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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6장 & 성경주석 본문

성경주석/열왕기하

열왕기하 6장 & 성경주석

Timberners-Lee 2017. 6. 15. 07:12

<열왕기하 6장 흐름정리>

엘리사가 물에 빠진 선지 생도의 도끼를 기적적으로 건져준 사건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시며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임을 시사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리 택한 백성이라도 그들의 죄악은 결코 간과치 않으시며 경고하신다. 아람의 이스라엘 침공 사건은 이 점을 밝히 입증한 사례였다. 아람 군이 엘리사를 잡으려다가 도리어 사로잡혔던 일은,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 보여 이스라엘로 하여금 회개케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치 않자 사마리아 성이 도리어 아람 군에게 포위되고 굶주린 백성들이 자식까지 잡아 먹는 최악의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열왕기하 6장 줄거리>

1. 엘리사가 젊은 선지자들에게 자신들의 거처를 확장하도록 허락한 후, 도끼를 물에 떠오르게 함.

8.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아람의 계책을 알려 줌.

13. 엘리사를 잡기 위하여 도단으로 보내진 군대가 눈이 멀게 됨.

19. 그 군대를 사마리아로 인도한 후에 편안히 가도록 놓아줌.

24. 사마리아의 기근으로 여인들이 자신들의 아들들을 삶아 먹음.

30. 왕이 엘리사를 죽이기 위하여 사람을 보냄.


<열왕기하 6장 개역한글>

1. 선지자의 생도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당신과 함께 거한 곳이 우리에게는 좁으니      

2. 우리가 요단으로 가서 거기서 각각 한 재목을 취하여 그곳에 우리의 거할 처소를 세우사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가라

3. 그 하나가 가로되 청컨대 당신도 종들과 함께하소서 엘리사가 가로되 내가 가리라 하고      

4. 드디어 저희와 함께 가니라 무리가 요단에 이르러 나무를 베더니      

5. 한 사람이 나무를 벨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물에 떨어진지라 이에 외쳐 가로되 아아, 내 주여 이는 빌어온 것이니이다      

6. 하나님의 사람이 가로되 어디 빠졌느냐 하매 그곳을 보이는지라 엘리사가 나무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서 도끼로 떠오르게 하고      

7. 가로되 너는 취하라 그 사람이 손을 내밀어 취하니라      

8. 때에 아람 왕이 이스라엘로 더불어 싸우며 그 신복들과 의논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아무데 아무데 진을 치리라 하였더니      

9.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왕은 삼가 아무 곳으로 지나가지 마소서 아람 사람이 그곳으로 나오나이다      

10.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자기에게 고하여 경계한 곳으로 사람을 보내어 방비하기가 한 두번이 아닌지라 

11. 이러므로 아람 왕의 마음이 번뇌하여 그 신복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이스라엘 왕의 내응이 된 것을 내게 고하지 아니하느냐      

12. 그 신복 중에 하나가 가로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이라도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나이다      

13. 왕이 가로되 너희는 가서 엘리사가 어디 있나 보라 내가 보내어 잡으리라 혹이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엘리사가 도단에 있나이다      

14.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저희가 밤에 가서 그 성을 에워쌌더라      

15.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드는 자가 일찌기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16.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17.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18. 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내려오매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원컨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사의 말대로 그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      

19. 엘리사가 저희에게 이르되 이는 그 길이 아니요 이는 그 성도 아니니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의 찾는 사람에게로 나아가리라 하고 저희를 인도하여 사마리아에 이르니라      

20. 사마리아에 들어갈 때에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여 이 무리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저희의 눈을 여시매 저희가 보니 자기가 사마리아 가운데 있더라      

21. 이스라엘 왕이 저희를 보고 엘리사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가 치리이까 내가 치리이까      

22. 대답하되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 주인에게로 돌려 보내소서      

23. 왕이 위하여 식물을 많이 베풀고 저희가 먹고 마시매 놓아보내니 저희가 그 주인에게로 돌아가니라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      

24. 이 후에 아람 왕 벤하닷이 그 온 군대를 모아 올라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니      

25. 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합분태 사분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      

26. 이스라엘 왕이 성 위로 통과할 때에 한 여인이 외쳐 가로되 나의 주 왕이여 도우소서      

27. 왕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우랴 타작마당으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포도주 틀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28. 또 가로되 무슨 일이냐 여인이 대답하되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오늘날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      

29. 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이르되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저가 그 아들을 숨겼나이다      

30. 왕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자기 옷을 찢으니라 저가 성 위로 지나갈 때에 백성이 본즉 그 속살에 굵은 베를 입었더라

31. 왕이 가로되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날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찌로다 하니라      

32. 그 때에 엘리사가 그 집에 앉았고 장로들이 저와 함께 앉았는데 왕이 자기 처소에서 사람을 보내었더니 그 사자가 이르기 전에 엘리사가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이 살인한 자의 자식이 내 머리를 취하려고 사람을 보내는 것을 보느냐 너희는 보다가 사자가 오거든 문을 닫고 문 안에 들이지 말라 그 주인의 발소리가 그 뒤에서 나지 아니하느냐 하고      

33. 무리와 말씀할 때에 그 사자가 이르니라 왕이 가로되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


<열왕기하 6장 성경주석>

6:1 선지자의 생도.

