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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STORY
열왕기하 9장 & 성경주석 본문
<열왕기하 9장 흐름정리>
예후가 북 왕국의 왕으로 등극하기까지의 일단의 과정이다. 엘리사가 선지 생도를 시켜 예후에게 기름 부은 것은 예언의 성취이다(왕상 19:16). 하나님은 이미 20여 년 전에 그를 오므리 왕조의 심판 도구로 선택하셨다. 예후는 아람과의 전쟁에서 상처를 입고 이스라엘 성에서 치료받고 있던 요람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요람과 병문안 왔던 유다 왕 아하시야, 아합의 아내인 이세벨을 차례로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였다. 이때 요람의 시체는 이전에 나봇의 포도원이었던 왕의 정원에 버려지고 이세벨의 시체는 개의 먹이가 됨으로써 엘리야의 저주가 성취되었다(왕상 21:19, 23).
<열왕기하 9장 줄거리>
1. 엘리사가 선지자의 생도 중 하나를 보내 길르앗 라못에서 예후에게 기름 붓도록 함.
4. 그 선지자가 기별대로 행한 후 도망함.
11. 병사들에 의해 왕이 된 예후가 나봇의 밭에서 요람을 죽임.
27. 아하시야가 구르에서 죽임을 당하여 예루살렘에서 장사됨.
30. 거만한 이세벨을 창문 밖으로 던지니, 개들이 먹음.
<열왕기하 9장 개역한글>
1. 선지자 엘리사가 선지자의 생도 중 하나를 불러 이르되 너는 허리를 동이고 이 기름병을 손에 가지고 길르앗 라못으로 가라
2. 거기 이르거든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를 찾아 들어가서 그 형제 중에서 일어나게 하고 데리고 골방으로 들어가서
3. 기름병을 가지고 그 머리에 부으며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노라 하셨느니라 하고 곧 문을 열고 도망하되 지체치 말찌니라
4. 그 소년 곧 소년 선지자가 드디어 길르앗 라못으로 가니라
5. 저가 이르러 보니 군대 장관들이 앉았는지라 소년이 가로되 장관이여 내가 당신에게 할 말씀이 있나이다 예후가 가로되 우리 모든 사람 중에 뉘게 하려느냐 가로되 장관이여 당신에게니이다
6. 예후가 일어나 집으로 들어가니 소년이 그 머리에 기름을 부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여호와의 백성 곧 이스라엘의 왕을 삼노니
7. 너는 네 주 아합의 집을 치라 내가 나의 종 곧 선지자들의 피와 여호와의 종들의 피를 이세벨에게 갚아주리라
8. 아합의 온 집이 멸망하리니 이스라엘 중에 매인 자나 놓인 자나 아합에게 속한 모든 남자는 내가 다 멸절하되
9. 아합의 집을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과 같게 하며 또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과 같게 할찌라
10. 이스르엘 지방에서 개들이 이세벨을 먹으리니 저를 장사할 사람이 없으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곧 문을 열고 도망하니라
11. 예후가 나와서 그 주의 신복들에게 이르니 한 사람이 묻되 평안이뇨 그 미친 자가 무슨 까닭으로 그대에게 왔더뇨 대답하되 그대들이 그 사람과 그 말한 것을 알리라
12. 무리가 가로되 당치 않은 말이라 그대는 우리에게 이르라 대답하되 저가 이리 이리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는다 하셨다 하더라
13.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취하여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가로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14. 이에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가 요람을 배반하였으니 곧 요람이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아람 왕 하사엘을 인하여 길르앗 라못을 지키다가
15. 아람 왕 하사엘로 더불어 싸울 때에 아람 사람에게 상한 것을 치료하려 하여 이스르엘로 돌아왔던 때라 예후가 이르되 너희 뜻에 합당하거든 한 사람이라도 이 성에서 도망하여 이스르엘에 전하러 가지 못하게 하라 하니라
16. 예후가 병거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요람이 거기 누웠음이라 유다 왕 아하시야는 요람을 보러 내려왔더라
17. 이스르엘 망대에 파숫군 하나가 섰더니 예후의 무리의 오는 것을 보고 가로되 내가 한 무리를 보나이다 요람이 가로되 한 사람을 말을 태워 보내어 맞아 평안이냐 묻게 하라
18. 한 사람이 말을 타고 가서 만나 가로되 왕의 말씀이 평안이냐 하시더이다 하매 예후가 가로되 평안이 네게 상관이 있느냐 내 뒤로 돌이키라 하니라 파숫군이 고하여 가로되 사자가 저희에게 갔으나 돌아오지 아니하나이다 하는지라
19. 다시 한 사람을 말을 태워 보내었더니 저희에게 가서 가로되 왕의 말씀이 평안이냐 하시더이다 하매 예후가 가로되 평안이 네게 상관이 있느냐 내 뒤로 돌이키라 하니라
20. 파숫군이 또 고하여 가로되 저도 저희에게까지 갔으나 돌아오지 아니하고 그 병거 모는 것이 님시의 손자 예후의 모는 것 같이 미치게 모나이다
21. 요람이 가로되 메우라 하매 그 병거를 메운지라 이스라엘 왕 요람과 유다 왕 아하시야가 각각 그 병거를 타고 가서 예후를 맞을쌔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토지에서 만나매
22. 요람이 예후를 보고 가로되 예후야 평안이냐 대답하되 네 어미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
23. 요람이 곧 손을 돌이켜 도망하며 아하시야에게 이르되 아하시야여 반역이로다
24. 예후가 힘을 다하여 활을 당기어 요람의 두 팔 사이를 쏘니 살이 그 염통을 꿰뚫고 나오매 저가 병거 가운데 엎드러진지라
25. 예후가 그 장관 빗갈에게 이르되 그 시체를 취하여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밭에 던지라 네가 기억하려니와 이전에 너와 내가 함께 타고 그 아비 아합을 좇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이 아래 같이 저의 일을 예언하셨느니라
