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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STORY
이사야 8장 성경주석 본문
<이사야 8장 흐름정리>
하나님께서 주신 보호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유다 왕 아하스는 북 왕국의 침략에 직면해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앗수르를 의지하는 불신앙적 태도를 보였다. 본문은 이에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 주신 책망과 경고이다. 즉, 이사야는 하나님의 보호를 경시한 유다가 도리어 앗수르에 의해 환난을 겪을 것을 선포하면서 아울러 열방을 향해서도 이스라엘과 유다의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촉구하였다. 신분과 혈통,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하나님을 의뢰치 않고 순복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징벌을 면치 못한다.
<이사야 8장 줄거리>
1. 이사야가 마헬살랄하스바스라는 이름을 통해 아람과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정복될 것을 예언함.
5. 유다도 불충으로 말미암아 그와 같은 운명을 맞을 것임.
9.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임.
11.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평안이 있을 것임.
19. 우상 숭배자들에게 큰 고난이 닥칠 것임.
<이사야 8장 개역한글>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큰 서판을 취하여 그 위에 통용 문자로 마헬살랄하스바스라 쓰라
2. 내가 진실한 증인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를 불러 증거하게 하리라 하시더니
3. 내가 내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하라
4. 이는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할줄 알기 전에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 왕 앞에 옮긴바 될 것임이니라
5. 여호와께서 다시 내게 일러 가라사대
6.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나니
7.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 위에 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곬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8.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창일하고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의 펴는 날개가 네 땅에 편만하리라 하셨느니라
9. 너희 민족들아 훤화하라 필경 패망하리라 너희 먼 나라 백성들아 들을지니라 너희 허리를 동이라 필경 패망하리라 너희 허리에 띠를 띠라 필경 패망하리라
10. 너희는 함께 도모하라 필경 이루지 못하리라 말을 내어라 시행되지 못하리라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니라
11. 여호와께서 강한 손으로 내게 알게 하시며 이 백성의 길로 행치 말 것을 내게 경성시켜 가라사대
12. 이 백성이 맹약한 자가 있다 말하여도 너희는 그 모든 말을 따라 맹약한 자가 있다 하지 말며 그들의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13.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14.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15.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것이니라
16.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나의 제자 중에 봉함하라
17. 이제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18.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9.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21.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주릴 것이라 그 주릴 때에 번조하여 자기의 왕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22.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 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중으로 쫓겨 들어가리라
<이사야 8장 성경주석>
8:1 [더욱이].
(「제임스왕역」에는 “Moreover”가 들어 있음-역자 주). 문자적으로는 “그리고”이며, 여기서는 “그래서” 또는 “다시”라는 말에 해당한다. 동사 요메르(yo’mer), “이르시되”(문자적으로 “말씀하실 것이다”)와 연결된 히브리어 와우(wau) 곧 ”그리고”는 여기서 “와우 연속구문”(참조 제1권, 25)으로 알려진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 단어는 8장을 7장과 연결시켜 주며 7장의 설명과 연속성을 갖게 하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하자면, 8장은 7장의 후속편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따라서 7장에 대한 설명 또는 해설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이 예언의 시기는 앞장과 거의 비슷한 BC 735년 말이나 734년 초이다(참조 7:1, 16 주석). 예언 자체도 앞장의 예언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그 배경 아래서 이해해야 한다.
8:1 서판.
히브리어 길라욘(gillayon). “평판”(平板)을 의미함. 같은 단어가 3:23에는 “손거울”로 번역되어 있다.
8:1 통용문자.
(「제임스왕역」에는 “a man’s pen”[사람의 펜]-역자 주). 히브리어 헤레트 에노쉬(h.eret. ‘enos∨)는 일반적인 용도로 흔히 쓰는 펜 또는 뾰족한 바늘을 의미하는 관용적인 표현이다.
8:1 마헬살랄하스바스.
문자적으로는 “신속히 탈취하고 서둘러 노략하다.” 서판에 기록된 이 이름은 7:17~25에 예언된 앗수르의 침공이 임박함을 나타내려는 의미이다. 이 이름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 1년여 동안 상징적인 기별을 묵묵히 전함으로,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할 충분한 기회를 제공하였다. 참조 8절 주석.
