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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32편 & 성경주석 본문

성경주석/시편

시편 32편 & 성경주석

Timberners-Lee 2016. 7. 6. 07:27

<시편 32편 서론>

다윗의 마스길.

시 32편은 통회의 시이다. 이 시에는 개인의 참회와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교훈이 겹합되어 있다. 이 시는 죄를 용서받는 복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려는 깊은 목적을 지니고 있다. 이 시는 다윗이 밧세바와 더불어 중대한 죄를 범한 후에 지은 것으로 그의 고백과 그가 받은 용서에 대한 기록이다(참조 삼하 11~12장). 1~5절에서는 다윗의 개인적 경험이 다루어지고 있으며, 6~11절에는 권면이 주어져 있다. 이 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죽는 순간까지 좋아했던 시로 알려져 있다. 이 신학자는 벽에 이 시를 써 놓고 병상에서 누워 그것을 바라보았다.

* 마스길 : 히브리어 마스킬(maskil)을 음역한 것으로 "신중히 하다"라는 의미의 샤칼(sakal)에서 파생하였다. 13개의 시편에 나타나는 이 표제는 이들 시들이 교훈적이요 지시적인 것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마스킬은 시 47:7에서 "지혜"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이들 모든 시편에 교훈이란 관념을 억지로 적용할 수 없으므로 마스킬을 어떤 종류의 음악 연주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시편 32편 개역한글>

1.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2.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3.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4.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   

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6.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찌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찌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7.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셀라)   

8.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9.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찌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10.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1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찌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찌어다


<시편 32편 성경주석>

32:1 허물.

 히브리어 페샤(pes∨a‘). “반역” 즉 하나님께로부터 떠나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 단어는 고의적인 죄를 의미한다.

32:1 사함을 얻고.

 히브리어 나사(nasa’). 해석에 관해서는 시 25:18 주석을 참조하라.

32:1 죄.

 히브리어 하타아(h.at.a’ah). 과녁을 맞히지 못하는 것, 곧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는 관점에서의 죄.

32:1 가리움을 받은.

 이렇게 숨겨졌기 때문에 더 이상 죄인을 거슬러 나타나지 않는다(참조 시 85:2). 죄가 가려지는 것이 그것이 간과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죄가 용서되는 근거는 단 한 가지인데, 그것은 곧 회개이다. 고백(요일 1:9)은 거기에 회개가 동반될 때에만 가치가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 두 과정을 혼돈하여 죄책을 시인하는 것만을 근거로 용서를 요구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상황의 실제적인 측면들에 관심을 갖고 계신다. 회개는 죄에 대하여 슬퍼하는 것뿐 아니라 삶에서 죄를 제거하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이처럼 죄를 제거하는 것은 위에서 오는 능력을 힘입어서 그 영혼이 스스로 행하는 행위이다(시대의 소망, 466). 이 같은 경험 후에는 자동적으로 용서가 뒤따라온다. 하나님은 삶에서 물리친 모든 죄를 용서할 수 있다.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알고 있는 모든 죄를 영혼에서 제거하는 것보다는 자신들이 지은 죄들을 용서받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이 있는 듯이 보인다. 그들은 “지금까지 지은 자신들의 죄를 고백된 채로 남겨두려는 고상한 목적을 위해서만 애쓰고 있을 뿐, 고백이 각 경우마다 죄를 제거하는 일이 수반된 때에만 효력이 있는 그런 목적을 위해서는 애쓰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의는 품고 있는 단 하나의 죄도 가려 주지 않을 것이다”(실물교훈, 316). 이 귀중한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유전되고 배양된 악행의 낡고 해어진 옷들을 벗어던져야만 한다. 이것이 다윗이 경험한 바였다. 그가 그 큰 죄를 용서받은 것은 바로 이 같은 그의 경험에 근거된 것이었다. 그의 회개는 참된 회개였다. 그는 자신이 범한 그 죄를 증오하였다(참조 정로의 계단, 28, 29).

32:1 복이 있도다.