26.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젯날에 나봇의 피와 그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았노라 또 말씀하시기를 이 토지에서 네게 갚으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 시체를 취하여 이 밭에 던질찌니라
27. 유다 왕 아하시야가 이를 보고 동산 정자 길로 도망하니 예후가 쫓아가며 이르되 저도 병거 가운데서 죽이라 하매 이블르암 가까운 구르 비탈에서 치니 저가 므깃도까지 도망하여 거기서 죽은지라
28. 그 신복들이 저를 병거에 싣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다윗성에서 그 열조와 함께 그 묘실에 장사하니라
29. 아합의 아들 요람의 십 일년에 아하시야가 유다 왕이 되었었더라
30. 예후가 이스르엘에 이르니 이세벨이 듣고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창에서 바라보다가
31. 예후가 문에 들어오매 가로되 주인을 죽인 너 시므리여 평안하냐
32. 예후가 얼굴을 들어 창을 향하고 가로되 내 편이 될 자가 누구냐 누구냐 하니 두어 내시가 예후를 내다보는지라
33. 가로되 저를 내려던지라 하니 내려던지매 그 피가 담과 말에게 뛰더라 예후가 그 시체를 밟으니라
34. 예후가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가로되 가서 이 저주 받은 계집을 찾아 장사하라 저는 왕의 딸이니라 하매
35. 가서 장사하려 한즉 그 두골과 발과 손바닥 외에는 찾지 못한지라
36. 돌아와서 고한대 예후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그 종 디셉 사람 엘리야로 말씀하신바라 이르시기를 이스르엘 토지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고기를 먹을찌라
37. 그 시체가 이스르엘 토지에서 거름 같이 밭 면에 있으리니 이것이 이세벨이라고 가리켜 말하지 못하게 되리라 하셨느니라
<열왕기하 9장 성경주석>
9:1 선지자 엘리사.
엘리사 이야기는 8:16에서 여호람과 아들 아하시야의 유다 통치에 관한 기사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다가, 여기서 다시 돌아간다. “선지자의 사역에 관한 긴 기사가 있은 후에(2:12~8:15) 왜 이야기가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 계속되지 않았는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열왕기가 근본적으로 연대순으로 배열된 이스라엘과 유다 왕들의 기록이라는 것이 그 대답이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사건들이 중요하지만 왕들의 기록에 삽입된 것이다. 여기에 기록된 엘리사와 관련된 사건은 아하시야와 요람의 생애 말년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 왕들의 통치에 관한 기록 속에 함께 짜여 있다.
9:1 생도 중 하나.
이제 엘리사는 자신의 많은 책임을 수행하는 데 계속 조력해 왔던 다수의 선지자와 이 “생도 중 하나”를 결부시킨다. 이 사람의 신원은 알려져 있지 않다. 11세기의 유대인 학자 라쉬는, 그 생도가 여로보암 Ⅱ세의 통치 동안 예언적 직무를 수행한 사람으로 14:25에 언급된 요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왜냐하면 여로보암은 그 후 50년이 지나서야 통치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요나가 여기에 관련된 기별자였다는 랍비 라쉬의 가정은 근거가 없다.
9:1 기름병.
참조 삼상 10:1. 당시에 기름이나 향유는 흙이나 돌 혹은 유리로 만든 단지에 담아 가지고 다녔다. 이런 것들이 애굽과 메소보다미아에서 많이 발견된다.
9:1 길르앗 라못.
이스라엘 왕은 길르앗 라못을 포위했을 때 상처를 입어 이스르엘로 돌아왔다. 그 포위가 성공적이었는지는 더 이상 언급이 없지만 계속되는 이야기는 성공적이었음을 암시한다.
9:2 예후.
성경은 예후가 여호사밧의 손자라는 언급 외에는 그의 조상이나 출신 성읍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는다. 그는 앗수르 문헌들에 여러 번 등장한다. 살만에셀 III세는 재위 제18년(일반적으로 BC 841년으로 여김)의 연대기 단편-같은 연대 목록에서 하사엘을 멸망시킨 것을 말한다-에서 야와 마르 후므리(Iaua mar Humri) 곧 “오므리의 아들 예후”에게 공물을 받은 것을 언급한다. 카르카르 전투에서 아합을 대항해 싸웠던 때, 앗수르 왕 살만에셀 재위 제6년의 명각과 위의 명각을 종합하면, 아합 치세의 마지막 해뿐 아니라 이스라엘 왕 요람의 죽음과 예후의 계승 연도를 앗수르의 역사와 대조해서 볼 수 있다.
9:2 그 형제.
예후와 함께한 무리 곧 관리들을 나타낸다(참조 5절).
9:2 데리고.
문자적으로 “그를 들어가게 하다.” 그 기별자는 예후를 다른 방으로 안내하여, 거기서 그와 은밀하게 이야기를 나누어야만 했다.
9:2 골방.
문자적으로 “방안의 방”(참조 왕상 20:30; 22:25). 반드시 밀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기별자가 예후와만 개인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방을 말한다.
9:3 그 머리에 부으며.
예후를 왕으로 기름 붓는 임무는 본래 엘리야가 엘리사를 후계자로 기름 부으라는 사명을 받았던 때와 동시에 주어졌다(참조 왕상 19:16 주석).
9:3 도망하되.
모든 처리는 신속하고 은밀하게 수행해야만 했다.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 후 즉시 그 젊은 선지자는 출발해야만 했으며, 질문이나 있음직한 보상을 기대해서도 안 되었다.
9:4 그 소년.
「70인역」과 「수리아역」에는 이 표현이 한 번만 나온다.
9:5 앉았는지라.
다음절에 나온 대로 예후가 그 기별이 자신에게 해당된다는 것을 듣고 “집으로 들어간” 점으로 보아, 뜰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9:5 예후가 가로되.
