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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7장 성경주석 본문

성경주석/이사야

이사야 7장 성경주석

Timberners-Lee 2017. 9. 12. 00:28

<이사야 7장 흐름정리>

7~10장은 앗수르의 침략으로 인한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을 경고하는 내용이다. 그 중 본장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당해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하나를 시사해 준다. 이스라엘은 아람과 연합하여 남 왕국 유다를 침략하였고 이는 다윗 왕조를 영원히 지켜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거스르는 행위였다. 한편, 북 왕국의 침공 때문에 온 유다 백성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러자 하나님은 '임마누엘' 약속을 주시면서 자신만을 굳게 의지하면 친히 대적을 물리쳐 주겠다고 하셨다. 이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에 관한 약속으로 곧 메시야 예언이다.


<이사야 7장 줄거리>

1. 이사야가 르신과 베가로 인해 두려워 떨고 있던 아하스를 위로함.

10. 징조를 구할 권리를 받았으나 그것을 거절한 아하스에게 약속된 그리스도가 징조로 주어짐.

17. 그분이 앗수르를 통해 심판하실 것이 예언됨.


<이사야 7장 개역한글>

1.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 왕 아하스 때에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 왕 베가가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2. 혹이 다윗 집에 고하여 가로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3.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4.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종용하라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찌라도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      

5. 아람과 에브라임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악한 꾀로 너를 대적하여 이르기를      

6.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 그것을 곤하게 하고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파하고 다브엘의 아들을 그 중에 세워 왕을 삼자 하였으나      

7.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 도모가 서지 못하며 이루지 못하리라      

8.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육십오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망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이며      

9.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니라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10.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일러 가라사대      

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데서든지 높은데서든지 구하라      

12. 아하스가 가로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13. 이사야가 가로되 다윗의 집이여 청컨대 들을찌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15.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줄 알 때에 미쳐 뻐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      

16.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줄 알기 전에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바 되리라      

17.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너와 네 백성과 네 아비 집에 임하게 하시리니 곧 앗수르 왕의 오는 날이니라      

18.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애굽 하수에서 먼 지경의 파리와 앗수르 땅의 벌을 부르시리니      

19. 다 와서 거친 골짜기와 바위틈과 가시나무 울타리와 모든 초장에 앉으리라      

20. 그 날에는 주께서 하수 저편에서 세내어 온 삭도 곧 앗수르 왕으로 네 백성의 머리털과 발털을 미실 것이요 수염도 깎으시리라      

21.  그날에는 사람이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을 기르리니      

22. 그 내는 젖이 많으므로 뻐터를 먹을 것이라 무릇 그 땅 가운데 남아 있는 자는 뻐터와 꿀을 먹으리라      

23. 그 날에는 천 주에 은 일천 개의 가치 되는 포도나무 있던 곳마다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라      

24. 온 땅에 질려와 형극이 있으므로 살과 활을 가지고 그리로 갈 것이요      

25. 보습으로 갈던 산에도 질려와 형극 까닭에 두려워서 그리로 가지 못할 것이요 그 땅은 소를 놓으며 양의 밟는 곳이 되리라


<이사야 7장 성경주석>

7:1 아하스 때에.

 이 기별은 아하스의 치세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BC 734년에 전해진 기별임이 분명해 보인다(참조 16절 주석).

7:1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 왕 베가.

 앗수르의 자료들은 웃시야가 앗수르에 대하여 강경책을 썼으며, 그의 아들 요담도 동일한 정책을 유지했음을 보여 준다. 하지만 아하스는 그들과는 달리 앗수르에게 친선 정책을 폈다. 그는 앗수르의 도움을 얻기 위해 디글랏 빌레셀에게 성전과 자신의 궁전에서 취한 금과 은을 보냈다(참조 왕하 16:5~10 주석). 우리는 왕하 15:29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베가가 반(反)앗수르 정책을 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디글랏 빌레셀이 그를 치러 왔기 때문이었다. 또한 우리는 앗수르의 자료들을 통해서 아람의 르신도 이와 마찬가지로 앗수르에 적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에 서아시아 대부분의 나라들은 앗수르에 대항해서 하나의 동맹체로 연합되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아하스에 대한 베가와 르신의 공격은 그를 폐하고 새 왕을 그 자리에 앉히며, 또한 유다에게 앗수르에 대항하는 일에 연합하도록 압력을 가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7:1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대하 28:5~15에 따르면 유다는 베가와 르신에게 참패를 당하였으며, 아카바 만(灣)에 위치한 엘랏은 아람의 수중으로 들어갔다(왕하 16:6). 하지만 예루살렘 성읍 자체는 비록 포위는 당했었지만 함락되지는 않았다(왕하 16:5).

7:2 혹이 다윗 집에 고하여 기로되.

 즉 다윗 가문의 살아 있는 대표인 아하스에게 보고되었음을 의미함. 이 공격은 특히 다윗 왕조를 향한 공격이었는데, 이는 아하스를 폐하고 다브엘 가문에서 새 왕을 세워 유다의 왕좌에 앉히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6절).

7:2 왕의 마음.