8:2 진실한 증인.
(「제임스왕역」에는 “witnesses to record”[기록하는 증인들]-역자 주). 즉 확실성을 “인증하기 위한” 증인으로, 문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의미임. 우리야는 후에 아하스왕이 다메섹에서 본 제단의 양식대로 성전에 새로운 제단을 만들도록 명령받은 제사장이다(참조 왕하 16:10, 11 주석). 스가랴의 신원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8:3 내 아내.
(「제임스왕역」에는 “proph-etess”[여선지자]-역자 주). 이 말은 이사야의 아내 역시 예언의 은사를 받았으며 이사야의 사역을 돕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듯하다. 예언의 은사를 나타냈던 여성들에게 “여선지자”라는 칭호가 주어졌다(삿 4:4; 왕하 22:14; 대하 34:22). 반면에 이 칭호는 단지 그녀가 선지자의 아내였기 때문에 붙여졌을 수도 있다. 마헬살랄하스바스는 이사야의 둘째 아들이었다(사 7:3). 이사야의 첫째 아들이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라는 기별을 백성들에게 주었듯이, 둘째 아들은 임박한 심판을 가리키는 징조가 될 것이었다.
8:4 내 아빠.
아이가 출생한 지 1년 정도 되면 보통 “아빠”, “엄마”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아이가 두 살이 되기 전에 앗수르가 이스라엘과 아람을 약탈할 것이었다. 이 예언은 베가와 르신이 그들의 보좌를 잃고 후에 생명까지 잃게 되는 BC 732년에 성취되었다(사 7:16; 참조 왕하 15:30; 16:9). 따라서 서판에 쓰인 마헬살랄하스바스라는 글은 사마리아를 “약탈”하고 아람을 “탈취”하게 될 앗수르의 임박한 침공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참조 8:1 주석). 그 말대로 이스라엘과 아람은 앗수르에게 멸망당했다. 유다는 얼마동안 보존되었다.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으며(7:4), 주께서 유다와 함께하시며 북쪽의 이웃나라들이 당한 불행한 운명으로부터 보호하시겠다는 약속의 증표로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기의 탄생을 예언하셨다.
한 점토판의 기록에 의하면 디글랏 빌레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왕을 몰아냈고 그 후에 그가 호세아를 왕으로 세웠다고 주장한다(참조 제3권, 117). 왕하 15:29, 30에 의하면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취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던 때에 베가가 왕위에 있었으며, 그 후에 호세아가 베가를 죽이고 보좌에 올랐다. 그리고 왕하 16:7~9에는 아하스가 앗수르에 도움을 청하고 디글랏 빌레셀이 다메섹을 치고 그 백성을 포로로 잡아갔고 르신을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하스는 이스라엘과 아람 왕들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기보다는 디글랏 빌레셀에게 구원을 요청했다(왕하 16:7). 그러나 이 행위로 말미암아 아하스는 유다에 멸망을 초래했을 뿐이었다. 역대기 기자는 아하스의 망령된 행실로 인해 유다가 수치를 당하게 되었으며, 비록 디글랏 빌레셀이 왔을지라도 “돕지 아니하고 도리어 군박하였더라”고 기록한다(대하 28:19, 20).
8:6 실로아 물.
예루살렘 동쪽 언덕에 있는 자연동굴을 타고 흐르는 이 수로는 기혼 샘에서 시작해 실로암의 옛 연못으로 들어가는 물줄기를 형성했었다. 후에 히스기야가 터널을 만들어서(실로암 명각이 발견됨. 참조 제3권, 90; 이사야 서론) 기혼 샘물을 성안에 있는 실로암 새 못으로 끌어들였다. 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들은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이 함축하는 기별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라는 확신을 갖게 하는 기별을 선포하고 있었다.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권고를 버리는 것이었다. 도움을 얻기 위해 앗수르로 향함으로 아하스는 유다에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가 덮이도록 하였는데, 그것은 “큰 하수 곧 앗수르 왕”이 “모든 언덕에 넘쳐…네 땅(유다)에 편만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7, 8절). 이 모든 것이 “부지런히 약탈하고 서둘러서 탈취하라”는 마헬살랄하스바스라는 이름에 함축되어 있었다(참조 사 8:1 주석).
