도 마찬가지다.
2:24 부모를 떠나.
이 절의 말씀은 아담의 예언적인 발언으로 간주될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 자신의 말씀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것은 결혼 예식에서 하나님이 하신 선언의 일부이다(참조 마 19:4, 5; 산상보훈, 99). 이 말은 남자와 여자의 가장 심오한 육체적 및 영적 연합을 표현하며, 세상 앞에 일부일처제가 하나님이 정한 결혼의 형태임을 주장한다. 이 말은 자식의 의무와 부모에 대한 존경을 버릴 것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한 남자의 아내는 근본적으로 그의 애정의 첫째가 되어야 하며, 그의 첫째 의무도 그녀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이 그의 부모에 대한 매우 당연한 사랑을 대신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지만 그것을 능가하는 것이어야 한다.
2:24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남편과 아내는 육체의 연합, 관심의 공동체, 애정의 상호성을 통해 존재하는 바, 그들의 연합은 오해할 수 없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리스도가 이혼을 강력하게 정죄할 때 바로 이 문단을 사용한 사실은 의미심장하다(마 19:5).
2:25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아담과 하와는 외형적인 의복이 필요치 않았다. 왜냐하면 창조자가 그들 안에 완전하게 반영된 그분 자신의 의로운 품성을 상징하는 빛의 두루마기로 그들을 둘렀기 때문이다. 그들의 조물주의 도덕적 형상이 그의 지상의 자녀들에게서 다시 반사될 때, 그는 그들을 자신의 소유로 주장하기 위하여 다실 오실 것이다(참조 계 7:9; 19:8; 실물교훈 69, 310,). 순결의 흰 두루마기는 지상의 구원받은 자들이 낙원의 문으로 들어갈 때 입게 될 의상이다.
참고자료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 제1권, 시조사.
- 「열린노트성경」, 아가페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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