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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14장 & 성경주석 본문

성경주석/열왕기하

열왕기하 14장 & 성경주석

Timberners-Lee 2017. 6. 25. 22:53

<열왕기하 14장 흐름정리>

유다 왕 아마샤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에 대한 기록이다. 아마샤는 통치 초기에 하나님 앞에서 비교적 정직히 행한 탓에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도 말년에는 북 왕국을 치려는 교만을 보였으며 잘못된 정치를 거듭하였다. 결국, 그는 모반자들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임이 입증된 셈이다(잠 16:18). 한편,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2세는 역사상 북 왕국을 가장 부강하게 만든 인물이다. 그러나 번영을 누리면 누릴수록 왕들과 백성들은 더욱 교만해져 죄악을 일삼았다. 즉, 그들은 하나님이 경고하신 멸망의 길로 스스로 치닫게 되었다.


<열왕기하 14장 줄거리>

1. 아마샤의 선한 통치.

5. 아마샤가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처벌함.

7. 에돔에 대한 승리.

8. 아마샤가 요아스의 분노를 일으켜 결국 전쟁에 패하고 약탈당함.

15. 요아스의 뒤를 이어 여로보암이 왕이 됨.

17. 모반한 무리가 아마샤를 죽임.

21. 아사랴가 아마샤의 뒤를 이음.

23. 여로보암의 악한 통치.

28. 스가랴가 여로보암의 왕위를 계승함.


<열왕기하 14장 개역한글>

1. 이스라엘 왕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 이년에 유다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왕이 되니      

2.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 구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여호앗단이라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3.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 그 부친 요아스의 행한대로 다 행하였어도      

4.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5. 나라가 그 손에 굳게 서매 그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죽였으나      

6. 왕을 죽인 자의 자녀들은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대로 함이라 곧 여호와께서 명하여 이르시기를 자녀로 인하여 아비를 죽이지 말 것이요 아비로 인하여 자녀를 죽이지 말 것이라 오직 사람마다 자기의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니라 하셨더라      

7. 아마샤가 염곡에서 에돔 사람 일만을 죽이고 또 셀라를 쳐서 취하고 이름을 욕드엘이라 하였더니 오늘까지 그러하니라      

8. 아마샤가 예후의 손자 여호아하스의 아들 이스라엘 왕 요아스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오라 우리가 서로 대면하자 한지라      

9.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유다 왕 아마샤에게 보내어 이르되 레바논 가시나무가 레바논 백향목에게 보내어 이르기를 네 딸을 내 아들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라 하였더니 레바논 들짐승이 지나가다가 그 가시나무를 짓밟았느니라      

10. 네가 에돔을 쳐서 파하였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니 스스로 영광을 삼아 궁에나 거하라 어찌하여 화를 자취하여 너와 유다가 함께 망하고자 하느냐 하나      

11. 아마샤가 듣지 아니하므로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올라와서 유다 왕 아마샤로 더불어 유다의 벧세메스에서 대면하였더니      

12. 유다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한지라      

13.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벧세메스에서 아하시야의 손자 요아스의 아들 유다 왕 아마샤를 사로잡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벽을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까지 사백 규빗을 헐고      

14. 또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금은과 모든 기명을 취하고 또 사람을 볼모로 잡아가지고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      

15. 요아스의 남은 사적과 그 권력과 또 유다 왕 아마샤와 서로 싸운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16. 요아스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이스라엘 왕들과 사마리아에 함께 장사되고 그 아들 여로보암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17. 이스라엘 왕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죽은 후에도 유다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십 오년을 생존하였더라      

18. 아마샤의 남은 행적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19. 예루살렘에서 무리가 저를 모반한고로 저가 라기스로 도망하였더니 모반한 무리가 사람을 라기스로 따라 보내어 저를 거기서 죽이게 하고      

20. 그 시체를 말에 실어다가 예루살렘에서 그 열조와 함께 다윗성에 장사하니라      

21. 유다 온 백성이 아사랴로 그 부친 아마샤를 대신하여 왕을 삼으니 때에 나이 십 륙세라      

22. 아마샤가 그 열조와 함께 잔 후에 아사랴가 엘랏을 건축하여 유다에 돌렸더라      

23. 유다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 십 오년에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사십 일년을 위에 있으며      

24.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2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로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26.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27.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도말하여 천하에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      

28. 여로보암의 남은 사적과 모든 행한 일과 그 권력으로 싸운 일과 다메섹을 회복한 일과 이전에 유다에 속하였던 하맛을 이스라엘에 돌린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9. 여로보암이 그 열조 이스라엘 왕들과 함께 자고 그 아들 스가랴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열왕기하 14장 성경주석>

14:1 요아스 이 년에.

