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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STORY
이사야 9장 성경주석 본문
<이사야 9장 흐름정리>
전반부는 심판의 경고 후에 주시는 하나님의 소망의 메시지로서, 장차 평강의 나라를 세우고 공의로 영원히 다스리실 메시야의 탄생 예언이다. 그리고 후반부는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회개치 않는 북이스라엘이 결국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심판의 메시지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겸손히 행하는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시지만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는 그 집을 허무신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된다.
<이사야 9장 줄거리>
1.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분께서 건설하실 왕국으로 인해 고난 중에서도 큰 기쁨이 있을 것임.
8. 교만함으로 인해,
13. 완고함으로 인해 이스라엘에 임할 심판.
<이사야 9장 개역한글>
1.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4.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5.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묻은 복장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8. 주께서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시며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임하게 하셨은즉
9. 모든 백성 곧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거민이 알것이어늘 그들이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말하기를
10.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들이 찍혔으나 우리는 백향목으로 그것을 대신하리라 하도다
11.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르신의 대적을 일으켜 그를 치게 하시며 그 원수들을 격동시키시리니
12. 앞에는 아람 사람이요 뒤에는 블레셋 사람이라 그들이 그 입을 벌려 이스라엘을 삼키리라 그럴찌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13. 이 백성이 오히려 자기들을 치시는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도다
14.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하루 사이에 이스라엘 중에서 머리와 꼬리며 종려가지와 갈대를 끊으시리니
15. 머리는 곧 장로와 존귀한 자요 꼬리는 곧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라
16.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로 미혹케 하니 인도를 받는 자가 멸망을 당하는도다
17. 이 백성이 각기 설만하며 악을 행하며 입으로 망령되이 말하니 그러므로 주께서 그 장정을 기뻐 아니하시며 그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18. 대저 악행은 불 태우는것 같으니 곧 질려와 형극을 삼키며 빽빽한 수풀을 살라서 연기로 위로 올라가게 함과 같은 것이라
19. 만군의 여호와의 진노로 인하여 이 땅이 소화되리니 백성은 불에 타는 섶나무와 같을 것이라 사람이 그 형제를 아끼지 아니하며
20. 우편으로 움킬지라도 주리고 좌편으로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여 각각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21.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먹을 것이요 또 그들이 합하여 유다를 치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이사야 9장 성경주석>
9:1 흑암.
히브리 성경에는 9:1이 8:23로 되어 있다. 9:1~7은 8장 끝부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극도의 불행과 흑암의 광경을 묘사한다. 이사야 시대에는 앗수르 군대가 이스라엘 최북단에 위치한 두 지파인 스불론과 납달리에 불행과 “흑암”(9:2)을 가져 왔다. 이것이 영적인 흑암의 결과임을 깨닫고 이사야는 예언적 안목으로 사람의 영혼에 자리잡고 있는 흑암을 몰아낼(요 1:4~9; 8:12; 9:5) “큰 빛”(2, 6, 7절)을 기다린다. 한때 많은 고통을 겪었던 지역들이 영광과 빛의 계시를 보게 될 것이었다. 그것은 세상의 메시야가 생명과 희망의 기별을 가지고 오실 것을 묘사한다. 흑암의 장막에 덮여 있는 세상(참조 시대의 소망, 34, 35,)에 의의 태양이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할 것이다(말 4:2).
9:1 스불론.
이사야가 이 말씀을 기록하던 당시에 이스라엘 땅, 특별히 북쪽과 동쪽 경계지역의 땅들은 큰 고난 중에 있었는데, 이는 디글랏 빌레셀 III세가 그 나라를 침공해서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취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겨 갔기 때문이다(왕하 15:29).
9:1 해변길.
고대 세계에서는 큰 도로에 그것을 대표하는 이름이 붙여져 있었다(민 21:22; 신 1:2; 참조 민 20:17; 신 2:27 주석). 어떤 이들은 이 “해변길”을 다메섹에서 시작하여 요단 서편 갈릴리를 지나 지중해에 이르는 그 유명한 대상로(隊商路)와 동일시한다(참조 막 2:14 주석). 다른 이들은 “해변길”을 북쪽으로 두로 및 시돈과 연결된 해안도로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한다.
9:1 이방의 갈릴리.