 재목을 얻으러 요단으로 갔던 점으로 보아(2절), 이들은 선지자 학교들 중 하나인 여리고에 있던 학교의 학생이었을 것이다.

6:1 우리가…거한 곳.

 문자적으로 “우리가 당신 앞에 앉아 있는 곳.” 그들이 선지자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그의 지도 아래 모였던 장소일 것이다. 엘리사는 이 학교에 자신의 가정을 두어 상주하지 않고, 다만 여러 학교를 순회하는 동안 때때로 그곳을 방문했다. 여기에 언급된 곳이, 학생들이 교사의 발치에 앉아 모였던 공동 집회장이었던 것 같다.

6:1 좁으니.

 이 학교에 출석하는 학생들이 너무 많아져 사용 중인 거처로는 그들을 더 이상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엘리야와 엘리사가 육성한 올바른 교육에 대한 관심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나타낸다.

6:2 우리가…가서.

 이것은 엘리사가 아니라 학생들에게서 나온 제안이다. 이 젊은이들은 일을 꺼려하지 않았다. 선지자 학교의 목표 가운데 하나가 학생들에게 삶을 위한 실제적인 훈련을 시키는 것이었다. 젊은이들은 그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처럼 일하도록 훈련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섬길 책임이 있는 사람에게서 자신들을 격리시켜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손을 훈련시키는 것은 정신과 마음을 훈련시키는 것과 완전히 조화되었다.

6:2 가라.

 엘리사에게 허락을 구했다는 점과 그 계획을 진행하도록 지시를 내린 사람도 그였다는 사실은, 선지자가 그의 책임 하에 여러 학교에 대한 감독권을 지닌 권위 있는 사람이었음을 보여 준다.

6:3 청컨대.

 (「제임스왕역」에는 “be content”[만족하신다면]라는 구절이 들어 있음-역자 주). 즉 우리와 함께 가는 것이 “좋으시면” 혹은 그것에 “기꺼이 동의한다면.” 먼저 그들은 가서 그 일을 그들 스스로 하게 해 달라는 허락을 구했고, 이제는 엘리사에게 그들과 함께 가자고 초청했다.

6:3 내가 가리라.

 엘리사도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왕이나 장군들뿐 아니라 매일 수고하는 노동자들과도 한결같이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결코 엘리사는 자신을 홀로 두지 않았으며, 봉사할 기회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자신을 환영하는 곳이면 어디든 함께 있기를 원하였다. 지도자가 위대하면 위대할수록 기꺼이 봉사하려는 마음도 크다.

6:5 도끼.

 유대인들은 매우 초기부터 쇠를 도끼 날로 사용하였다. 그 당시의 도끼 날은 오늘날의 도끼처럼 안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이 어떤 사람이 벌목하는 중에 도끼 날이 자루에서 빠진 경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신 19:5).

6:5 이는 빌려온 것이니이다.

 나무를 베고 있던 젊은이에게 터져 나온 무의식적인 외침이다. 선지자에게 도끼를 되찾는 데 하나님의 도움을 호소하려는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이 외침은 빌려온 것을 잃어버린 불운에 처해 있는 양심적인 젊은이, 십중팔구 너무 가난하여 잃어버린 것을 보상할 수 없는 젊은이에게 나온 것이다.

6:6 어디 빠졌느냐.

 엘리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은 자를 일으켰으며, 다른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선지자였다. 그러나 도끼가 물에 빠졌을 때 어디에 빠졌는지 알지 못했다. 하나님의 기별이 주어지지 않으면, 선지자들도 그들의 동료와 마찬가지로 지식을 구한다. 하나님은 필요한 일을 만들 뿐 아니라 그것을 밝혀줄 수 있는 적절한 상황도 만들어 준다. 하나님은 도끼가 빠진 사실이나 어디에 빠졌는지 엘리사에게 알리기 위해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 그것은 기적이 필요하지 않은 일이었으며, 따라서 이런 문제를 위해서는 기적을 행하지 않는다.