 남방 유다의 역사가 다시 기록되기 시작한다. 이는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왕위를 계승한 후 바로 뒤이어 유다의 아마샤가 통치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마샤의 통치기간을 계산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82쪽을 참조하라.

14:3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하였더라”(대하 25:2). 아마샤의 두드러진 죄악은 그가 전투에서 에돔인들을 물리친 후에 에돔의 신들을 섬겼던 일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자신을 책망하는 선지자의 생명을 위협했던 일이다(대하 25:14~16).

14:4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히스기야가 산당을 제거할 때까지 유다는 이곳에서 제사하는 일을 계속하였다.

14:5 굳게 서매.

 유다 왕 요아스가 살해된 후(12:20, 21) 불안정과 혼란의 시기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 시기에 새 왕은 틀림없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이 지나가고 온 나라에 왕의 권위가 섰을 때 마침내 그의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들에 대한 효과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14:6 죽인 자의 자녀들.

 이 시점에서 이러한 언급을 한 것은 당시에 부모의 반역으로 인하여 자녀들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 일반적이었음을 말해 준다.

14:6 모세의 율법책에.

 참조 신 24:16.

14:7 염곡.

 이 계곡의 위치는 확실하지 않지만 두 곳이 제시되어 왔다. (1) 사해 남단에 위치한 한 지역. (2) 브엘세바 동쪽에 위치한 와디 엘-밀흐(Wadi el-Milh., 소금).

14:7 에돔 사람 일만을 죽이고.

 대하 25:5~13에서 길게 다루고 있는, 아마샤가 에돔과 벌였던 전쟁이 이곳에는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역대기 기록에 따르면 아마샤는 1만을 죽이고 또 1만을 포로로 데려와서 바위꼭대기에서 떨어뜨려 죽게 했다.

14:7 셀라.

 문자적으로 “바위.” 이곳은 아마도 사해 남쪽 약 81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유명한 페트라(Petra) 지역이었을 것이다. “페트라”는 바위를 일컫는 헬라어 이름이다. 당시 에돔의 수도가 바로 이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4:8 사자를 보내어.

 역대기의 기록은 임박한 전쟁의 원인을 강조하는 좀 더 상세한 설명을 담고 있다. 아마샤는 그의 많은 군사들 이외에 “은 일백 달란트로 이스라엘 나라에서 큰 용사 십만을 삯내었”다(대하 25:6).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온 군사들과 동행한다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의 기별을 선지자에게 받고 왕은 군사들을 되돌려 보냈다. 이러한 취급에 분노한 이스라엘 군인들은 유다의 몇 성읍을 쳐서 약탈한다(대하 25:7~10).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승리감에 도취되었던 왕은 이스라엘로 돌아가던 군사들이 유다의 성읍들을 짓밟았다는 사실에 노하여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한다.

14:8 서로 대면하자.

 전쟁을 일으키려는 도전. 이곳에 사용된 용어를 볼 때, 개인적인 전투를 신청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14:9 가시나무.

 유다 왕을 경멸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별을 이스라엘 왕이 보냈다. 아마샤가 에돔을 대항하여 성공을 거두었다면 요아스는 더욱 강한 아람 왕국을 대항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싸울 가치도 없는 적에게 도전을 받는다는 자체가 하나의 치욕이라고 생각하는 우월한 입장을 드러내는 답신을 해온 것이다. 백향목은 크고 강하며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위엄 있는 나무였다. 가시나무는 약하고 쓸모 없으며 발에 밟힐 덤불에 불과하였다.

14:9 네 딸을 내 아들들에게 주어.

 여호사밧은 아합과 동맹 관계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아합의 딸 아달랴와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결혼하는 것으로 확고해졌다(왕상 22:44; 왕하 8:18, 26; 대하 18:1). 왕족들은 각각의 자녀들에게 같은 이름을 부여하므로 그들의 우호관계를 나타내었는데, 유다의 여호람과 아하시야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하시야와 여호람이 그 실례다. 아마샤가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키려는 이스라엘의 왕은 요아스로, 아마샤의 부친과 이름이 같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두 나라 간에 지속되는 우호관계를 말해 주는 것이었다. 아마샤는 요아스의 딸을 자신의 아들과 결혼시킴으로 공식적인 동맹 관계를 인준하는 일에 관해 요아스에게 제안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요아스는 지금 이런 제안에 대해 아마샤를 조소하고 있는 것이다.