8:6 르신…을 기뻐하나니.
6절의 나머지 부분이 전후 문맥과 연관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불분명하다. 아하스와 유다 백성들은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인 베가로 인해 심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7:1, 2). 히브리어 본문의 정정을 전제로 해서 어떤 이들은 하단부를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 앞에서 두려움으로 녹았나니”(「개정표준역」)라고 번역했다. 이렇게 읽는 것이 문맥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는 반면, 한편으로 어느 정도 히브리어 본문을 부적절하게 재구성하고 있기도 하다. 다른 이들은 이 구절이 초기 편집자에 의해 삽입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면서, 이 구절이 생략되면 자연스럽게 7절에 이어지며 그럴 경우 사상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해 두루마리의 1QIsa가 마소라 본문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8:7 큰 하수.
여기에서 앗수르는 유브라데강으로 상징되어 있으며(참조 수 24:2 주석; 참조 렘 47:2), 닥쳐올 유다에 대한 앗수르의 침공은 물이 강둑에 넘쳐서 주변의 마을을 침수시키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 물들은 먼저 이스라엘 나라를 삼키고, 후에 “유다에 들어와 창일하”게(사 7:8) 될 것이었다. 앗수르인들은 자신들의 군대가 나라들을 홍수처럼 휩쓴다고 말하곤 했다.
8:8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불순종과 불신으로 인해 유다는 앗수르의 침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이스라엘은 궁극적으로 멸망할 것이지만 유다는 완전히 정복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처음에는 매우 작지만 홍수의 범위가 점점 증가해서 마침내 유다의 “목에까지 미치”게(참조 사 30:28) 될 것이었다. 역사적인 기록은 결국 예루살렘을 제외한 유다 전체가 일시적으로 앗수르의 수중에 넘어갔었음을 보여 준다(참조 왕하 18:13 주석).
8:8 임마누엘.
이 이름에 대해서는 7:14 주석을 참조하라. 임마누엘의 이름이 언급된 것은 이스라엘에 그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계실 수도 있었음을 상기시키고자 함이다(참조 7:14 주석).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완전히 상실하였으며 유다도 거의 그런 지경에 이르렀다. 유다의 많은 지도자와 백성들이 주님을 버렸고, 그 결과 그분의 임재는 그들과 함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떤 이들 즉 적은 수의 남은 자들은 충성스러웠고, 따라서 구원받을 것이다. 이 기별이 주어진 것은 우선적으로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이다.
8:8 그의 펴는 날개.
둑에 범람하는 강물의 넘침과 연관지어 볼 때 오히려 “그것의 펴는 날개”라는 편이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강물 자체는 앗수르 왕을 상징하는 것이 틀림없다(7절).
8:8 편만.
참조 8절.
8:9 너희 민족들아.
문자적으로 “너희 백성들아”이며 그 의미는 “너희 나라들아”이다. 이사야는 여기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기를 “함께 도모하”는(10절) 이방 나라들에게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경고한다. 9절의 시적 형태에서 “너희 민족들아”라는 말은 “너희 먼 나라 백성들아”라는 구절과 평행을 이룬다.
8:9 훤화하라.
(「제임스왕역」에는 “associate yourselves”[연합하라]-역자 주). 히브리어 로우(ro‘u). “나쁘다”, “즐겁지 않다” 또는 “깨뜨리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라아 (ra‘a‘)에서 왔다. 따라서 로우는 “즐겁지 않다” 또는 “깨지다”라는 의미일 것이다. 「불가타역」 번역자들은 모음점이 없는 히브리어 본문을 택하여(참조 제1권, 25, 35, 36), 로우라는 단어를 “교제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라아(ra‘ah)에서 파생된 것으로 여겼으며, 결과적으로 로우를 콘그레가미니(congregamini) 즉 “모이라” 또는 “연합하라”로 번역하였다. 「제임스왕역」은 「불가타역」의 이 해석을 따랐다. 「70인역」 번역자들은 로우 대신 데우라고 되어 있는 어떤 히브리어 본문을 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들은 이 데우를 헬라어 그노테(gno-te) 즉 “알다”로 번역하였다. 히브리어 글자에서 r(r)과 d(d)는 그 모양이 거의 똑같아서 서로 바꾸어 쓰는 실수를 저지르기가 매우 쉽다(실례로 창 10:4; 25:15; 수 9:4; 삼상 12:11; 삼하 8:12; 23:30 주석을 참조하라). 데우는 그 뿌리를 야다(yada‘), 즉 “알다”에 두고 있으며, 데우라는 형태는 “너는 알다”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데우는 문맥과 좀 더 잘 조화를 이루는 해석을 보여 주며, 영어로는 “take knowledge”(지식을 얻으라) 또는 “know ye”(너는 알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사 8:9이 시적인 형태로 나타나 있으며, 이런 경우에 “너는 알라”라는 번역은 “들으라”는 말과 평행을 이루는 것이 된다.