6:6 나뭇가지.

 절차의 중요성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나님이 어떤 일들을 왜 혹은 어떻게 행하는지 항상 말씀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여호와의 방법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6:6 떠오르게 하고.

 도끼는 선지자의 생도의 손이 미치지 않는 맨 밑바닥에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개입으로, 그것이 수면으로 떠올라 머물렀다.

  이와 같은 기적에는 하찮은 것이 있으며, 따라서 그것을 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좁은 시각에 갇혀 있는 사람은 단지 큰 일에서만 신적인 개입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슬픔이나 아픔이 없다 할지라도 곤궁에 처해 있는 자에게는 아버지 하나님의 크신 동정심이 동한다. 하나님의 마음은 여전히 인간 자녀들의 필요에 반응하신다. 그리고 하늘은 여전히 그들을 위해 활동한다. 여호와는 자신을 찾는 사람들의 관심에 개입하여 그들의 필요를 채우지 않고 지나가는 날은 하루도 없다. 기적의 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엘리사와 같은 사람이 존재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믿는 자녀들을 위하여 당신 자신의 방법으로 일하신다.

6:7 너는 취하라.

 만약 젊은이가 도끼를 되찾기 원한다면, 그는 또한 한 역할을 담당해야 했다. 하나님은 도끼가 떠오르도록 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자루를 원래 위치로 돌아오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여호와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위해서는 기적을 행하지 않는다. 젊은이는 충분히 물로 손을 뻗을 수 있었으며, 떠오른 도끼를 취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도록 지시를 받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취하도록 요구하실 때, 우리가 받기 위해 손을 뻗는다면, 그의 선물은 우리 것이 될 것이다. 불순종과 불신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축복들 중에 많은 것을 받지 못하게 한다.

6:8 아람 왕이…싸우며.

 이스라엘과 아람은 이때 거의 끊임없는 전쟁 상태에 있었다. 만약 공개적인 전쟁이 아니었다면, 국경 분쟁이었을 것이다. 아합이 죽음을 맞이한 때에, 이스라엘 군대는 요단 저편 길르앗 라못을 탈환하기 위해 아람에 대항하였다(왕상 22:3, 4). 아합의 죽음 후에 이스라엘에 우세를 보인 것은 아람이었다. 그리고 그 군대가 다시 한 번 이스라엘 땅에 있었다. 벤하닷 Ⅱ세가 여전히 아람의 왕이었다(6:24).

6:8 아무데.

 특정한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 한때는 그것이 어떤 장소에 있었고, 그 다음에는 다시 다른 장소에 있었을 것이다.

6:8 진을 치리라.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공개된 상설 진영 이상이다. 왜냐하면 곧 전 지역이 위치한 장소를 알 것이었으며, 선지자 없이도 왕에게 그것이 알려질 수 있을 것이었다. 아마도 이 모호한 히브리어 단어가 가리킬 수 있는 것은 다른 곳에서 증명되지는 않았지만 급습을 위한 매복지 곧 몰래 기습할 수 있는 요소가 숨겨진 곳을 말할 것이다.

6:9 하나님의 사람이…기별하여.

 아람 왕이 은밀하게 자신의 신복들과 나눴던 주의 깊은 의논이 엘리사에게 알려졌고, 다음에는 그가 이스라엘 왕에게 그 정보를 가지고 갔다.

6:9 나오나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오는 중입니다” 혹은 “나오려고 합니다.” 엘리사가 알려 준 것은 아람이 의도하고 있었던 계획에 대한 정보였다. 미리 그러한 전술적인 계획을 알게 됨으로, 이스라엘 왕은 아람인들에 대항하기 위해 연루된 장소들에 그들의 도착 시간에 맞추어 충분한 군대를 보낼 수 있었다.

6:10 방비하기가.

 그것은 자신과 나라를 위해 사태에 대비한 것이다. 적의 계획을 알게 됨으로, 그는 적의 함정에 빠지는 것에 대비하였다.

6:11 번뇌하여.

 어떤 계획이 극비로 보관될 때마다 적이 그 세부 사항을 알곤 하였다. 만약 이러한 일이 한두 번 발생했다면 그것은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규적인 것이 되었을 때, 아람 왕은 번민하였고 원인을 알고자 결심하였다.

6:11 우리 중에 누가.

 벤하닷에게는 오직 한 가지 원인 곧 진영 안의 반역자로 생각되었다. 그는 아람보다는 이스라엘에 더 호의적인 어떤 사람이나 혹은 자신의 조국보다는 적을 위해 일하도록 매수당한 자를 통하여 정보가 새나간다고 확신하였다. 그들 중에 어떤 자가 반역자로 드러나지 않겠는가?