14:10 교만하였으니.

 지금 요아스는 아마샤가 현실을 주목하도록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아마샤가 에돔에게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이 그의 귀에 들어갔다. 이스라엘 군대의 도움 없이 에돔과의 전쟁에서 성공을 거둔 아마샤는 요아스를 쉽게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14:10 어찌하여 화를 자취하여.

 인간에게 생기는 문제들은 대부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사실 현재 유다는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여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요아스는 아마샤의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자신과 국가에 치명적인 문제를 야기하지 말도록 경고함으로 훌륭하게 처신했다.

14:11 듣지 아니하므로.

 아마샤는 감정이 고조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성적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의 행위는 마치 어린아이와 같았으며 자신이 전쟁을 벌이려는 상대가 제시하는 순수한 조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4:11 벧세메스.

 예루살렘 서쪽 24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성읍. 요아스는 아마샤가 공격을 감행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남쪽으로 군대를 보내어 소렉 골짜기를 지나는 고대의 대로를 통해 서쪽에서 예루살렘으로 접근하려고 했음이 분명하다. 오늘날 이곳에는 자파(Jaffa)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철도가 놓여 있다. 벧세메스 지역은 현재 텔 에르-루메일레(Tell er-Rumeileh)라고 불리며, 1928년부터 1933년까지 미국 탐사대에 의해 발굴되었다.

14:12 패하여.

 결과는 요아스가 예고한 그대로였다. 아마샤는 자기 자신의 상처를 쓸데없이 건드렸으며, 유다는 그 왕의 우매함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14:13 아마샤를 사로잡고.

 고대에 전쟁은 엄청난 기세로 치러졌으며, 왕과 장군들은 군대를 이끌고 전열의 선두에 나서서 싸웠다. 이스라엘의 아합과 유다의 요시야도 전쟁에서 생명을 잃었으며(왕상 22:34~37; 왕하 23:29) 여호사밧도 심각하게 생명의 위협을 당하였다(왕상 22:32, 33).

14:13 에브라임 문.

 이 문은 성의 서쪽 끝의 북쪽 성벽 즉 북쪽 끝에 있는 서쪽 성벽의 일부일 것이다. 이 부분을 파괴한 이유는 유다의 수도를 손아귀에 넣기 위함이었다. 성벽의 이 부분을 잃은 것은 유다 민족에게 커다란 수치가 되었다.

14:13 사백 규빗.

 약 183미터.

14:14 금은.

 이 일은 예루살렘을 침공한 아람 왕이 예루살렘을 떠나도록 하기 위해 요아스가 하사엘에게 성전의 보물을 보내고(12:18) 바로 몇 년 후에 일어났다. 그때 이후로 다시 쌓인 보물들 역시 원수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14:14 볼모.

 사람을 볼모로 잡아가는 것은 고대에 흔히 있는 일이었다. 볼모는 일반적으로 국가의 우수한 인재들 가운데서 선발했다. 승리한 국가는 이러한 장치를 통해서 패배한 나라 백성들이 장래에 순순히 행동할 것을 희망하였다. 요아스를 향한 아마샤의 무모한 도전으로 아마샤의 자존심이 땅에 떨어졌을 뿐 아니라 유다 국가 전체가 극심한 고통을 당해야 했다.

14:15 남은 사적.

 15절과 16절은 18절부터 다시 이어지는 아마샤의 통치에 관한 기록의 막간에 들어 있다. 이 절에는 요아스의 통치를 마무리하는 형식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13:12, 13 에서 언급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형식의 반복이 여로보암 II세가 그의 아버지 요아스와 공동으로 통치하였음을 암시한다고 이해한다.

14:17 십오 년.

 왕들에 관한 기록 중에 이러한 내용이 언급된 경우는 이곳뿐이다.

14:19 모반.

 아마샤가 유다에서 인기를 얻지 못했다는 것은 자명하다. 요아스에 대한 그의 무모한 도전, 비참한 패배, 예루살렘 성벽의 상당 부분이 무너져 내려 당한 수치 그리고 성전 및 왕궁 보물들을 잃어버린 것 등은 백성들이 그 통치자에 대해서 냉혹한 감정을 품게 하기에 충분했다.

14:19 라기스.

