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ORY

시편 2편 & 성경주석 본문

성경주석/시편

시편 2편 & 성경주석

Timberners-Lee 2016. 5. 24. 08:01

<시편 2편 서론>

시편의 메시야 시편 중 첫 번째인 시 2편은 "여호와의 기름부음받은 자의 노래"라는 그에 걸맞는 이름으로 불려 왔다. 시 1편과 2편은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시 1편이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는 삶을 사는 선인의 행복과 악인의 궁극적인 멸망을 공표하는 것처럼, 시 2편도 여호와께 대한 열방의 반역이 헛되다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을 보여 준다. 시 1편은 개인들이 가는 두 길을 묘사하고 있는 반면에, 시 2편은 민족들이 가는 두 길을 묘사한다. 시 1편은 복으로 시작하는 반면에, 시 2편은 복으로 끝을 맺는다. "사람은 시도하고 하나님은 처리한다."라는 말이 시 2편에 나타나 있는 주제인 듯 보인다. 

구조적으로는 이 시가 네 연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연이 거의 동일한 수의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연(1~3절)은 우주의 통치자와 메시야에게 도전하고 있는 이 땅의 권력자들의 모습을 제시한다. 둘째 연(4~6절)은 이와 대조적인 모습, 곧 여호와께서 그들의 도전을 무시해 버리시고 메시야를 시온산에 왕으로 세우시는 모습을 보여 준다. 셋째 연(7~9절)은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세상의 합법적인 소유주로 선포하는 명령에 대하여 깊이 숙고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다. 넷째 연(10~12절)은 여호와의 기름부음받은 자에게 굴복할 것을 권고한다. 이 시는 복에 대한 언급과 더불어 끝을 맺는다(12절).


<시편 2편 개역한글>

1.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3.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4.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5.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7.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시편 2편 성경주석>

2:1 어찌하여 열방이.

 이 시는 격렬한 혼돈 상태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돌연히 시작한다(「개역한글판」에서 “열방”으로 번역된 단어가 「제임스왕역」에는 “이방”[heathen]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여기에서 “이방”으로 번역된 단어의 본래 의미는 “나라들”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던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들을 일컫는 용어였다. 루터는 시인의 이 질문을 다음과 같이 알기 쉽게 의역하였다. “여호와와 그의 그리스도께 대적하는 자들이 어찌 형통할 수 있겠느냐?”

2:1 분노하며.

 히브리어 라가쉬(ragas∨). 이 단어는 오직 여기에만 나오는 것으로(아람어 형태는 단 6:6, 11, 15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의미는 “격정에 사로잡히다”, “흥분하다”이다.

2:1 민족들.

 히브리어의 대구법 원칙에 따르면 이 단어는 “열방”과 같은 의미로 쓰인 것이다.

2:1 경영하는고.

 히브리어 하가(hagah). 참조 시 1:2 주석. 이 죄인들은 지금 자신들이 결코 성취할 수 없는 어떤 일을 꾀하고 있다. 하나님 정부에 대적하고자 하는 그들의 모든 의도는 결국 실패로 결말지어질 것임이 분명하다.

2:2 세상의 군왕들이.

 2절은 1절의 일반적인 진술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을 제시한다. “군왕들”은 6절의 “나의 왕”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다. “나서며”는 결연한 저항의 태도를 나타낸다.

2:2 기름받은 자.

 히브리어 마쉬아흐(mas∨iah.). 이 단어에서 “메시야”가 파생되었다. 문자적으로 “기름부음받은 자”를 의미한다. 마쉬아흐는 두 번 “메시야”로 번역되었다(단 9:25, 26). 고대 관습에 따르면 제사장들과 왕들은 자신들의 직무를 위해 위임되는 때에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았다(참조 출 28:41; 삼상 10:1). 다윗은 종종 사울을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고 일컬었다(삼상 24:6, 10; 26:9 등). 이 시가 메시야적 의미를 담고 있음이 행 4:25~27을 통해서 입증된다. 참조 마 26:63; 요 1:49; 행 13:33; 롬 1:4; 골 1:18; 히 1:2~5.

2:3 그 맨 것을 끊고.

 하나님께 반역하는 자들이 여호와의 권위에 의해 부과된 속박을 끊고자 하는 자신들의 갈망을 공공연히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시인이 묘사하는 것은 반역자들의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자신들의 의도를 방자하게 선포하고 있는 모습이다.

2:4 웃으심이여.