6:12 침실에서.

 동방의 궁전에서 가장 경호가 잘되어 있고 가장 접근하기 힘든 장소. 거기에서 나누는 말들은 참으로 비밀이 되었으며, 왕의 가장 절친한 친구들조차도 들을 수가 없었다.

6:13 도단.

 길르앗과 애굽 사이에 있는 정기 대상로(隊商路) 상의 성읍으로, 이스르엘 평원 가까이 있으며 사마리아 고원 지대로 이어지는 통로. 세겜 북동쪽 약 23킬로미터, 사마리아 북동쪽 16킬로미터 지점이었다. 길르앗에서 애굽까지 이르는 도중에 이스마엘 사람들이 요셉을 산 곳이 바로 여기였다(창 37:17~28). 이 위치는 오늘날 텔 도타(Tell Do tha-)로 알려진다.

6:14 왕이…말과…보내매.

 도단이 정기 대상로 상에 있음으로, 말과 병거로 무장된 큰 군대가 실제로 접근할 수 있었다.

6:15 수종드는 자.

 히브리어 므샤레트(mes∨aret). 참조 4:43 주석. 이 수종드는 자는 게하시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죄로 인하여 무서운 저주 아래 있었다(5:27). 아마도 도단으로 갈 때 엘리사 선지자와 동행했던 제자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렇게 선지자와 연합하여 일함으로, 이 젊은이들은 귀중한 경험을 얻었을 것이다.

6:15 아아, 내 주여.

 젊은이들은 주인에 대한 믿음도, 경험의 결과로 오는 힘과 용기도 없었다.

6:16 두려워하지 말라.

 얼마나 자주 여호와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이렇게 마음 든든한 말씀을 하시는가!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주 그들을 불확실성과 두려움에 처하도록 하는 상황에 처한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시며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말씀을 하신다(참조 창 15:1; 46:3; 출 14:13; 민 14:9; 신 1:21; 사 43:1; 눅 12:32). 이 땅에 있는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은 문제에 봉착할 것이고 위험에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단은 의인들이 의심과 두려움에 굴복하도록 전력을 다할 것이다. 그러나 불확실성과 의심의 안개를 뚫고 여호와의 음성은 여전히 우리에게 분명하고 확신있게 울려 퍼진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6:16 보다 많으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적들에게 포위될 때, 그는 항상 그와 함께하는 세력이 적의 세력보다 무한히 더 많다는 보증을 받는다. 산헤립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항복을 요구했을 때, 히스기야는 백성들에게 이와 유사하게 용기를 주는 기별을 전했다(대하 32:7, 8). 이 땅에서 홀로 버려진 듯이 보이는 하나님의 가장 연약한 자녀라도 적들이 자신을 대적하여 보내는 어떤 세력도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의 편에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그는 가장 강력한 악의 무리들보다 더 우세하다.

6:17 저의 눈을 열어서.

 가장 위대한 실재들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은 여호와의 도움이 없다면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다. 육안으로는 단지 물리적인 사물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영적인 사물들은 영적으로 식별된다. 눈이 열려 하나님과 그분의 왕국의 지극히 중요한 사물들을 볼 수 있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필요이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열지 않는다면, 우리는 눈먼 자로 인생을 보내게 될 것이며 여호와의 사물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의의 지극히 중요한 것을 볼 수 없을 것이며 거룩함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의 눈이 열려, 이 땅에서 가장 소중한 사물들의 중요성을 보기 시작한다.

6:17 산에 가득하여.

 하나님의 천사들은 의인들의 영원한 동료이다. 하늘에서 온 수호 사자(使者)들이 의인을 둘러 진치는데, 만약 성도들이 하늘의 보호를 거절하기로 선택하지만 않는다면 악의 천사들이 그들의 대열을 뚫고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호와의 도움이 함께하는 한 사람이 이 땅의 가장 강력한 힘도 능가한다(참조 시 3:6; 27:1, 3; 34:7). 엘리사를 둘러선 말과 병거는 당신의 종을 지키도록 하나님이 보낸 무수히 많은 강력한 천사들이었다.

6:18 눈을 어둡게.