 사해 두루마리 1QIsa에는 이 구절이 빠져 있다.

7:2 흔들렸더라.

 (「제임스왕역」에는 “움직였더라”-역자 주). 또는 “흔들렸더라.” 아하스는 왕좌에서 쫓겨날까봐 두려워하였다(6절). 배도한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자신의 왕국이 곧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7:3 스알야숩.

 문자적으로는 “남은 무리가 돌아오다(돌아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와 그의 아들들을 백성에게 징조가 되게 하셨다(8:18). 이사야와 동시대의 인물인 호세아도 그의 아들들이 의미심장한 이름들을 가지고 있었다(호 1:4~9). 이사야는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남은 무리가 돌아올 것이라는 이 기별을 전하였다(4:2, 3; 10:21 등).

7:3 윗못 수도.

 성읍이 포위를 당한 때에는 언제나 물 공급이 매우 중요한 문제로 여겨졌다. “윗못 수도”는 “성모 마리아의 우물” 또는 “동정녀의 샘”으로 알려진 기혼의 위쪽 저수지인 것으로 확인되었다(참조 제4권, 149). 이 샘은 오벨의 동쪽 가장자리에, 그리고 성전 지역의 남쪽에 있던 기드론 계곡에 위치하였다. 후에 히스기야가 그 유명한 수로인 실로암 터널을 만들어서(왕하 20:20; 대하 32:30) 물을 이 기혼 샘에서 성안에 있는 실로암 못까지 끌어들였다. 아하스 시대에는 도성이 포위되었을 때 이 수원(水源)이 성 밖에 있었을 것이므로 적과 마주치지 않고 물을 성안으로 들여오는 방법에 대하여 깊은 연구가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7:3 나가서.

 비록 아하스 자신은 악한 왕이었지만 여호와께서는 다윗 왕조의 몰락을 허락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지 않으셨다(참조 창 49:10; 삼하 7:12, 13). 따라서 침략자들을 물리치고 유다를 보존하고자 하시는 여호와의 의지를 왕에게 알리도록 이사야가 보내심을 받았다.

7:4 종용하라…두려워 말며.

 하늘에 계신 여호와께서 도우신다면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 왕은 하나님 신뢰하기를 거절하였으며, 그 결과 자신이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모르는 상황이 닥쳤을 때 그는 자포자기하고 말았다.

7:4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

 모욕적인 표현. 겉보기엔 강력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힘이 빠져 쇠약해진 이스라엘과 아람 그리고 그 왕들은 타다가 남아서 연기 나는 부지깽이들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다 타버리고 남은 것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불빛이 한 번만 더 반짝이고 나면 그들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말 처지에 있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아하스가 이스라엘이나 아람과 관련해서 지혜로운 정책을 펼치도록 지금 그 나라들이 맞이할 운명을 예언하고 계신다. 아하스가 염두에 두어야만 할 것은 힘을 잃어 가는 아람이나 이스라엘이 아니라 떠오르는 세력인 앗수르였다. 이어지는 40~50년 동안 유다는 앗수르에게 거의 삼킨 바 되었지만, 아하스는 불가피하게 앗수르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정책을 추구하고 있었다.

7:6 유다를 쳐서.

 그들의 계획은 유다를 정복하여 그 땅을 점거하는 것이었다.

7:6 세워 왕을 삼자.

 그들은 아하스를 폐하여 다윗 왕조를 몰락시키고 새 왕으로 “다브엘의 아들”을 보좌에 앉히고자 하였다. 이 새 왕의 신원은 알 수 없지만 “다브엘”이라는 이름이 “선한 신”이라는 의미를 지닌 아람어인 것으로 보아 그가 아람 사람이었던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스라엘과 아람은 다윗의 보좌에 새로운 꼭두각시 군주를 앉히기로 서로 합의하였다.

7:7 이 도모가 서지 못하며.

 다윗의 가문은 몰락하지 않을 것이었다. 이스라엘과 아람이 세운 계획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 집에 대하여 다른 계획을 갖고 계셨다(참조 창 49:10; 삼하 7:12). 그는 사람들이 유다에 대한 자기의 목적을 방해하거나 메시야가 나오실 그 왕조를 몰락시키도록 허락지 않으실 것이었다.

7:8 육십오 년 내에.

 이 예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치 않다. 이 주석에서 임시로 채택하고 있는 왕들의 연대기(참조 제3권, 107; 제4권, 76, 77; 왕상 6:1 주석)에 따르면 이 예언은 BC 734년경에 선포된 예언이다. 또한 그 어떤 연대기도 아하스가 742년 이전에 즉위했을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722년에 사마리아가 앗수르에 의해 함락됨으로 역사를 마감하였다. 현대 학자들 중에는 이 구절이 후대의 어떤 사람에 의해 삽입된 것으로 단정짓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이 말이 8절과 9절 사이의 사상의 흐름을 가로막고 있음을 지적한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이 같은 삽입이 이루어진 것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