왕하 15:29에 언급된 게데스는 갈릴리 지역에 위치해 있으며 도피성이었다(수 20:7; 21:32). 솔로몬 시대에 갈릴리지역이 두로까지 확장되었다(왕상 9:11). “갈릴리”라는 이름은 “원”(圓) 또는 “회전”이라는 의미이다. 신약 시대에 갈릴리는 전보다 좀 더 넓은 지역을 포함하게 되었다. 이 지역은 “이방의 갈릴리”로 불렸는데, 그 이유는 이곳에 늘 혼혈족들이 거주했고 단지 적은 수의 유대인들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지역은 다메섹과 유브라데, 메소보다미아와 연결되어 있었고 북쪽에 있는 두로, 소아시아, 유럽과 남쪽에 있는 사마리아, 유대, 애굽으로 연결된 길들을 통해 세계와 연결되어 있었다. 예수께서 인류를 위한 봉사사업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신 곳은 이처럼 온 세계와 연결돼 있는 바로 그 지역이었다.
9:1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문자적으로는 “더욱 무겁게 [만드시거나 여겨지도록] 하심.” 아마도 더 많이 생각하셔서 명예스럽게 하거나 영광스럽게 하시겠다는 의미인 것 같다. 2절에 나타난 “흑암”과 “빛”의 평행 대구에 비추어 1절에 있는 고통과 영화를 대조로 보아야 할 것 같다.
9:2 큰 빛.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깊은 흑암 속에 살던 갈릴리 백성들에게 갑자기 큰 빛이 비쳤다(참조 요 1:4~9). 선지자의 마음은 온 세상의 메시야의 강림으로 옮겨졌다. 이 말씀들은 그리스도께서 갈릴리 봉사를 시작함으로 성취되었다(참조 마 4:12~16 주석). BC 723/722년에 열 지파가 포로로 잡혀간 이후로 갈릴리는 메시야가 오실 때까지 다른 나라에 정복되었으며,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의 봉사도 없는 문자 그대로 암흑 가운데 처해 있었다.
9:3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제임스왕역」에는 “즐거움을 더하지 않으셨으니”-역자 주). 20개의 히브리어 필사본, 히브리어 난외주 독법, 「수리아역」 그리고 「타르굼」 등에는 로(lo) 대신 로(lo’) 즉 “아닌”(not) 대신 “그것에”(to it)로 되어 있는데, 그것이 문맥에 더 일치하는 듯하다. 선지자는 메시야가 백성들에게 와서 평화와 즐거움을 줌으로 더 밝고 행복해진 날에 대한 광경을 제시한다. 그들은 수적으로 증가할 것이며(참조 사 26:15; 겔 36:10, 11), 행복도 증가할 것이다.
9:3 추수하는 즐거움.
즉 농사짓는 지역에서 연중 가장 행복한 기간인 추수 때에 일꾼들이 누리는 기쁨과 같은 즐거움. 가을이 되면 히브리 사람들은 기쁨과 감사의 절기인 초막절을 맞이한다(참조 느 8:17). 그들이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심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빌 3:1; 4:4).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평화와 기쁨을 선포하기 위해 오셨다(사 61:3; 눅 2:13, 14).
9:4 멍에와…막대기를 꺾으시되.
그리스도는 죄의 사슬을 부서뜨리시고 무겁게 짓누르는 죄악과 근심의 짐으로부터 사람을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 오셨다(사 61:1, 2; 참조 눅 4:18, 19; 마 11:28~30 주석).
9:4 미디안의 날.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은 압제자들의 견디기 힘든 잦은 통치 아래 있다가 마침내 국가적인 영웅에 의해 자유를 되찾곤 했다(참조 제3권, 60~68). 기드온은 압제자로부터 영광스러운 승리를 얻었고 미디안의 세력을 물리쳤으며, 그의 백성들을 해방시켰다(삿 7:19~25).
9:5 싸우는.
이 광경은 투쟁과 피흘림, 소란함과 혼란 그리고 죽음을 보여 주지만 마침내 궁극적인 승리와 전쟁의 부스러기들을 태우는 모습을 나타낸다. 오랜 기간 지속된 의의 세력과 악의 세력 간의 전쟁은 메시야의 영원한 통치의 서곡인 아마겟돈 전쟁에서 그 정점에 이를 것이다(계 16:14, 16; 19:11~19; 참조 시 46:6~9; 76:2, 3; 사 63:1~6; 겔 38:21, 22; 39:9; 욜 3:11, 16; 슥 9:9, 10; 14:13).