 히브리어 산웨림(san-werim). 이 단어는 여기(두 번)와 창 19:11에 언급된다. 이 단어의 어원은 불확실하다. 어떤 이들은 이 말이 완전히 육체적으로 눈먼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사물을 실제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는 환각 상태라고 생각했다(참조 창 19:11 주석). 두 가지 문제가 대두된다. (1) 만약 그 무리들이 완전히 눈이 멀었다면 어떻게 엘리사가 일단의 사람들을 약 18킬로미터나 되는 산악 지역을 넘어 사마리아까지 인도할 수 있었을까? (2) 시력이 없이는 이러한 시도가 허사로 돌아갈 것을 알면서도 왜 사람들이 엘리사를 체포하려는 그들의 목적을 고집했을까? 만약 눈이 완전히 멀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 사람들이 “이중으로 눈멀게” 되었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다(참조 부조와 선지자, 159,). 하나님의 치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영적으로 눈멀어 자신들의 악의 행로를 고집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 기적은 육체적 눈멂의 고통을 넘어, 엘리사가 자신을 억류하려는 그들의 목적을 유지시키는 것뿐 아니라 이들을 사마리아로 이끌 수 있도록 한 데까지 확대되었다.

6:19 이는 그 길이 아니요.

 여호와의 적들로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하여 그들을 패하게 한 유사한 경우는, 예컨대 (1) 기드온이 자신의 용사 300명을 미디안 사람들에게 압도하는 병력으로 보이게 한 것(삿 7:19~21), (2) 모압 사람과의 싸움에서 물을 피로 보이게 한 것(왕하 3:22, 23), (3) 아람 군대가 헷과 애굽 군대가 몰려오는 것으로 여기도록 한 소리(왕하 7:6) 등이다. 참조 수 8:15.

6:21 엘리사에게.

 지시를 받기 위해 선지자가 왕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왕이 선지자를 바라보았다. 왕은 보위에 있었으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했다. 요람은 이스라엘의 군대를 지휘했지만, 천사의 무리는 엘리사의 지휘 아래 놓여 있었다.

6:21 내 아버지여.

 이 구절을 사용한 것은 부자 관계가 아니라, 엘리사를 향한 왕의 존경심을 나타낸다.

6:21 내가 치리이까.

 이 구절을 반복한 것은, 선지자가 힘이 미칠 수 있는 데까지 끌고 온 아람 사람들을 죽이려는 요람의 열망을 나타낸다.

6:22 치지 마소서.

 요람에게 포로를 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기적의 목적은 아람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들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대항하는 어떤 시도도 완전히 헛된 일임을 보게 하는 것이었다. 나아만에게 수종들던 포로로 잡혀온 히브리 소녀를 통하여, 아람 사람들은 여호와의 자비와 권능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과 저항할 수 없는 능력에 대하여 그들에게 더 많은 교훈을 주기 원하셨다. 만약 사로잡힌 아람 사람들이 고국으로 돌아가서 있었던 일을 동포들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이 기적을 통해 여호와의 목적이 실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6:22 어찌 치리이까.

 이스라엘 왕이 싸움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냉혹하게 살해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였을 것이다. 엘리사는 요람에게, 이 사람들은 전쟁 포로이며 그렇게 대우 받아야 할 권리가 있음을 분명히 한다. 일상적인 상황 아래서조차도 왕이 자신의 손에 들어온 죄수를 죽이는 것은 범죄였을 것이다. 현재의 상황에서 그 범죄는 더욱더 비난받을 만하며, 아람 백성들에게 이스라엘과 하나님에 대한 전혀 잘못된 이해를 주었을 것이다.

6:22 떡과 물을…두어.

 즉 그들을 포로가 아니라 손님으로 대우하여. 사람들을 자비롭고 친절하게 대함으로, 아람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종교의 힘에 대한 실물 교훈을 주어야 했다(참조 잠 25:21, 22; 마 5:44).

6:23 식물.

 히브리어 케라(kerah), “잔치” 혹은 “향연.” 아람 사람들에게 준 것은 평범한 음식이 아니라, 특별한 경우를 위하여 준비된 음식이다. 사막지역의 불문율에 의하면, 장막에서 음식을 대접받은 사람은 친구가 되며 보호받아야 한다.

6:23 저희가 그 주인에게로 돌아가니라.

 아람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갔을 때, 이스라엘을 침입했을 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무리들이 되었다. 그들은 적에서 친구로 바뀌었다. 그들이 먹은 음식은 그들의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 살찌웠다. 그들은 쉽게 잊을 수 없는 한 교훈을 배웠다.

6:23 들어오지 못하니라.

 이것은 요람이 포로들에게 베푼 정중한 대우에서 나온 당연한 결과였다. 당분간 아람이 이스라엘을 침입하지 않았다. 요람은 무력으로 이룰 수 없었던 것을 잔치를 통하여 이루었다. 친절이 검보다 더 강력한 무기임이 입증되었다. 적에게 선을 베푸는 것은 곧 자신에게 선을 베푸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인뿐 아니라 악인에게도 친절하시다.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신다(마 5:45). 그러므로 사람은 원수를 사랑하며 자신을 해하는 자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오직 이러한 정신을 통해서만 사람들 사이에 있는 시련과 투쟁을 몰아낼 수 있다.