  65라는 숫자가 이사야서의 원문에 없었다고 생각할 만한 어떤 결정적인 이유도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이 수가 원문에 있었다는 추정 하에 이 예언의 성취에 대한 두 가지 가능한 해석이 제기되었다. 734년부터 65년 후는 670년으로 당시는 엘살핫돈(681~669년)이 앗수르를 다스리던 때였다. 엘살핫돈(또한 그 다음에는 그의 후계자인 아슈르바니팔[성경에서는 오스납발])은 한 무리의 메소보다미아 사람들을 이전 북방 왕국의 영토로 이주시켰다(스 4:2~10). 이 일은 이스라엘이 한 국가로서 종말을 고하고 나서(BC 723/722년)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자신의 지배 하에 있는 민족들을 사방으로 흩어버린 앗수르의 정책은 그들이 이전에 가지고 있던 민족적 동질감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말살하기 위하여 고안되었다. 따라서 열 지파에 속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이 종종 “버림받은” 민족들로 일컬어 왔던 주변의 주민들 속에 흡수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들 중 얼마가 유다 사람들이 사로잡혀 갈 때 함께 사로잡혀 가서 바벨로 유수 이후에 그들과 함께 돌아왔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이전 유다 왕국의 후신인 유다 공통체의 일원으로 돌아왔을 뿐, 그들이 이스라엘 왕국의 후신이 된 것은 아니었다. 

  제기된 해석들 중 다른 하나는, 65년이라는 기간이 웃시야 또는 여로보암 II세의 치세에 지진이 발생했던 때를 전후해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 지진은 아모스가 언급한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의 표였다. 만일 그렇다면 이사야는 여기에서 단순히 723/722년에 있을 사마리아의 함락을 일컫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해석은 가능성은 있지만 입증하기는 불가능한 해석이다. 이는 지진이 발생한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65년이라는 기간의 명확한 기산점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오늘날 이 예언의 의미를 확정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필요하지도 않다. 아마도 이 같은 구체적인 예언이 이 예언이 주어진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매우 명확하고 의미심장했을 것이다. 이 예언에 대한 이해가 우리보다는 그들에게 훨씬 더 중요하였음이 분명하다.

7:9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아하스가 베가와 르신이 자신들의 도모를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보증의 말씀을 믿지 않았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는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며(히 11:6), 또한 그분의 지혜롭고 자비로운 지도력에 자신을 맡길 수도 없다.

7: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하나님께서는 아하스의 믿음을 키워 주시기 위하여 이 같은 제안을 하셨다. 연약한 자들과 편견이 있는 자들에게 확고한 믿음을 심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종종 이 같은 징조들이 주어진다.

7:11 깊은 데서든지…구하라.

 마소라 본문을 기록한 사람들(참조 제1권, 35, 36)은 자음으로 된 히브리어 본문 h‘mq s∨’lh가 하에메크 셔알라(ha‘emeq s∨e’alah)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 구절은 문자적으로 “깊은 데서 구하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70인역」의 후기 개정판들과 헬라어 번역자들은 마소라 본문이 만들어지기 수 세기 전에 h‘mq s∨’lh를 “스올(Sheol)의 깊은 곳으로”라는 의미를 지닌 하에메크 셔올라(ha‘emeq s∨e’olah)로 여겼다. 히브리어에서 이 단어들의 문법적 조화 측면에서는 “스올의 깊은 곳에서”가 더 선호되긴 하지만, 그럴지라도 이 둘 중 어느 것이 옳은지를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스올의 의미에 대해서는 삼하 12:23; 22:6; 잠 15:11 주석을 참조하라. 하늘의 높이와 스올의 깊이를 대조한 다른 실례들에 대해서는 신 32:22; 욥 11:8; 시 86:13; 139:8을 참조하라.

7:12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아하스는 믿기를 거절하였다. 그는 믿기를 원치 않았으며, 또한 자신이 믿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어떤 것도 원치 않았다. 그는 그의 정책을 이미 확정하였으며, 그 정책을 추진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무엇이든 그에게 자신의 정책을 바꾸도록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두려워하였다. 그가 얻고 싶은 도움은 하나님이 아닌 앗수르의 도움이었다.

7:12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즉 징조를 구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시험치 않겠다는 의미임. 아하스는 이를 통해서 자신의 완고함과 하나님께 대한 그의 반역의 정신을 드러내었다. 하나님이 그를 도우며 지도하시겠다고 제안하셨지만 그는 하나님 대신에 그 도움을 앗수르에 의존하기로 선택하였다. 아하스는 하나님과는 어떤 일도 함께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으며, 또한 이 같은 사실을 명백히 드러내 보였다.

7:14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아하스 자신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로부터 그에게 한 징조가 주어질 것이었다. 하지만 이 징조는 그가 선택한 징조가 아닌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징조가 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다가올 위기의 때에도 여전히 자신들의 신실함을 유지하며 살아갈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하여 그가 그들과 함께하실 것임을 보증하는 말씀을 주시는 것을 적절한 것으로 여기셨다. “남은 무리가 돌아오다”라는 의미의 스알야숩이라는 이사야의 첫째 아들의 이름(참조 3절 주석; 8:18)이 그 나라에 이 같은 징조로 주어져 있었다. 그를 볼 때마다 사람들은 다가올 앗수르의 침공 시에 한 남은 무리가 구원받게 될 것임을 생각하였다.