8:10 함께 도모하라.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좌절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악한 자들의 모든 계획을 무력화시키실 수 있는 분이다. 그분은 아하스 시대에 그렇게 하셨으며 오늘날에도 그렇게 하신다.
8:10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이니라.
히브리어 임마누 엘(‘Immanu ’El). 같은 단어가 8절에서는 문자 그대로 “임마누엘”로 번역되었다. 9절과 10절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의 마음에 심어 주고자 애쓰시는 임마누엘 기별의 의미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결국 앗수르의 계획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성취되지 못할 것인데, 그것은 그분이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 때문이다(참조 10:5~12). 이사야는 이 임마누엘의 기별을 유다 백성들에게 부지런히 선포하였으며,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간직한 사람들이 틀림없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아하스의 아들인 히스기야 왕이 그중 하나였다. 산헤립이 유다를 치러 왔을 때, 히스기야는 다음의 영감적인 말로써 백성들에게 용기를 북돋우었다.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앗수르 왕과 좇는 온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하는 자가 저와 함께하는 자보다 크니 저와 함께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하는 자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대하 32:7, 8). 히스기야가 주님을 신뢰하였으므로 하나님은 그와 함께하셨고, 마침내 185,000명에 달하는 산헤립의 군사들이 하나님의 천사에 의해 하룻밤 사이에 죽임을 당했다(왕하 19:35).
8:11 이 백성의 길.
이사야는 하나님을 멀리하는 유행적 풍조에 굴복하지 말아야 하였다. 하나님은 “강한 손으로”라는 구절로써 이 명령을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바른 행동 방향이 무엇인지 의심할 필요가 없다.
8:12 너희는…하지 말며.
(「제임스왕역」에는 “say ye not”[너희는 말하지 말라]-역자 주). 비록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고 계시지만 그분은 “이 백성”(11절)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히브리어에서 “너희”는 복수이며 따라서 하나님은 15절까지 백성들에게 말씀을 계속하신다. 16절에서 그분은 다시금 이사야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신다.
8:12 맹약한 자.
(「제임스왕역」에는 “confederacy”[동맹]-역자 주). 히브리어 케셰르(qes∨er). 이 단어가 나오는 경우의 절반 이상이 “반역”(「개역한글판」에는 “모반”, “반역”, “배역” 등으로 번역됨-역자 주)으로 번역되었다(삼하 15:12; 왕하 15:15, 30; 겔 22:25 등). 대하 23:13과 다른 곳에서는 “반역”으로 번역돼 있다. 오직 사 8:12에서만 “맹약”으로 번역되었다. 이런 경우에 그것은 어떤 사람을 해치려는 목적으로 형성된 연합을 의미한다. “맹약”이라는 단어에 「제임스왕역」이 기록될 당시에 일반적이었던 “불법적인 목적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의미가 아직도 들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오늘날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긍정적 의미의 “동맹”을 의미하는 데 사용된다. 이 단어가 여기에서 의미하고 있는 것은 전자의 경우이다. 아람과 이스라엘이 유다를 대항하여 함께 모의 또는 “맹약”하였고(7:2, 5, 6), 아하스는 이스라엘과 아람을 대항하여 앗수르와 동맹을 맺었다(왕하 16:7~9). 아하스와 유다 백성들은 이스라엘과 아람의 공모 또는 맹약을 두려워하였으며, 그것에 맞서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방 족속과 연합하였다. 아하스가 주께로부터 책망받은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이방의 도움을 더 신뢰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이 우상 숭배자들과 동맹관계를 맺는 것은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세상과 구별하고자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고를 들어야 하며 그분 안에서 능력을 발견하여야 한다.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와 함께할 수 있으며,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 우리는 그분의 사업을 그분의 방법으로 성취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어떤 종류의 동맹이라도 맺게 될 때, 사람의 정책들이 불가피하게 하늘의 원칙들을 밀어내게 되며 주님의 사업은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우리의 힘은 세상과의 밀접한 연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서 완전히 분리됨에 있다.