6:24 이 후에.

 요담이 이스라엘을 침략한 아람 군대를 위해 잔치를 베푼 때부터 벤하닷이 사마리아를 포위한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두 나라 사이에 옛날의 적개심이 되살아난 점으로 보아 여러 해가 지났을 것이다. 어떤 이유로 이스라엘과 아람 사이에 새로운 싸움이 있게 되었는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6:24 벤하닷.

 벤하닷 II세를 말한다. 벤하닷 I세는 아사와 동시대에 속했다(왕상 15:18~20). 벤하닷 II세는 아합이 두 번이나 물리친 바로 그 왕으로, 아합이 그에게 적절하지 않은 아량을 베풀어 예언자의 질책을 받았다(왕상 20:1~42). 아합이 목숨을 잃은 것은 바로 3년 후에 같은 왕과의 싸움에서였다(왕상 22:1~37). 벤하닷은 앗수르의 살만에셀 III세의 기록에 여러 번 언급되는데, 설형문자 문서에서 앗두-이드리(Addu-’idri) 혹은 비르-이드리(Bir-’idri)로 읽을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난다. 앗수르학 연구자들은 후자를 더 선호한다. 하맛에서 나온 아람어 명각에서, 그는 바르-하다드(Bar-hadad)로 불린다. 앗수르 사람들은 바르(Bar)가 바벨론의 신 비르(Bir)를 나타낸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또한 아람어 문자에서 ㄷ(d)와 ㄹ(r)이 쉽게 혼동될 수 있기 때문에 하다드(Hadad)를 하다르(Hadar)로 잘못 읽었다. 두 이름 사이에 생긴 차이점의 기원에 대한 올바른 설명이 무엇이든, 성경의 벤-하닷과 아람어 명각의 바르-하다드(Bar-hadad) 그리고 앗수르 문서의 비르-이드리(Bir-’idri)는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데 의심할 여지가 없다. 히브리어 벤-하다드(Ben-hadad)는 “하닷의 아들”을 의미한다. 하닷은 서부 셈족의 폭풍 신으로 잘 알려진 이름이다. 비르-이드리(Bir-’idri)는 앗수르어 명각에서 살만에셀 재위 14년에 아람 왕으로 나타나는데, 그때 앗수르 왕은 그 아람 왕과 그의 동맹국에 큰 승리를 얻었다고 주장한다.

6:24 사마리아를 에워싸니.

 이것은 소규모의 국경 침입이 아니라 심각한 격전(激戰)이었다. 벤하닷은 살만에셀이 진행 중인 지중해 지역 정벌에 참여하지 않은 때를 틈탔을 것이다.

6:25 크게 주려서.

 이스라엘에서 기근은 보기 드문 일은 아니었다. 엘리야 시대에 3년 반 동안 지속된 가뭄(왕상 17:1~18:1; 눅 4:25; 약 5:17)이 있었다. 그리고 엘리사 시대에도 7년 동안 기근이 있었다(왕하 8:1). 그렇지만 지금은 포위 때문에 생긴 기근이었다.

6:25 은 팔십 세겔.

 나귀 머리 하나에 은 80세겔(912그램, 트로이형[衡]으로 약 2.5파운드)이다. 히브리인들에게 나귀는 부정한 것이어서 최후의 수단이 아니면 먹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귀 머리는 질이 가장 나쁘고 값이 가장 싼 부분이었다. 플루타르코스는, 보통 때는 나귀 전체를 30드라크마에 살 수 있었지만 아닥사스다 므네몬 치세의 기근의 때에는 나귀 머리가 60드라크마에 팔렸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플리니우스는 카살리눔의 포위 기간에 쥐 한 마리가 200데나리온에 팔렸다고 언급한다.

6:25 사분 일 갑.

 한 갑은 건량으로 약 1.2리터에 해당했다. 은 다섯 개는 은 다섯 세겔(57그램, 트로이형으로 1.8온스)을 말한다. 사람이 이렇게 먹지 못할 음식을 먹을 만큼 고통스러운 궁지에 내몰릴 수 있었다는 것을 믿기 어렵지만, 요세푸스는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포위한 기간에 “어떤 사람들은 공동 하수도나 가축들의 오래된 똥더미를 찾아 헤매고 거기서 얻은 똥을 먹을 만큼 지독한 고통으로 내몰렸다”(War v. 13. 7)고 언급한다. 근래의 해석자들은, “합분태”라는 표현에서 매우 값싸고 바람직하지 못한 형태의 채소 곧 음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천한 채소를 가리키는 의미를 찾고자 한다. 이렇게 보는 것은 입증될 수 없다.