 일반적으로 지금의 텔 엣-두웨이르(Tell ed-Duweir)와 동일시되며, 예루살렘 남서쪽 약 43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해 있다.

14:20 말에.

 라기스는 예루살렘과 병거 길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 길은 동쪽으로 중앙 고원지대에, 그리고 북쪽으로는 나라의 수도까지 이어졌다. 미가는 이 도성에 대한 예언적인 묘사에서 병거를 라기스와 연결하여 언급하고 있다(미 1:13).

14:21 온 백성.

 이 기록은 온 나라가 떠들썩할 정도의 대중적인 움직임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한 왕이 죽고 그 아들이 왕위에 오르게 될 때 일반적으로 온 백성이 왕을 삼았다고 새삼 언급하지는 않는다. 아마샤가 잡힌 후에 아사랴가 부친과 공동으로 통치한 것에 대해서는 대하 25:27; 26:1 주석을 참조하라.

14:22 엘랏.

 에돔 땅(왕상 9:26), 에시온 게벨(신 2:8) 근처에 있는 아카바(Aqabah) 만(灣)에 위치한 성읍. 다윗이 에돔을 정복했을 때 이스라엘에 귀속되었음이 분명하다(삼하 8:14). 솔로몬은 그 항구 시설을 사용하였다(왕상 9:26; 대하 8:17, 18). 이곳은 아마 에돔이 여호람을 배반하고 유다의 수하에서 벗어났을 때 빼앗긴 것으로 보인다(왕하 8:20~22).

14:23 여로보암.

 이스라엘의 초대 왕과 같은 이름(왕상 12:20). 현대의 학자들은 초대 왕과 구별하기 위해 여로보암 II세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로보암 II세라는 이름은 북방 이스라엘을 세운 사람의 이름을 따라 지은 것으로 생각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러한 이름을 부여하여, 자신의 후계자가 이스라엘 제2의 건국자가 되어 국가에 힘과 번영을 가져오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기를 희망했던 것 같다.

14:24 악.

 이것은 북방 왕국의 통치자들에 대한 전반적인 질책이었다. 이스라엘 왕들의 긴 족보 가운데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행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여로보암은 예후 왕조에 속하였다. 그러나 그는 예후가 전복시킨 오므리 왕조와 아합 왕조의 악한 길을 따랐다.

14:25 가드헤벨.

 스불론 국경의 한 지역으로(수 19:13), 나사렛 북동쪽 약 4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해 있다. 요나의 무덤이라고 일컬어지는 곳이 거기에 남아 있다. 현대 아랍어로 키르베트 엣-주라(Khirbet ez-zurra)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

14:25 요나.

 니느웨로 보내졌던 선지자(욘 1:1, 2). 요나는 요나서에 기록된 것보다 더 넓은 사역의 영역을 담당하였다. 요나가 여로보암 II세의 통치기간 중에 활동했다는 사실을 관찰하여 요나서에 기록된 사건들의 대략적인 시기를 정할 수 있다. 

  본 주석에서 채택하고 있는 잠정적인 연대기에 따르면 여로보암 II세가 통치하던 기간에 앗수르를 통치하던 왕은 아다드-니라리 III세(810~781), 살만에셀 IV세(782~772), 아수르-단 III세(772~754), 아수르-니라리 V세(754~746) 등이다.

14:25 지경.

 여로보암은 국가의 본래 국경을 회복하였다.

14:25 하맛 어귀.

 이 표현은 국가의 북쪽 경계선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참조 민 34:8; 수 13:5; 삿 3:3; 왕상 8:65; 암 6:14). 에스겔 역시 하맛을 국가의 북쪽 한계선으로 설정하였다(겔 47:16; 48:1). 이스라엘이 국경선을 이곳까지 확장한 것은 솔로몬이 통치하고 있을 때였다(대하 8:3, 4).

14:25 아라바 바다.

 사해(민 34:12; 신 3:17; 4:49; 수 3:16). 요단의 동쪽 지역은 예후(10:32, 33)와 여호아하스(13:2, 25)가 통치하는 동안에 빼앗겼으며 요아스가 부분적으로나마 다시 회복하였다(13:25).

14:26 고난…을 보셨고.