8:13 만군의 여호와 그를…거룩하다 하고.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관한 이상을 보았고(6:1~4), 따라서 이제 유다 백성들로 여호와의 거룩하심을 인식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거룩함에 대한 이상을 보지 않는 한 거룩함에 결코 이르지 못할 것이었다.
8:13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참조 신 4:10; 6:2 주석.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하스는 베가와 르신을 두려워하였는데,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분을 무서워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경외함으로 그 앞에 있는 것이며, 그분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이며, 기쁨으로 그분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8:14 거룩한 피할 곳.
히브리어 믹다쉬(miqdas∨), “거룩한 장소”, “성소.” 하나님을 진실로 두려워하는 자들(참조 13절 주석)은 그분 안에서 위험을 막아주는 피난처를 발견할 것이다(참조 시 91:1 주석). 이사야는 백성들을 세상의 사물에서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고자 애쓰고 있다. 그리스도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의 참된 “성소”이다.
8:14 거치는 돌.
예수님은 자신을 반석으로 언급하였다(마 21:42~44). 바울은 사 8:14의 이 구절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했으며(롬 9:33), 베드로는 그것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적용을 언급하였다(벧전 2:6~8). 솔로몬 성전을 건축하는 동안 채석장에서 떠온 한 커다란 돌이 있었는데, 그것을 놓을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해 성전 터의 한쪽 구석으로 옮겨 놓았다. 그 돌은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고 버려진 채 건축자들이 지나다니는 길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이 돌은 전체 구조물 중 가장 중요한 모퉁잇돌이라는 것이 밝혀졌으며, 결국 중요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참조 시대의 소망 497, 598). 예수님은 오랫동안 거절되어 온 유대교의 모퉁이 돌이시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에게 그분은 거치는 돌이요 걸리는 반석이다. 그분은 항상 그들의 길 한가운데 계셔서 그들 자신의 이기적인 계획들을 실행하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의 악한 의도들이 성취되지 못하도록 막으신다. 그들이 거쳐 넘어지는 그 돌은 다름 아닌 “참하늘”의 기초 돌이며, 그가 없이는 이 세상과 우주의 모든 생명, 기쁨 그리고 평화가 존재할 수 없다.
8:14 이스라엘의 두 집.
이 구절은 이사야가 유다뿐 아니라 이스라엘에게도 말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생명과 소망의 성소이기보다는 오히려 거치는 돌임을 발견하고서 그분과 그분의 율법에서 등을 돌렸다.
8:14 올무.
돌의 비유는 문제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 주는 덫의 비유로 대체될 수 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기별은 예루살렘에 거하는 악한 거민들에게 덫 또는 올무가 될 것이었다. 생명이요 소망이며 모든 인류의 피난처가 되어야 할 그분은 그분의 길을 걸어가기를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올무가 됨이 입증될 것이다. 만일 악한 자들이 그들의 악한 길을 어떠한 제지도 받지 않고 걸어가도록 허락된다면, 그들은 그들 자신과 땅의 모든 거민을 매우 신속히 멸망시킬 것이다. 지구상에서 생명이 지속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악한 자들의 활동을 멈추게 하시는 명령과 그들로 허락된 범위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하시는 어떤 제어하심이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에게 함정과 올무가 되심에 감사할 수 있을 것인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지구상의 어떤 거민들에게도 평화나 기쁨 혹은 자유나 희망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8:15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우선적으로는 이사야 자신의 시대에 사는 백성들을 지칭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과 반대되는 길을 걷는 모든 시대의 사람들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책망을 거절할 때,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다. 영적 분별력이 부족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기별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종종 그 기별들이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게 할 것이다. 영적 통찰력과 진리에 대한 사랑을 지닌 사람들은 아무도 올무에 걸릴 필요가 없다.