 열방의 떠들썩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여호와는 하늘에서 반역자들의 헛된 시도를 보고 웃으시며 조용하면서도 차분하게 앉아 계신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참조 교육, 173; 치료봉사, 417). 모든 것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부패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계획을 방해하며 또한 그들의 행동노선을 우매한 것으로 돌려놓는다(참조 삼하 15:31). 여기서 하나님은 인간의 속성들을 지닌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즉 그는 “웃으신다”(참조 시 37:13; 59:8 등). 탈무드에 “토라(율법)는 인간의 언어로 말한다”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영감받은 저자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특성들과 속성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것들을 사람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엘렌 G. 화잇이 “가나안의 언어”를 쓸 줄 몰라서 하늘의 영광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였던 것과 비교하라(초기문집, 19). “웃으시다”의 의미가 “비웃으시다”, “분을 발하시다”, “진노하시다”(4, 5절)라는 단어들에 의해 더 확대 표현되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경멸을 나타내는 단어들이다.

2:5 그때에…이르시기를.

 언뜻 보기에는 하나님이 이 일에 무관심하신 듯하다. 하지만 그의 이 같은 태도가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그때에”라는 단어가 하나님이 마침내 자신의 결심을 선포하실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2:6 내가 나의 왕을…세웠다.

 (「제임스왕역」에는 이 문장에 “이미”[yet]가 첨가되어 있음-역자 주). “이미”(yet)는 보통 “그리고”(and)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접속사를 번역한 것이다. 여기에서 이 단어는 인용문을 소개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 이 문장에서 대명사 “나”가 강조되어 있는데, 이 “나”는 여호와를 대적할 음모를 꾸미고 있는 자들을 일컫는 “저희”(5절)와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2:6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참조 시 48:2. 시온은 본래 예루살렘 성읍 안에 있는 남쪽 언덕 이름인데, 후에 예루살렘에 대한 시적 명칭이 되었다.

2:7 내가 영을 전하노라.

 이제는 기름부음받은 자이며, 말씀이며, 하나님의 대변자인 예수가 자신이 아들 됨에 관한 하나님의 큰 선포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의 직분은 다른 어떤 존재에게서 빼앗아 온 것이 아니다. 그의 메시야 직분은 아버지의 명령에 근거한 것이다. 이 명령에는 (1)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과 (2) 그가 온 세상의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8, 9절; 참조 겔 21:27).

2:7 내 아들.

 참조 히 1:2, 5; 마 14:33; 16:16; 행 8:37; 요일 4:15.

2:7 너를 낳았도다.

 이 말을 아들의 최초 탄생을 의미하는 말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에게는 원래부터 있고 빌려오지 않고 다른 곳에서 파생되지 않은 생명이 있다”(시대의 소망, 530). 성경에 대한 가장 좋은 해석자는 성경 그 자체이다. 영감받은 저자들은 구약의 예언들을 정확하게 적용하였을 것임이 틀림없다. 다른 모든 적용은 인간의 견해에 근거한 것으로, 이것들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신” 것들이 아니다(참조 신 18:15 주석). 이 본문의 예언에 대한 영감받은 사도의 주석에 근거해 볼 때, 시인의 이 말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예언임이 분명하다(행 13:30~33).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함으로 결코 모방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선포되었다(롬 1:4).

2:8 내게 구하라.

 여호와와 메시야의 관계는 아들의 어떤 요구라도 다 들어주시는 그런 관계이다. 기름부음받은 자의 정부를 전복하려는 반역자들의 모든 시도가 완전히 허사가 되었음이 강조되고 있다. 아들은 후사로서 모든 것을 유업으로 받는다. 따라서 그는 그와 함께 후사가 된 우리와 그 유업을 나눌 수 있다(참조 롬 8:17 주석).

2:9 철장.

 통치자의 권위에 대한 상징. 메시야의 원수들은 철저한 패배를 맛보게 될 것이다.

2:9 부수리라.

 참조 계 2:27:12:5; 19:15.

2:10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반역자들 앞에 두 길이 놓여 있다. 그들은 계속 반역하여 멸망에 이르는 길로 나아갈 수도 있고, 아니면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여 영원한 행복에 이를 수도 있다. 시인은 동료들을 위해 탄원하는 그들의 형제로서 반역의 지도자들에게 하나님께 굴복할 것을 엄숙히 권고한다. 반역은 어리석은 일이다.

2:10 교훈을 받을지어다.