분명히 예후는 이 모임을 관할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제 이스라엘 군대의 사령관이었다. 왕이 길르앗 라못을 떠났을 때, 싸움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도성이 아직 함락되지 않았을 것이다. 왕은 자신의 상처를 구실 삼아 군대에서 이탈해 위험천만하고 힘겨운 싸움을 피하려 했을 것이다. 예후는 포위를 계속 밀어붙여 마침내 도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이스라엘 전체에서 그는 국민적 영웅으로 여겨졌다.
9:6 이스라엘.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 민족을 자신의 소유로 인정했으며, 이제 이스라엘의 정당한 통치자인 그분은 나라의 새로운 왕을 선택했다.
9:6 네게 기름을 부어…왕을 삼노니.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명백한 임무였다. 오므리 왕조의 죄악을 끝낼 새로운 왕을 위한 때가 다가왔다. 그것은 이제 이스라엘에서 왕권을 차지할 자에게 책임의 시간일 뿐 아니라 기회의 시간이기도 했다.
9:7 아합의 집.
여호람을 계승하여 왕위에 올랐던 아하시야와 마찬가지로, 요람도 아합의 자손이었다. 아합의 집은 이제 죄악으로 파멸될 것이었다.
9:7 종들.
이 말은 하나님의 택하신 선지자들 외에 다른 이들도 아합의 집에 의해 참된 하나님의 경배자들에게 자행된 총체적인 박해에 연루되었음을 보여 준다.
9:7 피를…갚아주리라.
벌받지 않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여호와는 당신에게 속한 자들을 돌보시며, 따라서 최적의 시기라고 여기는 때에 당신의 방법으로 택한 자의 원수를 갚으실 것이다. 사람은 좁은 시야로 인하여 왜 보응이 지체되는지 항상 이해하지는 못한다. 이런 사람은 성급함으로 인해, 여호와가 잊어버려 행악자들에게 벌받지 않고도 악한 길을 계속 가도록 허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9:7 이세벨에게.
이세벨은 이스라엘에서 박해를 선동한 주모자였으나, 홀로 그 일을 수행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세벨이 하나님 앞에 죄가 있다면, 그녀와 함께했던 사람들 그리고 같은 정신으로 움직였던 자들 역시 죄가 있었다.
9:8 온 집.
아합의 온 집을 파멸로 몰아간 심판이, 단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루는 것과 관련된 어떤 사실들을 염두에 두지 않고 내린 것이라면 심히 가혹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나님이 시내(Sinai)에서 신정국가 이스라엘을 조직하였을 때, 그는 엄한 국가적 형벌을 제정했다.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강력한 규율이 필요했다. 군주제로 인하여 새로운 문제가 생겨났다. 왕의 권력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그 나라에는 왕의 범죄를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권위가 없었다. 이 같은 경우에 하나님은 종종 국가적 형벌의 집행자가 되었다. 왕의 잘못된 행동을 간과하는 것은 국민 한 사람의 사악한 행동을 너그럽게 봐주는 것보다 더 위험했다. 왕이 지닌 높은 지위 때문에 그의 악한 본보기의 영향은 그만큼 컸다. 그렇기 때문에, 아합과 그의 집의 경우 그리고 다윗이 이스라엘을 계수한 죄를 범한 후 70,000명이 죽었을 때(삼하 24장) 나타난 것처럼 주어진 형벌은 때때로 엄격했다. 그러나 고삐 풀린 불법을 저지하는 데 필요한 만큼 혹독한 심판을 명했다.내가 다 멸절하되. 이 표현은 양괄식(兩括式, inclusion)의 끝을 보여 준다. 이 표현은 다윗 시대부터 히브리인들 사이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삼상 25:22). 이 표현은 여로보암이 악한 길을 걸었을 때 멸절될 그의 자손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왕상 14:10). 바아사의 집이 파멸될 때 이 표현이 다시 사용되었다(왕상 16:11). 그리고 나봇이 죽임을 당하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겼을 때, 엘리야는 철저히 파멸될 아합의 후손을 가리키는 데 이 표현을 사용했다(왕상 21:21). 이제 선지자는 다시 아합의 집이 비참한 운명을 맞을 것을 나타내기 위해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9:9 여로보암의 집과 같게.
이 두 집 모두 완전히 멸망했다. 바아사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의 집을 칠 때, “여로보암의 온 집을 쳐서 생명 있는 자를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왕상 15:29)였고, 시므리가 바아사의 집을 멸절시킬 때, “그 족속이든지 그 친구든지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왕상 16:11)였다.
9:10 개들이 이세벨을 먹으리니.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사악한 여왕에게 닥칠 이 처참한 운명을 예언한 적이 있다(왕상 21:23; 왕하 9:36, 37). 아합의 아내의 이름은 죄악과 동의어가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을 가장 부끄러운 형태의 우상숭배와 죄악으로 몰아넣은 자가 바로 그녀였다. 그녀의 행동은 무서운 죄악이었고, 따라서 그녀는 소름끼치는 운명을 맞이해야만 했다. 이세벨에게 주어진 형벌은 잊어버려서는 안 되었고, 행악자들의 마음에 범죄자의 운명이 참혹하다는 사실에 대한 생생한 깨달음을 불러일으켜야만 했다. 동방에는 오늘날에도 굶주린 야생 개가 많이 있는데, 이들은 야외에 버려진 시체의 고기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청소부다.
9:11 평안이뇨.
이와 같은 질문이 17, 18, 19, 22절에도 나타난다. 기별자의 갑작스런 등장, 그가 은밀한 담화를 위해 예후를 따로 불러낸 것, 그가 서둘러 떠난 것 등이 방문 목적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모든 사람은 이 예언적 기별자가 일상의 용무로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가 좋은 기별을 가지고 왔는가 아니면 나쁜 기별을 가지고 왔는가? 어딘가 다른 곳에서 군대의 출정이 필요한 갑작스런 위기가 있었는가?
9:11 미친 자.
“미치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이다. 이 용어는 렘 29:26에서처럼 경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참조 호 9:7).
