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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편 & 성경주석 본문

성경주석/시편

시편 1편 & 성경주석

Timberners-Lee 2016. 5. 23. 07:49

<시편 1편 서론>

교훈 시편 혹은 지혜 시편 중 하나이며 잠언의 금언시와 유사항 종류인 시 1편은(시 2편과 함께) 시편 전체, 그중에서도 특히 시편 제1권의 서론 역할을 한다. 이러한 연유로 이 시는 "문지방 시편"으로 불려 왔다. 이 시편은 "고아 시편"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이 시에 어떤 제목이나 표제가 붙어 있지 않고 또한 그 안에서 저자나 그 지은 동기를 유추해 낼 만한 어떤 외적 단서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는 이 시에 "두 길"이라는 제목을 붙이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겨진다. 이 시는 의는 흥하고 악은 실패한다고 하는 시편에 자주 등장하는 영적 원칙에 대한 간결한 시적 표현이다. 이 시는 또한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친 사람이 누리는 행복과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을 도외시한 채 살아가는 사람이 맞게 될 철저한 멸망에 관한 구약의 설교이다. 시 1편에는 이 같은 믿음이 확고히 내포되어 있다. 이 같은 믿음이 시편의 다른 시들에서는 논란거리가 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이 시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치 소네트(단시)처럼 면밀하게 지어진, 시편의 서론 역할을 하는 이 시는 서로 대조를 이루는 두 개의 연으로 나뉘어 있다. 1~3절은 의인이 의도적으로 악을 피하며, 하나님의 율법이 자신에게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고백하는 것으로 인해 누리는 행복을 묘사한다. 이 구절은 또한 의인을 의의 열매를 맺는 나무로 비유하는 것을 통해서 의로운 삶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생생히 묘사한다. 4~6절은 겨의 비유를 들어 악인의 부행을 묘사하며 또한 그 같은 삶이 어떤 결과를 맞는지도 말한다. 그런 후에 이 연은 의인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흥하지만 악인은 결국 망할수밖에 없다는 말로 결론을 맺는다.


<시편 1편 개역한글>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 1편 성경주석>

1:1 복 있는.

 히브리어 아쉬레(’as∨re). 시편에 25회 쓰였는데, 그중 19회는 “복 있는, 복 받은”(blessed)으로, 나머지 6회는 “행복한”(happy)으로 번역되었다. 여기서는 “오, 사람의 행복이여!”라는 식의 감탄사로 쓰인 듯이 보인다. 행복은 물질적인 복과 영적인 복을 둘 다 포함하는데, 이 둘은 모두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결과로 이르러 오는 것이다. 산상설교(마 5:3~11)의 팔복에서 “복 있는”으로 번역된 단어는 「70인역」에서 시 1편의 “복 있는”을 번역하기 위하여 쓰인 단어(헬라어 마카리오스[makarios])와 동일한 단어이다. 시편은 복으로 시작하여 할렐루야로 끝난다(참조 시 150편).

1:1 악인.

 히브리어 르샤임(res∨a‘im). “의”를 의미하는 체데크(s.edeq)의 반의어로서 불경함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용어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의도적이고 고집스러운 위반을 암시한다.

1:1 좇지…서지…앉지.

 이 세 낱말은 악한 삶이 변해가는 모습을 점층적인 순서로 묘사한다. (1) 세상적인 관습들을 따름으로 하나님의 뜻에 조화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삶의 방향을 따라가는 것(참조 교회증언, Ⅳ, 587), (2) 죄의 매력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 멈추어 서서 유혹과 장난을 치는 것, (3) 확고히 죄인 집단의 일원이 되어 자신에게 주어진 빛조차도 무시하는 것. 한 랍비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서도 그들 사이에서 토라(율법)에 관한 이야기가 오고가지 않는다면 그들은 “(의인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한 바로 그 오만한 자들의 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경건한 자의 삶의 소극적인 면들을 먼저 묘사하고 있다. 그는 죄악에 오염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악을 행하는 자들과의 교제를 회피한다. 그는 악을 향해서 “아니오”라고 말한다. 그는 일정한 범위 안에서 자제된 삶을 살아간다.

1:1 죄인.

 히브리어 핫타임(h.at.t.a’im). 무지나 도덕성의 결핍으로 인해 “표적을 벗어나다”라는 의미를 지닌 하타(h.at.a’)라는 어근에서 유래함.

1:1 오만한 자의 자리.

 경건한 사람은 고의적으로 악을 선택함으로 남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일에서 쾌감을 느끼는 자들과 벗하지 않는다.

  이 절은 종합대구법의 한 전형이다(참조 33, 34쪽).

1:2 율법.

 근본적 의미는 “가르침” 혹은 “교훈”이며, 보통은 “명령” 혹은 “율법”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토라(torah). 일반적으로 토라는 하나님의 뜻이 기록된 계시를 의미한다.

1:2 즐거워하여.

 히브리어 헤페츠(h.epes.). “기쁨”과 “갈망” 둘에 다 쓰이는 단어이다. 커버데일(Coverdale)판 성경(16세기)은 “갈망하고 즐거워하여”라는 번역을 통해서 이 두 의미를 결합하고자 노력한 듯이 보인다. 이제는 경건한 사람의 삶이 지닌 적극적인 면들이 묘사되고 있다(참조 1절). 참성도는 의를 향해서 “예”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명상하는 일에서 지속적인 기쁨을 발견한다. 그는 습관적, 규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한다. 그에게 이것은 전혀 진력나는 일이 아니다. 즐거움에 대한 시인의 개인적 체험은 시 119:16, 35, 47 등에 표현되어 있다.

1:2 묵상하는.