 히브리어 아쉬레(’as∨re). 참조 시 1:1 주석. 1, 2절은 죄를 허물과 죄와 정죄라는 세 가지 이름으로 묘사하고(참조 출 34:7), 한 걸음 더 나아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원칙에 관해서 논한다.

32:2 간사.

 히브리어 르미야(remiyyah), “속임.” 다윗은 자신이 알고 있는 한에서는 그 마음속에 어떤 거짓도 품고 있지 않다. 이는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고백은 진실한 것이다. 참조 계 14:5.

32:2 정죄.

 히브리어 아원(‘awon), “도덕적으로 비뚤어진 상태”, “구부러진 것”, “죄책.”

32:2 당치 않은.

 즉 하나님은 그 죄를 그 죄인의 계정에 올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진정으로 회개한 자를 마치 그가 죄를 범한 적이 전혀 없는 것처럼 받아 주신다(정로의 계단, 67). 그 죄는 우리의 대속자이신 예수께서 대신 지신다. 그 결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에 관해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의 대속자이신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염려하게 된다”(Ellen G. White, General Conference Bulletin, Apr. 23, 1901, 420).

32:3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다윗은 그 자신에게까지도 그의 죄를 고백하기를 거절했다. 다윗은 우리아 및 밧세바와 관련된 죄를 범한 후에도 만 1년 동안 외관상으론 별 어려움이 없는 안전한 삶을 살았다(참조 부조와 선지자, 723). 하지만 그는 극심한 정신적 번민과 그 결과로 이르러 온 육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참조 시 6:2, 3; 31:9).

32:3 신음.

 히브리어 셔아가(s∨e’agah). 참조 시 22:1 주석.

32:4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다윗은 지금 죄책감으로 인한 괴로움에 대하여 언급한다.

32:4 진액.

 생명력. 히브리어 본문에서 이 문장은 의미가 불명확하다. 「70인역」에는 이와 전혀 다르게 “내 안에 가시가 있는 동안 나는 참으로 비참해졌다”로 되어 있다.

32:5 내가 이르기를.

 이 구절에 관한 더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삼하 12:1~14; 눅 15:18을 참조하라.

32:5 내 죄를 아뢰고.

 죄의 용서는 그것을 깨닫고 고백함으로 이르러 온다. 이 절에 쓰인 죄를 나타내는 세 단어에 관해서는 1, 2절 주석을 참조하라.

32:5 주께서.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이 단어가 강조되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는 “입술에서 음성이 발하여지기도 전에 상처가 치유된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32:6 이로 인하여.

 용서받은 자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 주고 싶은 거룩한 욕망을 갖게 된다(참조 행 5:42).

32:6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시인의 이 말은 사람들이 용서를 구할지라도 용서받지 못하는 때가 있음을 암시한다. 만일 하나님이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는(출 34:6) 하나님이며 또한 기꺼이 “널리 용서”한다면(사 55:7),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인류를 위한 은혜의 시기가 끝날 때에는 이 같은 상황이 자연스럽게 이르러 올 것이다(참조 암 8:11, 12; 계 22:11). 하지만 죄인 개개인들은 그보다 일찍 그 같은 경험을 할 수도 있다. 많은 사람이 자신들은 별 심각한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적어도 한동안은 죄에 탐닉하다가 어떤 편리한 순간에 회개하고 용서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죄가 비극적인 것은 그것이 너무나도 단단히 영혼에 달라붙어서 확고히 생활양식의 일부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종종 나중에는 그것을 버리고자 하는 욕망을 느끼지 않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충분한 지식의 빛을 받은 상태에서 죄를 범할 때는 이렇게 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죄를 포기하고자 하는 기본적 욕망이 없는 상태에서는 용서가 주어질 수 없다. 이 같은 경우들 중 외관상으로는 구원을 받고자 하는 욕망과 죄의 제거를 위한 신실한 요구가 나타나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만일 근본적으로 마음에 품고 있는 죄들을 포기하고자 하는 욕망이 없다면 구원에 대한 추구는 전적으로 헛된 것이다. 