9:11 그대들이 그 사람…을 알리라.
이 말은 장관들이 예후를 왕으로 삼으려는 전반적인 계획에 참여했다는 것을 그가 의심했음을 암시한다.
9:12 당치 않은 말이라.
그들은 예언자의 목적을 상상조차 못했으며, 알기를 갈망했다. 왜 그것을 비밀에 부치려 할까? 예후가 그 문제를 바로 거기서 그들에게 밝히려 했을 것이다. 성경의 기록은 그들이 아는 대로 이제 막 이스라엘의 군대 총 대장에게 주어진 중요한 기별에 대해 장관들이 보인 흥분된 호기심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9:13 위.
히브리어 게렘(gerem). 문자적으로 “뼈” 혹은 “힘.” “섬돌 위”로 번역된 구절의 정확한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건축학적 용어로, 아마도 층계의 상부에 도드라진 단(壇)을 가리킬 것이다. 장관들이 모였던 뜰에서, 새 왕이 신하들 앞에서 자리를 잡고 앉았을 임시 보좌로 사용된 층계 상부의 단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을 것이다. 장관들은 왕이 신하들의 갈채를 받을 만한 높은 곳을 차지하도록 계단과 단 위에 자신들의 겉옷으로 호화로운 융단을 깔았을 것이다.
9:13 예후의 밑에 깔고.
예언적 기별이 전달됨으로 예후의 본부에 모인 사람들의 관계에 즉각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기별의 내용이 알려지기 전에는, 그들은 모두 함께한 전우였으며 그들의 왕을 섬기는 동료 관리였다. 이제 갑자기 그들 중 한 사람이 따로 구별되었고, 그는 왕이고 나머지 다른 이들은 그의 신하가 된 것이다. 한 사람은 존경을 받아야 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왕에게 경의를 표해야 했다. 그래서 장관들은 즉시 겉옷을 벗어 예후가 걸어가도록 그것을 융단으로 땅에 깔았다. 이는 여호와가 왕으로 세운 자에게 나타낸 적절한 존경의 표였다.
9:13 나팔을 불며.
즉위식에 포함된 공식적인 일이었다(참조 삼하 15:10; 왕상 1:39; 왕하 11:14).
9:13 예후는 왕이라.
즉시 그리고 기꺼이 대장을 왕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예후는 동료 장관들 사이에서 높은 존경을 받았음이 분명하지만, 요람과 오므리 가문에는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
9:14 요람을 배반하였으니.
선왕이 아직 살아 있었고, 아마도 여전히 왕위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예후가 취한 행동들은 사실상 요람 및 오므리와 아합 가문에 대한 반역이었다.
9:14 요람이…길르앗 라못을 지키다가.
이것은 포위 공격이 성공적이었으며 도성이 이스라엘의 수중에 들어갔음을 명백하게 보여 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진술이다. 여기서 “요람”이라는 말은 요람이라는 인물이 아니라 그가 다스리고 있던 나라를 대표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것이다. 만약 요람이 포위 공격 중에 떠났다면, 예후는 이미 왕의 이름으로 그 도성을 차지했을 것이고, 재탈환하려는 아람인들을 막기 위해 이스라엘 군대로 파수하고 있었을 것이다.
9:14 하사엘을 인하여.
분명 하사엘은 되도록 빨리 그 도성을 다시 탈환하려고 최선을 다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길르앗 라못을 계속 이스라엘의 통제 아래 두려 한다면 이스라엘은 하사엘에 대하여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되었다.
9:15 치료하려 하여.
기자는 요람이 길르앗 라못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오해를 막기 위해 요람이 포위 공격에서 받은 상처를 치료하러 이스르엘로 돌아온 것에 대하여 앞에서 말한 것(8:29)을 반복한다.
9:15 너희 뜻에 합당하거든.
예후는 왕으로서 첫 명령을 내린다. 그는 모질고 독단적인 처사를 하는 대신, 부하들의 의사를 고려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기 원한다. 그들이 그것을 지혜로운 처사로 생각한다면, 그들이 현재의 계획에 그와 함께하려 한다면, 그의 제안을 따를 것이었다.
9:15 한 사람이라도…가지 못하게 하라.
만약 발생한 사건에 대한 소식이 이스르엘에 있는 요람에게 전달된다면, 공모자들에게 큰 타격이 될 것이었다. 이 명령은 길르앗 라못이 이스라엘의 수중에 있었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한다. 왜냐하면 도성이 여전히 포위 상태에 있었다면 이런 명령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9:16 병거를 타고.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예후는 다른 사람이 길르앗 라못에서 막 일어난 일을 왕에게 전할 기회를 틈타기 전에 이스르엘에 도착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는 소규모의 사람들을 데리고 병거를 타고 가고, 군대는 아람인들의 기습에 대비하여 길르앗에 주둔해 있었다.
9:16 요람이…누웠음이라.
요람은 아직 상처가 회복되지 않아 이스르엘에 있는 자신의 침소에 틀어 박혀 있었다. 그러나 다음 장면은 그렇게 심각한 병이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그가 병거에 올라 예후를 만나러 갈 수 있을 만큼 건재했기 때문이다(21절).
9:16 요람을 보러.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은 모두 원래 길르앗 라못의 포위 공격에 참여했다(8:28). 요람은 상처를 입자 이스르엘에 있는 자신의 별장으로 떠났고 곧 아하시야가 뒤따랐다. 만약 두 왕이 포위 공격이 끝나기 전에 떠났다면 그것이 군대를 낙담시키는 영향을 끼쳤을 것이며 무관심이나 비겁함으로 해석될 것이었다. 만약 예후와 군대가 전투의 고초와 위험을 겪고 있는 동안 왕들이 여름 별장에서 쉬고 있었다면, 이는 왜 열광적으로 환호하면서 곧바로 예후를 왕으로 추대했는지를 설명해 줄 것이다.
9:17 이스르엘 망대.