6:26 성 위로.

 요새화된 고대 도성들의 성벽에는 꼭대기의 바깥 가장자리가 성가퀴로 둘러쳐진 넓은 공간이 있어서, 거기에 주요 방어군이 주둔하여 적에게 돌을 던지거나 화살을 쏘았다. 왕은 그의 군대에 용기를 주고 친히 포위의 진행 상황을 알기 위해 이 방어물을 순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 거리에서 혹은 성벽 가까이 있는 지붕에서 한 여인이 왕을 보고 도움을 호소했을 것이다.

6:27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우랴.

 왕이 도울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요람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그 여인의 고통을 덜어줄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기꺼이 인정했다. 만약 여호와께서 그녀를 돕지 않았다면, 이 처절한 궁지에서 왕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6:27 타작마당으로 말미암아.

 절망의 반어법을 통해, 요람은 그녀가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한 사실 곧 모든 식량이 종자까지 바닥난 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6:28 무슨 일이냐.

 왕은 처음에 그 여인이 그에게 식량을 호소하는 것으로 추측하였다. 이제 그는 그것이 아니라 그녀가 다른 요구를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마도 그는 많은 주민과 도성 방어군들을 의식한 나머지 그녀에게 너무나 거칠게 대답했다고 느꼈던 것 같다. 어쨌든 그는 여전히 왕이었고 어떤 시민이든 최종적인 호소를 위해 그에게 올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그는 그녀의 탄원에 귀를 기울이기로 하였다.

6:29 우리가…내 아들을 삶아.

 이스라엘은 모세를 통하여, 만약 그들이 하나님을 떠난다면 바로 이러한 곤경에 빠지게 될 것이고 부모가 자기 자녀의 고기를 먹을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레 26:29; 신 28:53). 이 예언은 이제 그 두려운 성취에 직면하였다. 하나님은 마침내 있게 될 범죄의 두려운 결과를 정확히 예견하였다. 그리고 그는 신적인 사랑과 인내로 이 같은 상태로 다가올 사태를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했다. 모세의 예언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애 4:10) 그리고 티투스가 마지막으로 성을 포위했을 때(Jose- phus War vi. 3. 4) 또 다른 성취를 보았다.

6:29 그 아들을 숨겼나이다.

 이보다 애처롭고도 소름끼치는 불평을 상상하기는 힘들 것이다. 극심한 곤경 중에, 두 어머니는 충격적인 계약을 맺었다. 한 아들은 이미 먹혔고, 두 번째 어머니는 거래에서 자신의 몫을 이행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숨겼고, 이제 첫 번째 여자는 왕에게 호소하여 그 아이를 강제로 내놓게 하려 했다. 왕이 이 같은 경우에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6:30 자기 옷을 찢으니라.

 이런 상황 아래서 왕이 보일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 여인에게 아들을 내놓아 먹을 수 있도록 하라고 명할 수도 없었고, 이 지독한 고통을 끝낼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슬픔과 회개(왕상 21:27) 때문이 아니라 공포와 놀람으로 옷을 찢은 것이다.

6:30 그 속살에 굵은 베.

 요람은 겉에 굵은 베를 입지 않고, 겉옷 속에 이 애통의 옷을 입어 완전히 드러나지는 않았다. 이러한 방책을 통해 그는 여호와의 진노를 달래고자 했을 것이다. 백성들은 굵은 베에서 고통 중에 있는 자신들을 향한 왕의 동정의 표현을 보았다.

6:31 엘리사의 머리.

 엘리사는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호소하였으며, 만약 그들이 자신들의 죄를 버리고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지 않으면 고통과 시련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혔다. 왕은 선지자를 신랄하게 비판했고, 이제 계속되는 포위와 기근에 대한 책임까지 그에게 씌우려고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자기 형제 아하시야와 아버지 아합이 했던 것과 같은 과정을 따랐다(참조 1:10 주석). 진심으로 통회한 사람이었다면 굵은 베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어 입었을 것이고, 하나님의 선지자를 적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참수(斬首)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일반적 형태의 형벌이 아니었으나, 앗수르와 다른 이웃 나라들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괴로움과 분노로 가득하여, 요람은 이제 이 소름끼치는 형태의 극형으로 엘리사를 위협했다.

6:32 장로들이…앉았는데.