7:14 징조.

 히브리어 오트(’ot), “징조”, “표”, “기호”, “생각나게 하는 사람(것).” 구약에서는 오트가 기적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본질적으로 오트는 언약의 무지개(창 9:12), 안식일(출 31:31; 겔 20:12, 20), 문설주에 뿌려진 유월절 양의 피(출 12:13),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향로(민 16:38) 등 중요한 영적 진리를 생각나게 하는 가시적인 것들이었다. 애굽에서의 “표징들”(출 4:8; 7:3; 신 4:34 등), 기드온(삿 6:17)과 히스기야(왕하 20:8, 9; 사 38:7, 8)에게 주신 표징들은 협력을 이끌어 내고 믿음을 증진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진 기적적인 징표들이었다. “징조”는 언제나 예외 없이 영감의 말씀이 그것과 연결시키고 있는 영적 진리 혹은 예언적 기별을 확증하거나 생각나게 하기 위한 어떤 사물이나 사건으로 이루어졌다. 거기에는 기적적인 요소가 포함될 수도 있고 포함되지 않을 수도 있다. “징조”의 핵심은 그것을 받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들의 눈으로 그것을 봄으로 믿음의 눈이 떠져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분의 약속들을 굳게 붙잡도록 하는 데 있다. 지금 하나님께서 아하스에게 그렇게 하도록 요청하시는 것처럼(사 7:11) 어떤 사람이 “징조”를 요구했을 때든지 혹은 하나님께서 직접 “징조”를 선택하셨을 때든지, 어떤 경우든 상관없이 “징조”는 항상 그것이 주어지는 사람들의 눈에 실제로 보이도록 주어졌다. 

  이와 관련해서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사 8:18)고 한 이사야의 선언을 주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선언은 그것이 7:14에 약속된 “징조”와 동일한 예언적 절차를 통해서 주어졌다는 사실에서 그 중요성이 명료하게 드러난다. 각각 “여호와가 구원하시리라”, “남은 무리가 돌아올 것이다”, “약탈을 신속히 하고, 전리품을 재촉하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들인 이사야, 스알야숩, 마헬살랄하스바스는 모두 여러 차례에 걸쳐서 있을 임박한 앗수르의 유다 침공과 관련된 다가올 사건들에 대하여 웅변적으로 말하였다. 이사야와 그의 아들들은 하나님께서 북방 왕국인 이스라엘이 몰락하고 사로잡힘을 당하던 그 위기의 때에 가능하다면 아하스와 유다의 협력을 얻어내고자 고안해 내신 “징조들”이었다.

7:14 너희.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이 단어가 복수로 되어 있다. 13절에 비춰볼 때 여기서 “너희”는 “다윗의 집”, 곧 지금 아하스가 살아 있는 대표자로 있는 유다의 왕족을 일컫는다. 또한 1, 2절에 근거해 볼 때 “다윗의 집”이라는 표현은 아하스 자신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14절의 복수명사 “너희”를 오늘날 편집자가 쓰는 “우리”라는 용어에 필적하는 표현의 한 형태로 여기며, 또한 이에 근거하여 그 “징조”가 “다윗의 집”의 살아 있는 대표자이며, 유다의 왕과 지도자로서의 자격을 갖춘 아하스에게 개인적으로 주어진 징조였다고 결론짓는다. 또한 복수명사 “너희”가 아하스와 다윗의 보좌에 오른 그의 후계자들을 함께 일컫는다는 견해를 피력하는 사람들도 있다.

7:14 처녀.

 히브리어 알마(‘almah). 이 단어는 단수와 복수 모두 합하여 구약에 9회밖에 나오지 않는데(창 24:43; 출 2:8; 대상 15:20; 시 46편의 표제; 68:25; 잠 30:19; 아 1:3; 6:8; 사 7:14), 이 중에 문맥을 통해서 이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곳은 한군데도 없다. 이 불확실성이 서로 다른 두 견해, 곧 알마를 “처녀”로 번역해야 한다는 견해와 “젊은 여자”로 번역해야 한다는 견해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단어가 이 둘 중 오직 하나만을 의미하는 것임을 증명하기 위한 깊이 있는 연구들이 진행되어 왔다. 하지만 각 방향에 대한 이 연구들로 인해 한층 두터워진 증거들도 모든 히브리어 학자들을 납득시키기에는 충분하지 못하였다. 히브리어 사전 편찬자들은 알마가 “[성적으로] 성숙하다”라는 의미의 알람(‘alam)이라는 어원에서 파생되었다는 것과 알마라는 단어가 임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의미의 “젊은 여자”를 나타낸다는 것에 동의한다. 알마와 이 단어의 남성형인 엘렘(‘elem)은 둘 모두 육체적으로 성숙한 상태를 의미함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단어들이 동정이나 처녀성을 의미하는지 혹은 결혼한 상태를 나타내는지에 대해 어떤 확실한 증거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아 6:8, 9에서 알라모트(‘alamot[알마의 복수형]. 「개역한글판」에는 “시녀”-역자 주)가 “완전한” 젊은 여인과는 대조적으로 “왕후”나 “비빈”과 같은 부류로 구분된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히브리어 본문에 근거해 보면 사 7:14의 알마는 이미 임신한 경험이 있는 여자일 수도 있다(아래 “잉태하여”에 관한 주석을 참조하라). 만일 이사야가 이 말을 할 당시에 그녀가 아직 처녀였다면 우리는 예수의 경우와 유사한 또 하나의 기적적인 출생에 직면하게 된다. 이 같은 경우에는 매우 심오한 신학적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더 상세한 논의를 보려면 성경 해석의 제문제(Problems in Bible Translation), 152~157을 참조하라.