이스르엘 도성은 이스르엘 골짜기 상부에 있었고 아래로 요단이 바라다 보였다. 그곳은 평지에 있었지만, 약 31미터의 가파른 비탈의 꼭대기에 위치해 있어서 그 지역에서 멀리 요단까지 두루 볼 수 있었다. 서쪽으로는 에스드랠론 골짜기를 가로질러 갈멜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전략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이 장소는 요새로 삼기에 훌륭한 곳이었다. 동방의 도성들의 성벽에는 각 방향에서 모든 곳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높은 문이나 망대가 있었다. 이스르엘의 망대 위에는 위협이 되는 모든 상황을 살피는 파수꾼이 서 있었다. 예후와 그의 무리들이 접근하였을 때 이 파수꾼은 담당 구역에서 근무 중이었고 자신의 의무를 충실하게 행하고 있었다.
9:17 무리의 오는 것을 보고.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말을 탄 일단의 사람들이 접근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먼 거리에서는 그들이 친구인지 적인지 이스라엘 사람들인지 아람 사람들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파수꾼은 아주 상세하게 식별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그러면 너무 늦을 것이었다. 그는 접근하는 무리들을 보자마자 그 도성이 어떤 사태에 대비할 수 있도록 왕에게 기별을 전했다. 예후 혼자 나아온 것이 아니라 일단의 무리와 함께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9:17 평안이냐.
참조 11절 주석. 이때는 전쟁의 시기였다. 길르앗 라못을 아람인들에게서 방금 탈환했으며, 따라서 하사엘이 틀림없이 그것을 재탈환하려 했을 것이다. 게다가 앗수르 군대가 멀리 있지 않았다. 이 시기는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 때였다. 그래서 “평안이냐”라는 질문은 일상적인 의미 이상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틀림없이 형식적인 인사 이상의 것이었다.
9:18 내 뒤로 돌이키라.
사자는 유감스럽게도 예후의 임무가 평화와 관련된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확인했지만 돌아가서 이러한 소식을 왕에게 전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그 사람들이 계속 진군해 오는 동안 뒤로 물러서라는 명령을 받았다.
9:18 돌아오지 아니하나이다.
파수꾼은 그들의 의도가 우호적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아보기 위해, 접근하는 무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요람이 보낸 사자는 보고를 가지고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가 돌아오지 못한 것은 접근하는 무리들이 우호적인 임무를 띠고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는 표로 여겨졌을 것이다.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본 것을 보고하는 것이 파수꾼의 직무였기 때문에 그는 사자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왕에게 즉시 보고했다.
9:20 파수꾼이…고하여.
왕에게 무엇을 고하든지 파수꾼은 힘있고 신속하게 반응했다. 그는 접근하는 무리의 의도를 드러내는 모든 징후를 살피기 위해 시선을 집중했다. 두 번째 사자도 돌아오지 않은 것은 좋은 조짐이 아니었다.
9:20 예후의 모는 것.
사람은 자신의 행동으로 알려진다. 예후를 알아보게 한 특징은 대체로 그가 정력적인 사람이며 신속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는 급하게 그리고 신속하고도 힘있게 행동했을 것이다. 그는 병거를 미친 듯이 몰았다. 전사로서 그는 용기 있고 원기 왕성하며 단호했을 것이다. 그로 이스라엘의 군대장관이 되게 한 것은 그의 삶에 나타난 이 추진력이었을 것이다. 맹렬하게 병거를 모는 그의 특성을 보고 용모를 식별하기도 전에 그를 확인할 수 있었다.
9:21 메우라.
(「제임스왕역」에는 “준비하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 요람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그렇게 명백하게 제시된 징후들의 의미를 더욱 정확하게 읽고, 다가오는 적을 만나러 나가기 위해 병거를 준비하라고 명할 것이 아니라 도성의 방어를 준비해야 했을 것이다. 황급히 나간 사실이 보여 주는 것처럼 요람이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예후를 만나러 나갈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아프지 않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는 불안해하고 염려했지만, 그것은 단지 길르앗의 형세에 대한 염려였을 것이다.
9:21 가서.
두 왕이 한 사람을 만나러 나갔다. 둘은 죽었고 하나는 왕위에 올랐다. 두 왕은 의심 없이 무장하지 않고 나갔다. 성에는 그들에게 유리한 요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성벽의 보호를 받았을 것이며, 아마도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충분한 병력이 있었을 것이다. 길르앗 라못을 떠나 길고 격렬한 여행을 한 후라, 예후의 말들과 군대는 지쳐 이스르엘에서 온 기병대를 상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9:21 예후를 맞을새.
(「제임스왕역」에는 “went out against Jehu”[예후를 향해 나아가니]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 더 정확히 말하면, “예후를 만나러” 나아가니. 여기서 “대하여”(against)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부르다”(to call), “만나다”(to meet)라는 어근에서 나왔으며, 문맥이 요구할 때만 “대하여”(against)로 번역해야 한다. 두 왕은 친구로서 한 친구를 만나길 기대하면서 함께 나아갔을 것이다.
9:21 이스르엘 사람 나봇.
이때쯤 예후는 도성과 궁전에 거의 다 왔을 것이다. 요람은 아합이 나봇에게 빼앗은 토지 있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 토지의 권리증서는 피로 서명되었다. 처음에 토지를 아합 집에 양도하도록 서명한 것은 나봇의 피였으나, 이제 서명해야 할 것은 아합 집의 피였다(참조 출 20:5 주석). 요람에게 임한 심판은 법의 요구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아합 집이 피의 토지에서 나봇의 죽음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보다 더 적절한 것이 있겠는가?
9:22 예후야 평안이냐.
요람의 질문은 길르앗의 상황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전쟁의 한복판에 있는 그곳 상황이 좋겠는가?
9:22 네 어미…음행.