8:16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이것은 이사야에게 주어진 일이었다. 이 말씀은 문서를 싸매고 인을 치는 고대의 관습을 언급하고 있다. 애굽의 엘레판티네(Elephantine)에서 발견된 BC 5세기에 유대인들이 남긴 아람어 파피루스들은 아직도 조각된 인장 자국이 남아있는 진흙으로 인봉된 끈과 매듭으로 묶여진 그대로 출토되었다(참조 제5권, 74, 75). 그러므로 문서의 내용들은 믿을 만한 것이어야 하며 파손되지 않은 채로 보존해야 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은 그렇게 되어야 하였다. 이사야는 지극히 중요한 기별을 그 백성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기별을 그 나라에 전파하였다. 그 기별은 충실하게 보전되어야 하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그분의 거룩한 율법을 주셨고 그 율법을 순종하는 것은 모든 인류에게 생명을 의미하였다. 그 율법이 손상되지 않도록 모든 시대를 통해 그것을 보존하며, 일점일획이라도 변하지 않도록 해서 그것이 쓸모 없어지는 것을 막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참조 마 5:17, 18 주석).
8:17 낯을 가리우시는.
하나님은 변덕스럽게 어떤 사람 또는 나라들에게서 그분의 얼굴을 숨기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시는 경우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때이다(참조 59:1, 2). 하나님은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 영원히 말씀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그들로부터 그분의 얼굴을 “가리우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그분의 율법에 순종하는 것에서 돌아섰기 때문이다. 그 나라 전체의 경험은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응답하기를 원치 않았던 사울의 경험과 유사하였다(삼상 28:6).
8:17 나는 기다리며.
다시 이사야가 화자(話者)가 된다. 이것은 12~16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기별에 대한 그의 개인적인 응답이다. 다른 이들이 무엇을 하든지 선지자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분 안에서 확신과 힘을 발견하고자 하는 목적을 확고히 한다.
8:17 바라보리라.
다른 이들의 경험이 어떠하든지, 이사야는 하나님을 바라볼 것이며,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일 것이며, 그분의 길을 걸을 것이었다(참조 24:15).
8:18 나와…자녀들.
그들의 이름이 의미하고 있듯이(참조 7:14 주석), 이사야와 그 아들들은 유다 백성들에게 살아있는 상징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은 매우 중요한 기별을 그분의 백성에게 선포하셨다. “이사야”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실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사실 이사야의 이름은 그의 이름이 나오는 이 책의 주제이다(참조 이사야 서론). 곧 벌어질 상황과 연관지어 볼 때 이것은 이스라엘과 아람 그리고 앗수르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했다. 이사야의 첫째 아들인 스알야숩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라는 의미인데, 그 이름을 통해서 그 아이는 배성들에게 남은 무리가 구원받을 것임을 상징했다. 이 당시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하셨던 것처럼 유다를 완전히 멸망시키려고는 하지 않으셨다. 이사야의 둘째 아들인 마헬살랄하스바스는 “부지런히 약탈하고 서둘러서 탈취하라”는 의미이다. 이 아들은 심판이 속히 닥쳐올 것이며 오래지 않아 멸망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한 자들에게 임할 것임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었다. 그분께 충성하고 진실한 자들에게는 임마누엘이라는 아이가 그들 중에 거하시는 그분의 끊임없는 임재에 대한 보증이었다.
8:19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여기에서 이사야는 아하스와 유다의 많은 사람들이 조언자와 안내자로 의지하고 있는 근원들을 고발하고 있다.
8:19 지절거리며.
히브리어 차파프(s.apap), 흔히 “짹짹 울다”, “속삭이다”(참조 레 19:31 주석). 영매(靈媒)들은 불완전한 발음으로 중얼거린다. 이 말에는 조소하거나 경멸하는 내용들도 있다. 귀신의 사자들은 종종 영들과 접촉하기 위해 가장 몰상식하고 비열한 방법들을 사용하기도 한다. 귀신의 영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그 성품과 행동이 그것들과 유사하게 되어버린다. 사단은 “율법과 증거의 말씀”(사 8:20)을 버리고 오히려 악령들의 기분 좋게 하는 기별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사실상 무제한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8:19 신접한 자.