  명확하게 처녀성을 묘사하고 있는 히브리어 단어는 브툴라(betulah)이다. 이 단어는 구약에 50회 등장하는데, “처녀” 외에는 다른 어떤 의미로도 쓰이지 않았다. 성경에서 브툴라는 남자들과 가까이 한 적이 없는 결혼 가능한 여자를 뜻한다. 대개 젊은 여자를 가리키지만 실제로는 젊고 늙음에 상관이 없다. 알마라는 단어가 브툴라나 여기에서 파생된 다른 단어들처럼 처녀성과 관련해서 쓰인 경우는 한 번도 없다. 브툴라는 이에 상응하는 남성 명사는 없지만 “최고의 젊은이”, “뛰어난 젊은이” 등과 같은 의미를 지닌 바후르(bah.ur)라는 단어와 짝을 이루어 사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엘렘과 알마가 육체적인 성숙을 의미하듯이 바후르와 브툴라는 히브리 사회에서 최고의 이상적인 젊은 남녀를 묘사한다. 도덕적 순결과 처녀성이 명백히 언급될 때는 예외 없이 언제나 바후르와 브툴라가 쓰인다. 이 같은 경우에 엘렘 및 알마와 쓰인 경우는 한 번도 없다.

  이사야는 “청년(바후르)이 처녀(브툴라)와 결혼함같이”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기뻐하신다고 말한다(사 62:5). “정결한 처녀”(파르쎄노스[parthenos], 고후 11:2)인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시온이 왕하 19:21; 사 37:22; 62:5; 렘 14:17; 31:4; 애 1:15 등에서 한 번도 알마로는 일컬어지지 않고 항상 브툴라로만 일컬어진 데에는 매우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실제로 하나님의 백성이 표상적으로 알마로 일컬어진 적은 한 번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브툴라로 적절히 묘사된 교회보다 못한 교회에 대해서는 만족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나이에는 별 관심이 없고 오직 품성에만 관심이 있으시다. 이사야는 브툴라라는 단어를 모두 다섯 번 사용하였다(23:4, 12; 37:22; 47:1; 62:5). 만일 그가 7:14의 “젊은 여자”가 엄격한 의미의 “처녀”로 이해되기를 바랐다면, 논리적으로 볼 때 그가 여기서도 필시 브툴라를 사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태는 사 7:14을 인용하면서 엄격히 “처녀”만을 의미하는 파르쎄노스(parthenos)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그가 그렇게 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마 1:23 주석을 참조하라.

  사 7:14절의 문맥과 “징조”와 “처녀”로 번역된 단어들과 관련된 전술한 사실에 근거해 볼 때 여기에 언급된 예언은 이 장에 설명되어 있는 역사적 상황의 틀 안에서 머지않아 성취될 예언임이 분명하다. 마태가 이 예언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예언이 또한 장차 오실 메시야를 가리키고 있음도 분명하다. 구약에는 이 예언처럼 일차적으로는 머지 않은 장래에 적용되고, 그 다음에는 먼 장래에 적용되는 이중 적용 예언이 많이 있다(참조 신 18:15 주석).

  7장의 이야기에서 이사야가 여기서 언급하는 것 말고는 이 “젊은 여자”의 신원에 대하여 더 언급된 것은 없다. 하지만 히브리어 본문에는 그녀가 어떤 특정한 젊은 여자를 가리키는 “그 젊은 여자”로 언급되어 있다. 하지만 그 여자가 당시에 현존했던 인물이었는지의 여부, 또한 아하스나 이사야가 당시에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는지의 여부 등은 확실히 알 수 없다(참조 Gesenius, Hebrew Grammar, § 126. “사자”가 히브리어로는 “그 사자” 곧 도망가는 사람을 쫓는 특정한 사자로 되어 있는 암 5:19도 참조하라). 어떤 사람들은 14절에 언급된 “젊은 여자”의 신원에 대하여 7장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에 근거해서 이 예언은 우리는 알지 못하나 아하스와 이사야는 잘 알고 있던 한 사람을 통해서 성취된 예언이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또한 이사야 시대에 이 예언이 실제로 성취되기 위해서는 약속된 아들의 어머니, 곧 마리아같이 엄격한 의미의 처녀가 있어야만 했다는 견해를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같은 견해는, “징조”는 본질상 기적적인 것이어야만 하며 알마(‘almah)라는 단어는 단순히 “젊은 여자”가 아닌 반드시 엄격한 의미의 “처녀”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확신에 근거한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기를 원하신다면 그는 얼마든지 이 일을 가능케 하실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아이는 그리스도처럼 신성과 인성의 연합을 나타내는 아이가 되어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겸비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유일무이한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