9:6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이사야는 다가오는 평화로운 시대의 모습을 위대한 평화의 왕이 등장하는 놀라운 예언으로 마무리한다. 평화는 사람의 노력으로는 이 땅에서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는 오시는 왕을 묘사하면서 이 땅에 있는 그 어떤 통치자들에게도 붙여지지 않는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 언급된 표현들을 완전하고 적절하게 적용할 수 있는 분은 분명 한 분 외에는 없으며, 그분은 바로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세상의 구주와 오시는 왕을 묘사하는 데 그 사상의 높음과 표현의 아름다움 그리고 감정의 강렬함을 성경에서 이보다 더 잘 나타낸 곳을 찾을 수 없다. 이사야는 이 용어들을 기록할 때 영광의 주님에 대한 이상을 보았음이 틀림없다. 다른 구약의 기자들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손이 그 위에 있었으며 천사가 그의 펜을 지도하였다. 시 110편에서 그리스도는 오실 왕으로 제시되었는데, 그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 되실 분이며, 시 2편에서 그분은 철장으로 열방을 깨뜨릴 분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시 45편에서 그분은 위엄 있는 모습으로 말에 오르는 분으로 묘사된다.
9:6 정사.
그리스도는 온 하늘과 땅을 다스릴 것이다(참조 단 2:44, 45; 마 25:31; 28:18; 눅 1:32, 33; 고전 15:25; 시 110:1; 빌 2:10; 계 11:15).
9:6 기묘자라, 모사라.
또는 “기묘한 모사”(wonderful Counsellor, 참조 11:2, 3; 25:1; 28:29). 이 이름은 지혜로움, 친절함 그리고 사려 깊음을 표현한 것으로, 하늘과 땅과 온 우주의 모든 존재들의 환희와 경배와 찬양을 불러일으키는 이름이다.
9:6 전능하신 하나님.
성자인 예수는 성부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이다. 그는 영원부터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다(참조 시 90:2; 잠 8:22~30; 미 5:2; 요 1:1; 14:9, 11; 시대의 소망, 19).
9:6 영존하시는 아버지.
아버지 하나님이 영존하시는 것처럼 그리스도도 그러하다. 이사야가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이 모든 인류에게 특별한 의미에서 아버지 곧 사람과 세상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요 1:3; 엡 3:9; 골 1:16; 히 1:2; 창 1:26). “아버지”라는 말 이외의 어떤 단어도 자녀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관심을 그렇게 충만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그리스도가 통치할 때 그분의 백성을 아버지처럼 통치할 것이다(사 22:21, 22; 참조 계 3:7).
9:6 평강의 왕.
참조 슥 9:9, 10; 엡 2:14. 평강은 반드시 의로움과 함께 오며(사 32:17, 18),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그분 자신의 의를 입혀 주고 나눠 주는 의로운 왕이다(렘 23:5, 6; 33:15, 16). 그분은 세상에 평강을 가져다주기 위해 오셨다(눅 2:14; 요 14:27; 참조 빌 4:7).
9:7 그 정사.
다니엘은 그리스도의 왕국이 지상의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고 예언한다(단 2:44; 참조 계 11:15). 가브리엘 천사는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고 선언하였다(눅 1:33).
9:7 다윗의 위.
다윗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다윗의 위가 영원히 서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창 49:10; 삼하 7:11~13; 시 89:3, 4, 29, 36; 132:11, 12; 렘 23:5; 33:17; 눅 1:32; 참조 신 18:15; 대상 28:7; 마 1:1 주석).
9:7 공평과 정의로.
참조 11:4, 5; 16:5.
9:7 열심.
왜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행하시려고 하는가? 거룩한 열정이 그분을 움직였으며 사랑의 영이 그분을 재촉하였다. 게으를 수 없는 사랑이 그분의 것이며, 죄로 인해 잃어버린 인간들을 생각할 때면 은혜와 영광의 과업으로 나가도록 하는 사랑이 그분의 것이다. 사랑보다 더 강력한 힘은 없으며, 사람을 이보다 더 큰 희생 또는 영웅적인 수고를 아끼지 않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아의 봉사 정신으로, “공평과 정의로” 통치하도록 그리스도를 이끈 동인(動因)은 모든 것을 끌어안으시는 그분의 사랑이다.
9:8 야곱에게.
문맥(9~17절)이 보여 주는 것처럼, 이어지는 기별은 하나님의 심판의 전조가 된다는 의미에서 “야곱을 치는” 내용이다. 이 구절은 10:4까지 이어지는 새로운 문단의 시작이며, 이 문단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나라를 견책하신다. 영광 가운데서 통치하실 왕에 관한 이상이 끝나고 선지자는 그의 관심을 긴급한 현 상황의 문제들로 돌린다. 시대는 전 장들과 동일한 시기로서, 아람의 르신이 여전히 살아 있는 것으로 보아(11절), 그 기별은 BC 735년과 르신이 죽은 732년 사이에 전파되었음에 틀림없다.
9:8 이스라엘에게.