우상숭배와 하나님에 대한 불충이라는 영적 의미의 음행(대상 5:25; 렘 3:3; 겔 16:15~43; 23:27~30; 호 2:2~10)과 문자적인 의미의 음행을 모두 나타내는데, 팔레스타인의 우상숭배 종교들은 다산 숭배와 관련되었으며 그 종교적인 의식들은 극악한 형태의 음란과 부도덕을 포함하고 있었다(참조 민 25:1, 2; 고전 10:7, 8).
9:22 술수.
마술, 사악한 영들을 찾아가는 일, 주문과 부적 사용, 운수 예언, 온갖 종류의 점 등은 고대 동방 종교에서 흔히 있었다(참조 삼상 28:3, 7~9; 왕하 1:2; 17:17; 21:3, 6; 단 2:2; 행 16:16).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러한 행위들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었다(출 22:18; 레 19:26, 31; 20:6, 27; 신 18:10~12; 대상 10:13; 사 8:19).
9:22 어찌 평안.
요람의 걱정스러운 질문은 예후의 거친 대답과 맞닥뜨렸다. 이스라엘의 미래의 왕은 외교관이 아니라 전사였다. 그의 말은 퉁명스럽고 직선적이었다. 요람이 평화를 운운함으로, 예후의 마음 가운데 격한 분노가 격발되었고, 예언자의 입에서 나오곤 했던 말보다 더 혹독한 탄핵의 격류가 불운한 왕의 머리 위에 쏟아졌다.
9:23 아하시야여 반역이로다.
히브리어 구문은 더 짧게 단지 두 단어 곧 “반역, 아하시야”로 구성되어 있다.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요람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도망하는 와중에 주위에 있는 말들을 채찍질하며 자신의 사촌에게 경고의 기별을 외쳤다.
9:24 활을 당기어.
예후는 훈련된 병사로, 개인적인 싸움에서 자주 활을 사용했다. 그가 당긴 화살 하나가 표적을 빗나가지 않고 목적을 이루었다.
9:24 두 팔 사이.
그의 어깨 사이. 요람은 도망하면서 예후에게 등을 보였다. 요람은 등에 일격을 맞고, 화살이 몸을 관통하여 심장을 뚫고 나왔다.
9:24 저가…엎드러진지라.
요람은 자신의 나라의 적과 싸우다가 영예롭고 영광스럽게 전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뢰하는 장관이요 친구였던 자의 화살에 맞아 죽임을 당했다. 몇 년 전에 엘리야가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왕상 19:17)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심판이 내린 자 중 어느 누구도 정의의 칼을 피하기를 바랄 수 없다(참조 신 32:43; 롬 12:19). 옛날의 행악자들은 여호와께서 당신이 말씀하신 것을 행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으며, 오늘날 세상도 그러하다. 그러나 죄악이 공변된 보응을 받는 것을 공의가 요구하는 한, 행악자들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은 실행될 것이다(참조 8절 주석).
9:25 그 장관.
참조 7:2 주석.
9:25 그 시체를 취하여…던지라.
예후는 나봇의 무죄한 피를 복수할 책임을 지고 있다. 그는 아합의 사악함과 이세벨의 죄를 알고 있으며, 따라서 그 죄악들을 피로 복수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는 나봇이 일했으며 또한 그의 피가 흘려진 바로 그 밭에 왕의 시체를 던지라고 명했다.
9:25 함께 타고…아합을 쫓았을 때.
예후와 빗갈은 모두 역전의 용사였다. 그들은 아합과 더불어 군대에 함께 있었으며, 전시에 이룬 그의 전과와 평화시에 취한 그의 행동을 목격했었다. 또한 그들은 나봇의 죽음 후에 닥칠 운명에 대한 여호와의 형벌을 왕에게 선고하면서 아합을 혹독하게 탄핵하는 엘리야의 증언을 들었을 것이다(왕상 21:19~24). 적어도 그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예후는 하나님의 판결이 옳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선언은 그에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이제 두 사람은 여호와의 판결이 요람의 죽음을 통해 실행된 이때에 다시 함께 있었다.
9:25 저의 일을 예언하셨느니라.
(「제임스왕역」에는 “laid this burden upon him”[그에게 이 짐을 내려놓았다]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 즉 그에 대한 신탁 곧 화를 선언했었느니라. 사 13:1; 15:1; 17:1; 19:1; 21:1; 22:1; 23:1; 30:6; 41:1; 합 1:1; 슥 9:1; 12:1에 나타난 “짐”(burden) 즉 “경고”의 용례를 비교하라.
9:26 내가 어젯날에…분명히 보았노라.
이것은 강조하는 주장 혹은 맹세에 사용되는 공식이다. 여호와가 확실하게 나봇의 피를 본 만큼, 확실하게 그 피를 보응할 조치를 취할 것이었다.
9:26 그 아들들의.
이것은 아버지와 함께 나봇의 아들들의 죽음을 처음으로 언급한 구절이다. 아합이 그 포도원에 대한 분명한 소유권을 얻기 위해 나봇의 아들들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을 살려두었다면 왕은 저항 없이 포도원을 소유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세벨이 나봇을 죽일 때 그와 함께 그의 가족을 어떻게 파멸시켰는지 이해할 수 있다. 죄 없는 아버지뿐 아니라 무죄한 자녀들도 죽임으로 아합과 이세벨의 죄악은 더욱 잔인 무도하게 된 것이다.
9:27 아하시야가…도망하니.
아하시야는 요람이 죽임을 당하여 그 시체가 나봇의 포도원에 던져지는 동안 빈둥거리며 방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요람보다 더 빨리 추격자들에게서 도망친 것 같다.
9:27 구르 비탈.