  아하스가 당시에 스물한 살밖에 되지 않은 젊은 청년이었다는 사실에 비추어(왕하 16:1, 2; 참조 제3권, 107) 이 특정한 “젊은 여자”가 그의 아내였거나, 아니면 당시에 왕의 주변에 현존하던 어떤 다른 젊은 여자였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와는 달리 이사야가 여기에서 자신이 아하스 왕을 만나러 갈 때 그와 동행했을 가능성이 있는 8:3에 나오는 “그 여선지자”(「개역한글판」에는 “내 아내”-역자 주)인 자신의 아내를 일컫고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는 사람들도 있다(참조 8:3 주석). 이 일이 이사야의 사역 초기에 있었으며, 이 일 후에도 선지자로서의 그의 사역이 반세기 혹은 그 이상 계속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해 볼 때(선지자와 왕, 382; 참조 1:1; 6:1) 이사야 자신이 그때에 젊은 청년이었음이 분명하며, 따라서 당시에 그의 아내가 “그 젊은 여자”로 일컬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7:14 잉태하여.

 히브리어 동사는 완료시제로 되어 있다. 이는 대개 완결된 행위를 나타내기 때문에 “잉태하였다”로 번역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선지자들은 장차 있을 행위를 나타내는데 종종 완료시제를 사용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예언이 분명히 성취될 것임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미래의 사건을 이미 성취된 사건처럼 이야기하였다(참조 제1권, 25, 26). 이에 기초해 볼 때, 이 단어는 “잉태할 것이다”로 번역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어떤 번역이 영감의 말씀이 의도하고 있는 바를 더 정확하게 반영하는지 확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이 히브리어 단어에 대한 가장 자연스런 해석은 이사야가 이 말을 할 당시에 징조가 될 아이가 이미 잉태된 상태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라는 견해를 지니고 있다. 이 견해는 14절에서의 시제의 일치와도 조화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 젊은 여자”가 아하스의 아내 혹은 왕족 중에 한 사람인 다른 젊은 여자였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예언이 아하스에게 주어진 “징조”였으며, 아마도 이사야는 그 아이가 잉태된 것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며, 또한 이 두 사람 모두 당시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성(性)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하지만 “징조”가 반드시 기적적인 특성을 지녀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14절 “징조”에 관한 주석을 참조하라).

7:14 임마누엘.

 히브리어 임마누 엘(‘Immanu ’El). 문자적으로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곧 문맥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우리를 우리의 원수들에게서 건져내신다는 의미이다. 이 이름의 메시야적 의미에 대해서는 마 1:23 주석을 참조하라. 유다가 북방 왕국과 함께 멸망하지 않을 것임을 가리키는 “여호와가 [유다를] 구원하시리라”라는 의미의 이사야와 “남은 무리가 돌아올 것이다”라는 의미의 스알야숩(3절), 그리고 “약탈을 신속히 하고 전리품을 재촉하라”라는 의미의 마헬살랄하스바스처럼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당시에 또한 더 본질적으로는 곧 발생할 사건들과 관련해서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나타내 보여 주는 하나님 자신이 정하신 하나의 징조로서의 이름이었다. 더 상세한 설명은 8:1~3, 8, 10 주석을 참조하라. 임마누엘이라는 징조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인도하고 보호하고 복 주시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하실 것임을 증언하게 될 것이었다. 다른 나라들이 패하여 몰락할 때에도 유다는 여전히 보존될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에도 유다는 살아남을 것이었다. 산헤립이 유다 땅을 쳐서 그 나라를 멸하려고 왔을 때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는 임마누엘과 관련된 이사야의 말에서 확신과 용기의 근원을 찾아냈음이 분명하다. 히스기야는 예루살렘 사람들의 용기를 북돋우어 주기 위한 자신의 기별에서 그들에게 “우리와 함께하시는 자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왕하 32:7, 8)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7:14 하리라.

 “네가…로 부를 것이다”라고 되어 있는 필사본들도 많이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히브리어 본문에는 문자적으로 “그녀가…로 부를 것이다”로 되어 있다. 전자에 따르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 아이는 왕족의 일원이 될 것이었으며, 또한 아하스의 아내나 아니면 아하스가 그 자손의 이름을 지을 권위를 지닌 다른 한 젊은 여자가 그 아이의 어머니가 될 것이었다. 하지만 이보다는 “그녀가…로 부를 것이다”가 더 정확한 독법일 것으로 여겨진다.

7:15 그가…알 때에.