 히브리어 하가(hagah), 문자적으로 “중얼거리다.” 여기에서부터 “낮은 목소리로 읽다”, “독백하다”, “명상하다”와 같은 개념들이 파생되었다. 명상에 대한 시인의 개인적 체험이 시 119:15, 148(이 절들에서는 하가가 쓰이지 않고 그 동의어가 쓰였다)에 표현되어 있다(참조 치료봉사, 503, 504,; 교회증언, Ⅳ, 539). 모세가 자신의 고별 설교들 중 두 번째 것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권고(신 6:6~9)와 비교하라. 또한 여호수아가 그의 직임을 맡을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하신 권면의 말씀(수 1:8)과도 비교하라. 마음에 이 같은 선입견이 있는 사람은 경건한 사람이 시 1:3에 묘사된 결과들을 체험하는 것을 기이한 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잠 못 이루는 밤을 효과적으로 보내는 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명상하며 보내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참조 시 17:3; 42:8; 119:55 등).

1:3 시냇가.

 히브리어 플라김(pelagim). 인공적으로 만든 도랑을 가리키는 용어로, 여기에는 나무에 대한 보살핌이 암시되어 있다(참조 겔 31:3, 4).

1:3 심은.

 이 비유는 이 나무를 어떤 목적으로 심은 것임을 암시한다. 이 나무는 좋은 위치에 심기어 매우 정성스럽게 재배되고 있다.

1:3 나무가…같으니.

 시인은 (단순한 관상수가 아닌) 열매 맺는 나무 비유를 통해서 경건한 삶의 열매들을 보여 준다. 렘 17:8에서도 이와 유사한 비유적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1:3 과실을 맺으며.

 여기에 미완료 시제의 히브리어 동사가 쓰인 것은 이 행위가 반복적인 것임을 의미한다.

1:3 마르지 아니함.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념한 결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복을 받는다. (1) 그는 성령의 열매들을 맺는 유용한 삶을 산다(참조 갈 5:22, 23; 히 12:11), (2) 그는 일년 내내 싱싱하고 활기 넘친 삶을 산다(시 92:12, 13), (3) 그는 궁극적으로 자신이 노력한 성과를 거둔다. 이 나무가 땅에 뿌리를 내리고 마르지 않는 냇물로부터 수분을 빨아 당기는 것처럼 경건한 사람도 뿌리를 내려 구원의 샘물로부터 자양분을 빨아들인다. 그는 확고부동하고, 변치 않으며 또한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따라서 비록 고난과 유혹이 엄습한다 해도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 시련이 크면 클수록 그의 뿌리는 더욱 깊어지며, 하나님을 붙잡은 그의 손은 더욱 강해진다.

1:3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곧 “그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형통할 것이다.” 의인은 어떤 일에 종사하든지 항상 형통한다. 그가 행하는 일의 성공 혹은 실패와는 상관없이, 하나님께 대한 그의 신뢰심이 그에게 영원한 근원으로부터 생명을 빨아들이며 또한 궁극적으로 자신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준다.

1:4 그렇지 않음이여.

 「70인역」에서는 이중 부정을 통해서 이 사상을 강조하고 있다. 「제임스왕역」에는 이 구절이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그렇지 않음이여”로 번역되어 있다.

1:4 나는.

 여기에서는 두 가지 비유적 표현들이 역설적 용법으로 쓰였다. 그 나무는 외견상으로는 자유를 빼앗긴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유를 누리며, 자라나며, 열매를 맺는 중에 있다. 겨는 외견상으로는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환경의 노예이다. 생명과 힘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붙어 있는 그리스도인은 자라나서 열매를 맺게 된다. 하지만 힘의 원천에서 잘려서 떨어져 나온 겨는 그 어떤 열매도 생산해 내지 못한다. 이 겨가 가지고 있는 자유는 전혀 소유할 가치가 없는 자유이다.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에 대한 예수의 비유(마 7:24~27)와 비교하라.

1:4 겨와 같도다.

 겨의 비유에서 시인은 악한 삶이 어떤 결과를 맺는지를 보여 준다. 이와 유사한 비유적 표현이 욥 21:18과 사 17:13에서도 발견된다. 겨는 나무와는 달리 뿌리가 없으며 어떤 한 장소에 고정되어 있지도 않다. 아무런 힘도 없고 생명까지도 상실해 버린 이 마른 겨는 모든 게 다 제멋대로이다. 악인들은 아무것에도 붙어 있지 못하고 그냥 이리저리 떠다닌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안정성이 결핍되어 있고 또한 오래 견딜 수도 없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종종 바람부는 언덕의 평평한 노지에서 곡식을 타작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겨는 날아가 버리고 귀중한 낟알만 남게 된다. 만일 시인이 팔레스타인이 아닌 다른 지역에 살았다면 겨가 아닌 회전초(回轉草)를 비유로 들었을 수도 있다.

1:5 견디지 못하며.

 특히 마지막 심판의 때 곧 악인들이 삶의 종착역에 이르러 의인들과 분리되는 그때에 이 같은 일이 명백히 성취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참조 마 25:31~46).

1:6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하나님은 의인들의 일에 관여하신다. 그들이 형통한 삶을 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시의 마지막 절에서 두 길의 종국이 서로 다른 것에 대한 궁극적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기 때문에 당신의 영원한 표준에 따라 그것들을 구별하신 후 인정하기도 하고 정죄하기도 한다. 

  “한가지 교훈 그리고 오직 하나의 역사가 분명히 반복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세계는 어찌되었든 도덕적 기초 위에 세워졌으며, 장기적으로 볼 때 선인은 잘 되고, 장기적으로 볼 때 악인은 잘못된다는 사실에 있다”(손치노[Soncino]판 시편 주석에 인용된 프루드[Froude, 19세기의 영국 역사학자 James Anthony Froude-역자 주]의 말).


출처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제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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