이블르암 근처의 비탈 혹은 언덕. 구르라는 이름은 여기서만 사용되며 정확한 장소는 알려지지 않는다. 이블르암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상 곧 이스르엘 서남쪽 약 13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해 있다. 추격을 받았을 때 아하시야는 예루살렘에 다다르는 것을 첫 번째 목표로 삼았을 것이며, 이것이 그가 취할 수 있는 노선이다. 이스르엘에서 시작되는 길은 처음에는 에스드랠론 평원을 따라 꼬불꼬불하게 나 있지만, 얼마 후에 사마리아 산지 외곽의 돌출부에서 오르막길이 된다. 그의 추격자들이 그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이르렀을 때, 아하시야의 수레는 비탈 가운데 하나를 오르고 있었다. 이블르암은 현재 텔 벨 아메(Tell Bel ‘ameh)로 알려져 있다.
9:27 므깃도까지 도망하여.
이야기의 세부 사항은 명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역대기의 기록에 의하면,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체포되어 예후 앞에 끌려와 살해되었기 때문이다(대하 22:9). 이 두 진술은 추가적 세부 사항을 제공하는 역대기의 기록과 연계하여, 전체적인 윤곽을 보여 주는 열왕기의 기록을 고려해 보면 조화될 수 있다. 사건들의 차례는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아하시야는 이블르암 근방에서 상처를 입은 후에 도주로를 바꾸어 남쪽 산악 지대 대신에 므깃도 방향의 평지를 선택했다. 므깃도에 있는 동안 남쪽으로 도망가려 했지만 사마리아에서 붙잡혀, 먼저 도착해 있던 예후의 소환으로 므깃도로 돌아왔다. 그런 다음 그는 처형되어 죽음을 맞이했다. 자세한 사항은 더 간결한 열왕기의 기사에서는 생략되었다.
9:28 예루살렘에.
예후는 장례를 위해 유다 왕의 시신을 왕 자신의 수도로 옮겨오는 것을 허락했다. 유다 나라가 북쪽 이웃과 밀접하게 연합하여 교제하는 것은 여호와의 뜻이 아니었다. 여호사밧은 벤하닷을 대적하는 아합을 지원한 일 때문에 선지자에게 책망을 받았다(대하 19:2). 하사엘을 대적하는 전투에서 요람을 지원한 아하시야의 행동 또한 하나님의 눈에 괘씸한 일이었다(대하 22:4, 5). 아하시야는 자신의 목숨으로 이 같은 원조의 대가를 지불했다.
9:28 그 열조와 함께.
보통 상황이라면 사악한 왕 아하시야는 다윗 성에 있는 왕들의 묘실에 장사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합 가문과 관련이 있었지만 이런 영예를 그에게 준 것은 “저는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던 여호사밧의 아들이었기 때문에”(대하 22:9)라는 구절에 나타난 대로 선한 왕 여호사밧의 혈통이었기 때문이다.
9:29 요람의 십일 년.
이 절은 아하시야의 통치 기록에 대한 후기(後記)로, 마지막 기사는 앞 절에 있다. 왕의 기록을 제시할 때 언급되는 첫 번째 항목은 그가 왕위에 오른 해인데, 그것은 이웃 나라 군주의 통치년에 비춰 환산되며, 8:25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아하시야의 통치는 이스라엘의 요람의 통치 제12년에 시작되었고, 여기서는 그것이 11년으로 되어 있다. 이 두 계산의 차이는, 이 기간에 유다가 북쪽 왕국과 연합하는 정책을 펴면서 유다의 체계와 1년씩 차이가 나는 이스라엘의 연대 계산 체계를 채택했다는 가정으로 설명될 수 있다. 8:25의 기록은, 왕이 즉위한 해를 그의 첫 해로 부른 새로운 체계에 따른 것임이 분명하다. 요람의 제12년은 전에 사용한 체계에 따르면 11년이 될 것인데, 그것에 의하면 왕의 재위 1년은 그가 즉위한 해의 다음 해 곧 달력상 그의 첫 옹근 해를 말한다(참조 71쪽).
9:30 이세벨이 듣고.
이세벨에게 마지막 운명의 시각이 다가왔고 그녀는 그것을 알았다. 두 왕 곧 그녀의 아들과 손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그녀는 자신이 다음 차례가 될 것임을 잘 알았다. 그녀는 이 땅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준비해야만 한다. 이 사악한 여인이 무엇을 준비했겠는가!
9:30 눈을 그리고.
문자적으로 “그녀가 안티몬을 자신의 눈에 바르고.” 아주 초기부터 동방 여인들은 눈썹과 속눈썹을 그리기 위해 화장품을 사용했다(참조 렘 4:30; 겔 23:40).
9:30 머리를 꾸미고.
문자적으로 “머리를 좋게[아름답게] 꾸몄다.” 이세벨은 자신의 머리를 “머리 망사” 곧 머리에 쓰는 것으로 장식했다(참조 사 3:18). 그녀는 마지막까지 반항하였으며 회개하지 않았다. 그녀는 모든 장신구로 화려하게 꾸미고 가장 품위 있는 의복을 입었다. 그러나 그녀의 겉치장은 예후 앞에서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 심판 앞에서 모든 입장이 있는 그대로 드러났다. 분을 바르고 화장을 하는 것이 내적 타락을 덮을 수 없으며, 비단과 공단으로 만든 옷이 영혼에 새겨진 죄의 추한 흔적을 숨길 수 없다. 겉치장을 위한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세벨은 마음이 타락했다. 하나님은 마음을 보시며 외모보다는 마음의 치장을 요구하신다(벧전 3:3, 4). 자신의 어두운 죄의 기록을 고려한다면, 이세벨은 마땅히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의 교만한 정신이 겸손하게 되기를 거부했으며, 돌 같은 그녀의 마음은 꼼짝하지 않았다.
9:30 바라보다가.
그 창문은 그녀의 밀실에 있는 것으로, 거기서 안 뜰을 내려다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창문으로 다가가 궁전 문을 막 들어서고 있는 반역자를 모멸에 찬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을 때 취한 태도는 오만하고 방자해 보였을 것이다.
9:31 주인을 죽인 너 시므리여 평안하냐.