  유다의 경우처럼 때때로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죄인이 용서를 구하는 경우도 있다(마 27:3~5). 또한 에서가 그랬던 것처럼 물질적 이득을 위해 용서를 구하는 죄인도 있다(히 12:16, 17). 그러나 만일 유다에게서 그 위협적인 결과들이 제거되었다면, 또한 에서가 장자의 권한을 다시 회복하였다면 이들은 둘 모두 다시 자신들의 죄된 옛 삶을 추구하였을 것이다. 이 같은 요구는 하나님이 가납하실 수 없는 요구이다(참조 시 32:1 주석).

  그러나 죄인은 용서를 구하는 진실한 탄원에 관해서는 하나님이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그의 귀를 막지 않으신다는 확신을 갖고 안심해도 된다. 동시에 그는 고집스럽게 범하는 고의적인 죄가 그를 죄에서 깨끗해지고자 하는 욕망을 더 이상 갖지 않는 상태로까지 이끌어 갈 수도 있음을 경계받아야만 한다. 히 10:16에 기술된 상태가 바로 이 같은 상태이다. 이 절에 쓰인 동사의 시제를 고려해 볼 때 다음과 같은 번역도 가능하다. “만일 우리가 계속 고의적인 죄를 범한다면…죄들을 위한 제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32:6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용서받은 영혼은 하나님의 구원하는 반석 위에 안전히 그리고 높이 설 것이다. 큰 비가 온 후에 협곡과 골짜기에 물이 갑자기 불어나는 것과 그로 인해 주민들이 느끼는 두려움에 대해 익히 알고 있던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이 비유적 표현이 매우 인상 깊은 것이었다.

32:7 은신처.

 참조 시 9:9; 27:5.

32:7 구원의 노래.

 용서받은 사람은 조용하게 있을 수 없다. “내가 어찌 노래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모세와 미리암의 노래와 비교하라(출 15장). 그리스도인이 노래하면 그의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그의 기쁨에 동참한다.

32:8 가르쳐.

 히브리어 사칼(sakal). 이 시의 표제에 나오는 “마스길”(maschil)이 이 단어의 어근이다. 

  어떤 사람들은 8, 9절을 시인이 “범죄자”들에게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겠다고 한 그의 서원을 이루기 위해 한 말로 여긴다(시 51:13). 그러나 이 절들은 1~8절에 묘사된 시인의 경험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여기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다윗은 하나님의 도에서 떠나고 하나님의 인도를 져버렸기 때문에 미혹되었다. 그의 비극적인 경험이 미래에 반복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또한 어떤 성질의 것이든 도덕적으로 타락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에게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그 후로는 그분이 자신을 인도하도록 하는 일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이 그에게 미래의 승리에 대하여 그가 꼭 가져야만 하는 확신을 심어 주었으며, 그 결과로 그는 소망이 고취되었다.

  여기에 개괄되어 있는 과정 속에서 도덕적 타락을 막는 안전책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도에서 교훈을 받아야만 한다. 그리하면 그는 선과 악을 분명히 식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는 매사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가장한 유혹자를 알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삶은 복잡하고 원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법으로 그럴듯한 이론들을 펴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새로운 교훈을 받아야만 한다. 이 같은 교훈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또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성경을 읽음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드리는 일은 어떤 것이라도 하지 않겠다고 마음에 작정하고 이같이 가르침을 받는 그리스도인은 모든 면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참조 시대의 소망, 668; 교육, 282 ; 부모와 교사와 학생에게 보내는 권면, 17, 18).

32:9 말이나 노새같이.

 시인은 무지하여 힘으로 억제해야만 하는 짐승과 하나님으로부터 지성을 부여받은 사람을 대비시키고 있다(참조 사 1:3; 렘 8:6).

32:10 슬픔.

 또는 “고통.” 이 절은 반의대구법의 한 훌륭한 실례이다.

32:11 즐거이 외칠지어다.

 시인은 다른 사람들을 찬양의 합창에 끌어들이는 것을 즐기고 있다(참조 시 64:10).

  이 시는 죄를 범하였으나 한동안 고백하기를 거부한 채 죄책감으로 고통당하다가 마침내 그것을 인정하고 고백하여 용서를 받은 사람의 마음의 역사이다. 이 시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시로 불리기에 적합하다.


출처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제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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