참조 레 19:31; 신 18:11 주석. 사울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단절시켰고, 따라서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에게 응답하지 않으셨다(참조 삼상 28:6 주석). 그리고 사울처럼 백성들은 이제 안내와 도움을 얻기 위해 귀신들에게 향했다. 그렇게 되자 오늘날처럼 강신술이 널리 행해졌으며, 그 결과 백성들은 도움을 얻기 위해 신접한 자를 찾았다.
8:19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조언을 얻기 위해 영매를 찾는 것을 대신할 수 있는 다른 선택. 이스라엘이 생명의 창시자인 하나님을 버리고 불행과 사망의 창시자에게 자신들을 맡기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였다.
8:19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문자적으로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조언을 구해야 하겠느냐?”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므로(전 9:5) 그들은 아무런 조언도 해 줄 수 없으며, 그렇게 하는 척하는 것은 다 속임수에 불과하다. 사람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버리고 사망의 창시자의 영향력 아래에 자신을 두는 것보다 더 어리석게 될 수는 없다. 그것이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진리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마귀의 거짓말에 무방비 상태가 되어 버릴 것이다.
8:20 율법.
히브리어 토라(torah).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모든 뜻을 지칭하는 말. 이 말은 성경의 영감받은 글들, 특히 모세의 기록들을 의미하는 일반적인 성경적 용어이다(참조 민 19:14; 신 4:44; 30:10; 31:9; 잠 3:1 주석; 제1권, 39). 이사야는 사람들을 사단과 인간의 말과 지혜로부터 하나님의 계시된 지혜로 향하게 한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그분의 증인들 혹은 대변인들이었으며, 그들이 간직한 “증거의 말씀”은 그분의 지혜와 생명의 기별이었다. 이사야는 여기에서 사람들을 진리에 대한 표준이요 올바른 삶의 길잡이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향하게 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 안에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 말씀에 일치하지 않는 어떤 사람의 말이라도 그 안에는 “빛이 없”다(참조 50:10, 11 주석).
8:21 곤고하며 주릴 것이라.
문자적으로 “심하게 억눌리며 굶주릴 것이라” 또는 “매우 곤궁하고 굶주릴 것이라”(「개정표준역」). 이사야는 여기서 하나님과 그분의 빛을 거절한 사람들, 특별히 7장과 8장에 나타난 예언의 기별을 거절한 자들에 관하여 언급한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혼란과 곤고 속에서 그들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갈망하면서, 하나님은 제쳐놓고 결코 찾을 수 없는 무언가를 찾으면서 어둠의 땅을 지나는 것처럼 걸어간다. 이제 불순종으로 인한 쓰라린 결과들을 거둬야 했으므로 빛도 희망도 없는 상태에서의 암울함과 당혹감 그리고 자신들이 처한 곤경으로 인한 분노의 마음으로 그들은 이 고통에 대해 그들의 인간 지도자들을 비난하며 하나님을 저주한다. 선지자는 여기에서 모든 시대에 있었던 강퍅한 사람들의 경험을 적절하게 묘사한다. 9:1~8에 기록된 이사야가 받은 영감적인 이상은 찬란한 의의 태양의 치료하는 광선(말 4:2; 참조 마 1:23 주석)으로 사람들의 영혼에 있는 어둠을 몰아내는 빛 되시는 그리스도가 초림한 당시를 짧게나마 보여 준다.
8:22 굽어보아도.
이 사람들은 하늘을 응시하면서도 하나님이나 빛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 후에 그들은 땅을 바라보게 되며 그곳에서 영혼의 고통과 혼란만을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세상은 불확실성과 비탄의 혼란스런 미로이다. 9:1~7에서 선지자가 간절히 고대하는 메시야가 오늘날 흑암 중에 있는 인간의 유일한 빛이며 밝은 내일을 위한 유일한 희망이다.
참고자료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 제7권, 시조사.
- 「열린노트성경」, 아가페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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