 문자적으로는 “그의 아는 것에(히브리어 르[le]).” 이는 곧 “그가 알 때에”라는 뜻이다. 전치사 르는 “저물 때에”(창 24:63), “서늘할 때에”(창 3:8), “저녁때에”(창 8:11), “출전할 때”(삼하 11:1) 등에서도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임마누엘이라 불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만큼 충분히 자랐을 때에 그는 “버터와 꿀”을 먹게 될 것이다. 이것이 아이가 맛을 알기 시작하는 2, 3세 때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도덕적 판단력이 충분히 발달되는 12세경을 가리키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당시로부터 2, 3년이 지나면 BC 732년이 되고, 12년이 지나면 722년경이 된다(참조 사 7:1 주석). 732년에는 다메섹이 멸망하였고, 그로부터 10년 후에는 사마리아가 멸망하였다. 당시에 포로로 잡혀가지 않고 남아 있던 소수의 사람들은 그 황무한 땅에서(참조 17~20, 23~25절 주석) 풍성한 식물을 발견하게 될 것이었다(참조 21, 22절 주석). 참조 8:4 주석.

7:15 버터와 꿀.

 성경 시대의 “버터”는 응고된 우유였다.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동방의 여러 지역들에서 진미로 여겨지고 있는 식품이다(참조 출 3:17; 삿 5:25).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곧 풍요로운 땅이었다. 따라서 여기에서 응고된 우유와 꿀을 먹는다고 하는 것은 곧 식물이 풍성함을 나타낸다. 그 땅은 황무하게 될 것이었지만, 그럴지라도 앗수르의 침공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 땅에 남아 있을 소수의 사람들은 충분한 양의 식물을 소유하게 될 것이었다(사 7:22).

7:16 대저.

 히브리어 키(ki). 어떤 사람들은 16절의 “아이”가 3절의 “아들 스알야숩”이라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연결사는 이 “아이”가 14, 15절의 “아들”과 동일한 인물임을 보여 준다. 키(ki)라는 단어는 16절을 그 바로 앞에 나온 구절과 분리될 수 없게 만든다. 게다가 16절의 “아이”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 “그”(「개역한글판」에는 “이”-역자 주)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아이는 바로 직전에 언급된 아이(이 경우에는 임마누엘)로 이해해야 한다.

7:16 알기 전에.

 참조 15절 주석.

7:16 두 왕의 땅이 폐한 바 되리라.

 이사야는 아하스에게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한 르신과 베가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고한 바 있다(4절). 이제 그는 곧 태어날 아이가 두 살도 채 되기 전에 이 왕들이 보좌를 잃어버릴 것이라고 선언한다. 만일 아하스가 736/735년에 왕위에 올랐다면 이사야와 나눈 이 대담은 735년 말이나 734년 초에 있었던 일이 된다.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 III세는 735년에 아르메니아 지역의 우라르투(Urartu) 원정에 참여하였으며, 734년에는 팔레스타인을 그리고 732년에는 다메섹을 공격하였다(참조 제3권, 78). 앗수르는 북서아시아 전체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해 잔악한 노력을 감행하였다. 베가와 르신은 그들의 반앗수르 출정에서 아하스에 대하여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였는데, 이는 그가 이미 디글랏 빌레셀과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왕하 16:5~7). 만일 유다의 지도자들이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이름 가운데 함축되어 있는 약속을 신뢰하기만 하였다면 그 나라는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징조로서 주어진 임마누엘이라는 아이가 두 살 경이 되면 베가와 르신의 치세는 그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었다. 그 일은 732년, 곧 디글랏 빌레셀이 다메섹과 전쟁을 벌인 두 해 중 두 번째 해에 일어날 것이었다. 이 예언이 성취될 시기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예언하고 있는 사 8:3, 4과 비교해 보라. 참조 왕하 15:30; 16:9.

7:17 여호와께서…임하게 하시리니.

 아하스는 이미 자신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 대신에 그는 앗수르를 의지하고자 계획한다(왕하 16:5~7). 하지만 이사야는 그에게 앗수르가 유다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리려 고통의 원인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사 7:17~20; 8:7, 8; 10:6). 후에 앗수르가 유다를 침공할 때 유다가 애굽에게 도움을 청할 것이나 이 역시 헛된 일임이 드러나게 될 것이었다(30:1~3; 31:1~3, 8). 선지자는 지금 아하스에게 이 모든 일을 명백히 가르쳐 주고자 애쓰고 있다.

7:17 앗수르 왕.

 암흑과 위기의 날들이 유다 앞에 놓여 있었다. 이날들은 두 세기 전 여로보암이 반역을 일으킨 이후로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고통의 날들이 될 것이었다. 앗수르 왕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유다도 침공할 것이었다. 만일 유다가 여호와께로 돌아섰다면 그가 유다에게 복을 베푸셨을 것이며, 또한 앗수르 사람들이 그 땅을 치러오도록 허락치 않으셨을 것이었다. 이사야는 왕과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전력으로 노력하였지만 그들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앗수르가 그 땅을 침공하도록 허락하실 것이었다.

7:18 파리[를]…부르시리니.