 아마도 여기에는 도성의 지도자들뿐 아니라 나라 전체의 귀족과 족장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그들은 나라에서 가장 존경받고 영향력 있는 시민이었다. 이 위기의 때에 그들은 분명 조언과 원조를 얻기 위해 엘리사의 집으로 갔다. 임박한 위험 때문에 그들은 여호와의 권능을 인정하고, 그의 선지자에게 도움을 구하게 되었다. 후에 예루살렘 거민들이 유사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예레미야에게 찾아가 여호와의 뜻에 관한 교훈과 지도를 구하였다(렘 21:1, 2; 38:14).

6:32 그 사자가 이르기 전에.

 요람은 엘리사의 목숨을 취하기 위해, 선지자의 목을 베라는 명령을 주어 한 사람을 보냈다. 그러나 그가 도착하기 전에 여호와가 엘리사에게 왕의 의도를 미리 알려 주어, 그 문제가 나라의 지도자들 앞에 분명하게 제시되었다.

6:32 이 살인한 자의 자식.

 요람의 아버지 아합은 나봇의 피에 대한 죄뿐 아니라 자신이 전적으로 동의하여 이세벨에게 죽임을 당한 선지자들에 대한 죄도 있었다. 그의 충성스런 종 오바댜조차도, 엘리야에 관한 소식을 가지고 그에게 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합에게 죽임을 당할까봐 두려워했다(왕상 18:9). 살인한 자의 자식 요람도 아버지와 같은 사악한 기질을 소유했다.

6:32 보내는 것을.

 살인을 집행하려는 자가 이미 오는 도중이었으나 엘리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여호와의 선지자였고 자신의 목숨이 사악한 자들에게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았다.

6:32 문 안에 들이지 말라.

 문자적으로 “문에서 그를 밀쳐내라.” 문을 잠그고 그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굳게 붙들라는 말이다. 선지자는 죽임을 당할 만한 어떤 일도 하지 않았으며 어떤 죄에 대해서도 유죄가 입증되지 않았다. 하늘의 사자로서 그는, 비록 왕의 명령에 반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행한 지시들을 명할 완전한 권리가 있었다. 청렴하고 법을 준수하는 시민을 박해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는 것이 통치자의 책임이다. 살인은 나라의 평범한 개인에게만큼이나 왕에게도 옳지 못한 일이다.

6:32 그 뒤에서.

 자신의 명령이 수행되었는지 보기 위해, 왕이 살인 집행자의 발뒤꿈치를 바싹 따라왔다.

6:33 왕이 가로되.

 (「제임스왕역」에는 단순히 “그가 가로되”로 되어 있음-역자 주). 이것이 사자(使者)의 말인지 왕의 말인지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이때에 왕이 도착했든 도착하지 않았든, 이 말은 왕에게 비롯되었음이 분명하다. 사자에게는 자신의 이름으로 이렇게 말할 권리가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이 말을 했다 해도, 왕의 이름으로 말하도록 파송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왕이 지금 막 도착하여, 친히 이 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성경의 기록은 여기서나 이어지는 성경절들에서 그가 실제로 도착했다고 언급하지 않지만, 엘리사가 왕이 사자의 뒤를 바싹 뒤쫓았다고 말한 점으로 보아 오래 지체되지 않아 왕이 도착했을 것이다. 이제 한 말들은 왕의 마음을 반영한다. 왕은 선지자와 그가 나타내는 하나님에게 분노한다. 그는 나라가 겪고 있는 이런 고통이 모두 하나님에게서 나왔으며, 따라서 그분이 책임져야만 한다고 선언한다. 요람은 하나님에게 분노를 터뜨릴 수 없어서, 지금 그분의 선지자에게 터뜨리려고 한다.

6:33 어찌…기다리리요.

 요람은 왜 자신이 하나님과 타협해야만 하는지를 묻는다. 그는 여호와가 이 재앙을 사마리아에 일으킨 것은 독단이며 따라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재난에 대한 책임이 그분에게 있다고 믿는다. 선지자를 향한 이 갑작스런 행동은 왕에게 호소했던 여인(참조 26절)에 대한 그의 응답이다. 병사들과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험을 받음으로, 진퇴양난에 처한 왕은 어떤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과 엘리사를 거역하는 결정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하나님이 이 포위를 불러왔으므로 그분은 그것을 끝내기 위해 어떤 것도 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스스로 확신하려 했던 것처럼 요람의 유일한 방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서서 손수 조치를 취하는 것이었다. 그는 엘리사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지금 이를 행하려는 참이었다.


참고자료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 제4권, 시조사.

- 「열린노트성경」, 아가페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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