 하나님께서는 불순물을 제거하기에 적합한 온도 이상으로 고통의 불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자녀들이 약한 징벌에 반응을 보인다면 가혹한 심판은 필요 없게 될 것이다. 반면, 가벼운 시험 아래서 회개하기를 계속해서 거절하는 것은 계속되는 더 높은 강도의 시험을 필요로 한다. 이스라엘이 바로 이런 경우에 속했다. 약한 재난들은 지속적인 개혁을 성취하기에는 불충분했고, 따라서 지속적인 반역은 국가의 완전한 파괴라는 궁극적인 운명으로 스스로를 몰아넣고 있었다. 여로보암 치하에서 누린 일시적인 편안함은 하나님께서 반역한 국가를 위하여 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기 위해 계획되었다. 아직 너무 늦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거의 끝에 이르렀으며 그 끝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 시기는 많은 선지자가 활동했던 시기에 속했다. 위기와 필요의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특별하고도 거룩한 길을 제공하신다. 선지자 요나의 기별 외에도 호세아와 아모스의 예언도 이 시기에 주어졌다. 이 책들의 내용은 당시 상황에 더 밝은 빛을 더해 준다.

14:26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 구절의 정확한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 광범위한 재난이 모든 계층에 임했음을 의미하는 듯하다(참조 신 32:36; 왕상 14:10; 왕하 9:8). “갇힌 자와 놓인 자” 즉 “매인 자와 자유로운 자”, 이 두 가지는 서로 대조되는 개념일 수 있다.

14:27 아니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아직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라는 명령을 발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는 이스라엘이 당신에게 돌아오도록 강력한 자극을 주기 위해 일시적인 번영을 누리도록 계획하셨다. 국경 회복은 순종할 때 주어질 축복을 미리 맛보게 하는 것이었다. 본문의 기자는 신 32:36~43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께서 그들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신 29:20)할 시기가 아직 오지 않았다.

14:27 구원하심이었더라.

 이러한 번영은 여로보암의 악함과는 관계없이 이르러 왔다(참조 24절). 악한 자들은 자신들이 받은 축복이 번영케 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얼마만큼 은혜를 입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승리가 곧 하나님께서 그 왕이나 백성의 행로를 인정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승리의 경험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본질적인 소명으로 돌아오도록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새로운 초청을 의미한다.

14:28 모든 행한 일.

 여로보암은 그의 국가를 강하게 하기 위해 많은 일을 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 기록은 매우 간단하다. 국가적인 성공은 국가적인 교만으로 이어졌으며 동시대의 선지자들은 이 점을 강하게 비판했다(호 5:5; 7:10; 암 6:13).

14:28 다메섹을 회복한 일과…하맛을….

 이 언급은 당시 유다 왕국의 북쪽 경계를 가리킨다. 다메섹은 다윗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통치를 받게 되었으며(삼하 8:6), 솔로몬 시대에도 여전히 제국의 한 부분으로 남아 있었다(왕상 11:23, 24). 솔로몬 왕국은 또한 하맛까지 포함하고 있었다(대하 8:4). 하맛이 특정 성읍을 의미하는지 지역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참조 25절). 하맛이라는 성읍은 다메섹 북쪽 약 193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해 있다.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 III세(Tiglathpileser III, BC 746~727년)는 “아즈리아우(Azriau)에게 넘어갔던 하맛의 19개 지역을 그 부근의 도성들과 함께 자신의 통치령으로 삼았다”고 주장하였다. 비록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이 아즈리아우는 아마도 유다의 아사랴 곧 웃시야일 것이다(참조 16:5). 이것이 유다의 아사랴를 의미한다면 디글랏 빌레셀의 원정 당시 하맛 지역은 유다의 통치 아래에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이 북쪽 지역의 통치권을 놓고 서로 경쟁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여로보암 당시 한때나마 남방의 경쟁국에게서 그 통치권을 빼앗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후에 유다가 그 통치권을 되찾았음이 틀림없는데, 왜냐하면 본 주석에서 채택하는 연대기에 따르면 디글랏 빌레셀이 이 지역을 원정한 일은 여로보암이 죽은 지 10년 후인 BC 743년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북쪽 지역에 관한 유다의 이런 관심은 앗수르의 움직임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유다의 왕인 아사랴는 앗수르의 침략에 대항하여 서방 연합군을 이끄는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다. 그리고 북쪽 아람의 군소 국가들은 앗수르의 침략을 대항하는 데 도움을 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그를 종주로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은 북쪽 국경 지역에 놓인 국가들에 대한 유다의 이러한 관심 때문에 심기가 불편했으며, 여로보암이 통치하는 시기에 북쪽 지역을 점하는 데 성공하였다.


참고자료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 제4권, 시조사.

- 「열린노트성경」, 아가페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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