 문자적으로 “충고를 받으라”, “훈계를 받으라.” 시인이 지도자들에게 여호와와 메시야에 대한 자신들의 의무를 깨닫고 또한 깨달은 의무를 권장하는 데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충고하고 있다.

2:11 경외함으로.

 이 말과 “떨며”라는 말에는 겸손히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에 반역한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지를 깨달은 데서 오는 두려움도 포함되어 있다. “즐거워할지어다”라는 말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는 기쁨이 뒤따른다는 것을 보여 준다.

2:12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즉 여호와가 당신의 아들로 선포한 메시야를 경배하라. “입 맞추라”라는 말은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존경심을 표하는 동방의 관습을 연상시킨다(참조 삼상 10:1). 시인은 메시야에게 반역하려는 자들에게 그를 왕으로 인정하고 그의 통치에 굴복하라고 충고한다(참조 요 5:23).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라는 번역이 히브리어 본문을 아주 자연스럽게 번역한 것임에도 고대와 현대의 번역판들에서 이와 상이한 다양한 번역들을 찾아볼 수 있다. 「70인역」에는 이 구절이 “교훈을 붙잡으라”로 번역되어 있다. 또한 「불가타역」에도 이와 동일하게 번역되어 있다. 이 번역판들은 여기에서 “아들”로 번역된 단어에 대한 유대교의 설명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듯하다. 이 설명에 따르면 여기에서 “아들”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벤(ben)이 아닌 아람어 바르(bar)이다. 유대인들은 바벨론 유수 이후 이 바르(bar)라는 단어를 토라(Torah)의 훈계를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하였다. “입 맞추다”로 번역된 나샤크(nas∨aq)라는 단어는 “결합하다”라는 뜻도 지니고 있다(나샤크가 “부딪히다”로 번역되어 있는 겔 3:13을 참조하라). 「70인역」의 번역은 이 두 의미를 결합한 것이다. “입 맞추다” 대신 “경의를 표하다”로 쓰인 번역판들도 여럿이 있다(「모팻역」, 「레이(Ray)역」, 미국 유대 출판 협회역). “경의를 표하다”는 “입 맞추다”로 번역된 단어에 대하여 설명을 곁들여서 번역한 것에 불과하다. 

  초기교회가 다윗을 시 2편의 저자로 인정하였음에도(행 4:25) 비판적인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시를 바벨론 유수 이후 작품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둘 모두 “아들”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히브리어 벤과 아람어 바르가 시편에서 서로 호환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로 제시한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은 이미 그 타당성을 상실하였다. 이 두 단어가 BC 14세기에 기록된 한 우가릿 문헌에서 서로 호환적으로 쓰이고 있다. 이를 통해서 성경의 어떤 책에 아람어 단어들이 나온다고 해서 그것이 그 책이 후기에 쓰였음을 보여 주는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의 발에 입 맞추라”라는 「개정표준역」의 번역은 글자 수의 재배열을 포함한 히브리어 본문의 재구성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본래의 히브리어 본문은 번역하기에도 용이하고 또한 그 번역이 문맥상으로도 전혀 무리가 없다. 따라서 원문의 의미에서 동떨어져 있는 「개정표준역」의 번역은 거부되는 것이 마땅하다. 이 본문의 번역상의 문제점에 대한 전체적 논의에 관해서는 성경 번역 상의 문제들(Problems in Bible Translation), 144~147을 참조하라.

2:12 길에서 망하리니.

 무한한 사랑(요 3:16)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결국은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발하여지며 또한 그 진노가 메시야를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을 삼켜 버릴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마음으로 이스라엘이 구원받기를 열망하신다(참조 겔 18:30, 31). 그는 죄인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32절).

2:12 다 복이 있도다.

 이 시는 여호와의 왕을 신뢰하는 모든 이에게 복을 선언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사람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모두가 다 죄를 범하였으며 따라서 모두가 다 구세주를 필요로 한다. 자신들의 필요를 깨닫고 메시야를 신뢰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아들인 예수의 통치에 복종하도록 그들에게 호소해야만 하는 엄숙한 의무가 지워져 있다. 시 2편은 메시야의 선교 찬양으로 불리고 있다.


출처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제6권


'성경주석 > 시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편 5편 & 성경주석  (0) 2016.05.27
시편 4편 & 성경주석  (0) 2016.05.26
시편 3편 & 성경주석  (0) 2016.05.24
시편 1편 & 성경주석  (0) 2016.05.23
시편 서론  (0) 2016.05.23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