 문자적으로는 “휘파람으로 파리를 부르다.” 이는 곧 멀리 떨어져 있는 애굽 군대를 호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애굽 제24왕조의 치세는 750~715년경이었다. 하지만 이 왕조의 치세에 누비아(Nubia)의 강력한 추장 중 한 사람인 피안키(Piankhi)가 또 하나의 왕조를 세워서 마침내 그의 지배권을 애굽의 남부까지 확장하였다. 이 에디오피아계의 25왕조는 715년경부터 663년경까지 애굽을 통치하였다. 산헤립이 유다를 치러 왔을 때(아마도 그의 두 번째 유다 침공 때[참조 제3권, 87, 88]) 25왕조의 네 번째 왕(참조 제3권, 72, 73, 107)인 디르하가(Taharka. 참조 제3권, 72, 73, 87, 88; 왕하 18:13; 19:9 주석)가 앗수르군의 진군을 위협하였다(참조 왕하 19:9; 사 37:9). 유다 백성 중 상당수가 애굽이 자신들을 앗수르로부터 건져내 줄 것으로 생각하고 그 나라를 의존하였던 듯이 보인다(왕하 18:21). 이 “에디오피아계”의 애굽 왕이 여기에서 “파리”로 불리는데, 이는 파리가 해충인 것처럼 애굽 사람들도 유다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성가신 존재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사야는 애굽에게 도움을 구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어리석음을 지적한다(사 30:1~7; 33:1~3). 유다를 앗수르로부터 건져내실 분은 애굽이 아닌 하나님이셨다(31:4~9; 37:33~36).

7:18 벌.

 앗수르가 벌에 비유된다. 여기서 벌은 끈질기고 무서운 적을 상징한다(신 1:44; 시 118:12). 벌침은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치명적인 경우는 거의 없다. 앗수르가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로서(사 10:5~7) 유다를 치러 오긴 하겠지만 그로 인해 유다가 멸망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7:19 다 와서.

 곤충들의 공격에 대한 비유가 계속 이어진다. 애굽 사람들과 앗수르 사람들이 파리와 벌처럼 그 땅으로 와서 그 나라를 침입할 것이었다.

7:20 그날에는.

 즉 그때에는. 선지자가 유다에서 벌어진 사건들의 추이에 관해서 더욱 상세히 이야기하고 있다.

7:20 하수 저편에서.

 유브라데강을 의미함(참조 수 24:2 주석). 앗수르는 회개치 않는 유다를 황무케 하고 또 그 오만함을 낮추기 위해 여호와께서 사용하시는 도구가 될 것이었다. 사 10:5~7에 사용된 이와 유사한 비유와 비교해 보라.

7:20 세내어 온 삭도.

 여기에서 비유가 바뀐다. 이사야는 이전에 유다를 그 몸에 성한 곳이 하나도 없는 병자에 비유한 적이 있다(1:5, 6). 지금은 이 나라가 수염을 포함해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의 모든 털을 다 깎이는 극도의 모욕을 당해 마땅한 사람에 비유되고 있다. 동방 사람들은 수염을 잃어버리는 것을 매우 큰 수치로 여겼다.

7:21 한 어린 암소.

 앗수르의 침공 시에 그 땅의 거의 모든 것이 약탈당할 것이었다. 산헤립은 자신이 “셀 수 없이 많은 크고 작은 가축들”을 취해 갔다고 주장한다. 앗수르 사람들이 말하는 “큰 가축”은 소를, “작은 가축”은 양과 염소를 의미한다. 비록 대부분의 가축들이 모두 끌려가고 없을지라도 이곳저곳에 흩어져서 남아 있을 개개인들은 어린 암소 한 마리와 양 두어 마리를 잘 지켰다가 키울 수 있게 될 것이었다.

7:22 그 내는 젖이 많으므로.

 하지만 여호와께서 그 땅에 남아 있게 될 남은 무리는 버리지 않으실 것이었다. 그들은 하늘이 내리는 복을 받아서 “버터와 꿀”을 먹게 될 것이었다. 비록 사람이 저주를 초래한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남은 무리에게 복을 내려 주실 것이었다. 참조 15절 주석.

7:23 은 일천 개.

 즉 은 1000세겔(참조 창 20:16 주석; 애 8:11). (「제임스왕역」에는 “은 일천 개의 가치 되는 일천 그루 포도나무가 있던 곳마다”-역자 주). 포도나무 한 그루의 값이 은 한 개라면 이는 매우 비싼 것이다. 따라서 이 포도나무들은 극상품이었음이 분명하다. 여기서는 최상의 포도원이 돌보는 사람이 없어서 황무한 땅으로 변해버린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포도원”이 저주를 받았을 때 그곳에서는 질려와 형극이 돋아났다(사 5:6).

7:24 살과 활을 가지고.

 사람들이 그 나라에서 한때는 잘 경작되던 땅이었지만 지금은 황무한 땅으로 변해 버린 지역들에 숨어 있는 맹수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다닐 것이었다. 혹은 사람들이 이 지역들에서 놀이 삼아 사냥을 할 것에 대한 묘사일 수도 있다.

7:25 질려와 형극.

 한때는 평화롭고 비옥했던 농장이 황무한 땅으로 변해 버릴 것이었는데, 이는 그 주인들과 관리인들이 다 포로로 잡혀가서 다시는 그들의 고향 땅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7:25 그리로 가지 못할 것이요.

 히브리어 본문에는 “네가 그리로 가지 못할 것이요”로 되어 있다.


참고자료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 제7권, 시조사.

- 「열린노트성경」, 아가페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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