시므리는 바아사 가문을 몰살시킨 자였다(왕상 16:8~13). 그러나 그는 단지 7일간 통치했다. 그 기간 끝에 그는 자신의 계승자와 싸우다 죽었다. 그에게 평안이란 없었다. 본문에 나타난 그대로 보면, 이세벨이 시므리의 불행한 시도를 마치 예후에 대한 경고인 것처럼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문자적인 번역은 다른 생각을 전달한다. 즉 이세벨이 시므리에게 하듯 조롱하는 투로 예후에게 “평안하뇨? 네 주인을 죽인 자 너 시므리여”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9:32 내 편이 될 자가 누구냐 누구냐.
히브리어는 한층 간결하고 더욱 적절하다. 미 잇티 미(mi ’itti mi), “누가 나와 함께, 누가?” 이 간결하고 성급한 표현은 예후 특유의 표현으로 보인다. 그는 궁전 뜰로 들이닥쳤고 이세벨의 조롱하며 모욕하는 인사 소리를 듣자,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자신 앞에 있는 비열한 여인을 채 붙잡기도 전에 곧장 서둘러 모든 일을 끝장내고 싶었다.
9:32 내시.
이세벨은 자신과 가장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에게조차도 미움을 받은 여인의 전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순간까지도 내시들은 그녀 앞에서 굴욕적인 두려움으로 굽실거리며 그녀의 온갖 변덕스러운 생각을 즉시 이행할 태세를 갖추는 데 길들여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그녀를 존경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녀를 경멸했고, 자신들에게 이익이 될 경우에만 그녀에게 충성했을 것이다. 기회가 생기면, 그들은 이전 폭군에게 등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아마도 통치권의 변화를 환영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하여 새 주인의 호의를 얻기를 바랐을 것이다.
9:33 저를 내려 던지라.
그 오만 방자하고 포악한 여인은 자신의 죄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 이것은 정의의 요구였으며, 또한 하나님의 선고이기도 했다. 그것은 그녀의 오만 방자함에 맞는 합당한 종말이었다. 폭력과 부패에 기초한 왕좌는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다.
9:33 그 시체를 밟으니라.
그녀가 고통 중에 죽어갈 때 그녀에 대한 그의 철저한 경멸을 보이기 위한 행동이다. 잘 치장되고 화장된 몸이 수치스럽게 창 밖으로 내던져져 난폭한 보복자의 말과 수레바퀴에 짓밟혀 생을 마감했다. 왕족의 피였으나 오염된 그녀의 피는 왕궁 벽에 튀었으며 말의 발에 얼룩졌다. 이세벨은 여왕이 아니라, 스스로가 입증한 대로 경멸받는 짐승 같은 죽음을 맞았다. 그녀는 정의를 미워했고, 따라서 이제 그녀의 국가가 그녀를 미워했다. 그녀는 하나님을 경멸했으며, 따라서 오늘날 세상은 그녀를 공포와 경멸로 되돌아본다.
우리가 이세벨을 정죄한다 해도, 예후가 그녀를 처리할 때 밟았던 야만적인 과정을 침묵으로라도 인정하는 데까지 가서는 안 된다. 그가 그녀에게 심판을 집행한 방법을 참작할 수 있는 길은 그가 광포한 시대에 살았다는 것밖에 없다.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
9:34 예후가…먹고 마시고.
이제는 예후가 왕이기 때문에, 한때 아합의 소유였던 궁전은 이제 더 이상 그의 후손의 소유가 아니었다. 바깥뜰에 있는 여왕의 도막난 시체를 버려 두고 예후는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9:34 이 저주받은 계집.
예후는 이 여인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왕상 21:23)는 것을 상기하고 있었다.
9:10 이스르엘 지방에서.
이세벨이 악행을 저지른 현장 곧 그녀가 엘리야를 파멸시킬 것이라는 위협을 했고(왕상 19:2)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기 위해 그의 무죄한 피를 흘렸던(왕상 21:7~15) 바로 그곳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은 지당했다.
9:34 왕의 딸.
예후는 비록 냉혹한 전사였지만, 마음속에는 왕위에 대한 동정과 존경심을 느꼈다. 이세벨은 시돈의 제사장이요 왕이었던 엣바알의 딸로 태어났다(왕상 16:31). 그러나 그녀는 하찮은 존재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제 예후는 적어도 한때 공주였던 자에게 걸맞은 장례를 치러 주려 하고 있었다.
9:35 그 두골…외에는.
이스르엘의 개들이 이세벨을 위해 자연 그대로의 무덤을 만들었다. 여왕의 시체는 도성 들개들의 먹이가 되었다. 엘리야의 예언은 성취되었고(왕상 21:23), 정의가 충족되었으며, 나봇에 대한 이세벨의 범죄도 앙갚음했다.
9:36 여호와께서…말씀하신 바.
이것은 축약된 왕상 21:23의 더 완전한 예언인 것 같다.
9:37 말하지 못하게 되리라.
이것은 이세벨의 몸이 박살나 유해를 알아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거나 그녀가 묘가 없이 방치되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만약 후자의 의미라면 그녀의 유해는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졌으며, 미래 세대의 사람들은 그녀의 무덤을 가리켜 바로 저기가 한때 거만한 여왕이 장사된 곳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녀가 죽었을 때 오직 그녀의 사악함에 대한 기억만 남았다. 이세벨의 소름끼치는 최후는 우리에게 인간의 권력과 영광의 무상함과 덧없음을 가르쳐 준다. 이 모든 것은 티끌에서 왔다가 티끌로 돌아갈 것이다. 그녀의 운명은 모든 불법을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기별에 귀 기울일 것을 요구한다. “불의로 그 집을 세우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렘 22:13). 이세벨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공언하는 자들이 자신들 가운데 들어오도록 방임하여 자신들을 타락시키고 더럽혀 그에 따른 심판에 대하여 준엄한 경고가 주어지게 한 비열한 죄악의 표상이 되었다(계 2:20~23).
참고자료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 제4권, 시조사.
- 「열린노트성경」, 아가페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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