8절에 야곱과 이스라엘이 함께 언급된다. 9:8~10:4의 기별은 일반적으로 에브라임 또는 사마리아로 언급된(9:9, 21) 배도한 열 지파에게 우선적으로 향하고 있다. 14절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용어는 거의 확실하게 북쪽 나라를 지칭한다. 8절에 나오는 이스라엘은 북쪽 나라 즉 이스라엘을, 야곱은 유다를 지칭하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기별을 유다와 이스라엘 모두에게 보내셨음을 의미하는 말이 된다. 그렇지만 이사야는 좀 더 포괄적인 의미에서 야곱과 이스라엘이라는 용어를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든 백성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하곤 한다(참조 10:20~22; 27:6; 29:23; 40:27; 41:8, 14; 13:1, 22, 28; 44:5; 46:3; 48:1, 12; 49:6). 북방 왕국이 최종적으로 멸망한 후부터 이 두 용어는 일반적으로 유다를 의미했다.
9:9 에브라임.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침공하려는 에브라임과 아람의 계획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보증을 주셨다(7:4~7). 그들은 이미 어느 정도 실패를 경험했지만 이스라엘의 베가는 유다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기로 여전히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9:9 완악한 마음.
패역과 거만함 속에서 베가는 이사야를 통해 주신 기별을 거부하고 오히려 아하스를 치려는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9:10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고.
여기에서 이사야는 실패로 돌아갔던 베가의 초창기 노력과 그것을 만회하고자 하는 그의 계획을 언급한다(참조 7:1). 베가가 하려는 일은 벽돌건물이 무너진 다음에 벽돌 대신 돌로써 다시 지으려고 하고, 찍혀진 “뽕나무”(참조 눅 17:6; 19:4 주석) 대신 더 비싸고 튼튼한 백향목을 사용하려는 것(참조 왕상 10:27)과 같은 것이다. 그는 자신의 패역과 하늘의 뜻에 대한 공개적인 반항을 드러내고 있다.
9:11 대적.
하나님께서는 르신의 대적인 앗수르인들을 이스라엘에 보내실 것이다. 르신에 대한 디글랏 빌레셀의 조치에 대해서는 왕하 15:29을 참조하라.
9:12 아람.
이 당시에 아람은 유다를 대적하기 위해 에브라임과 동맹 관계를 맺었다(7:1, 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람 사람들이 결국 자신들의 오랜 원수였던 이스라엘을 배반할 것이라고 단언하셨다. 동방에 있는 나라들 사이의 동맹은 매우 일시적이어서 오늘의 동맹 관계가 내일은 철저한 적대 관계로 변할 수 있었다. 아람은 북쪽과 동쪽에서 이스라엘을 공격할 것이며, 블레셋은 남쪽과 서쪽에서 올 것이다. 히브리인들은 동쪽을 바라보는 상태에서 방향을 정한다(참조 창 29:1; 출 3:1; 민 3:23 주석). 따라서 아람인들은 “앞”에, 블레셋은 “뒤”에 있었다.
9:12 여전히 펴지리라.
출 7:19; 8:5; 사 5:25과 비교하라. 그곳에는 같은 표현이 또 다른 심판들과 연관되어 있다. 여호와께서는 심판을 통해 이스라엘을 치셨으나 그분의 손은 그 나라에 더 큰 심판을 임하게 하시려는 듯 여전히 펴져 있었다. 디글랏 빌레셀 III세가 이스라엘의 넓은 영토를 빼앗기는 하였으나 그 나라를 멸망시키지는 않았다. 아직도 살만에셀 V세의 포위공격이 남아 있었는데 그것으로 그 나라에 멸망이 이를 것이었다.
9:13 치시는.
1:5, 6과 비교하라.
9:13 돌아오지 아니하며.
하나님께서 심판을 발하신 것은 멸망시키려 함이 아니라 회개케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책망의 기별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들의 악하고 패역한 행실을 계속했다. 그러므로 추가적으로 좀 더 가혹한 심판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9:14 이스라엘 중에서…끊으시리니.
이스라엘이 회개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는 더 큰 심판, 곧 그들에게서 “머리와 꼬리”(참조 13절 주석)를 끊으시는 일을 행하실 수밖에 없으셨다. 특별히 나라를 배도의 길로 인도한 사람들에게 임할 큰 심판으로(참조 16절) 그 나라는 궁극적으로 멸망할 것이었다.
9:14 종려가지와 갈대.
“종려가지”는 위엄 있는 모습을 지닌 종려나무 가지를 가리키는 것 같은데, 그 나라의 귀족들과 관료들에 해당한다. “갈대”는 고통받고 있는 하류층 거민들(58:5)이거나, 9:14, 15에 비추어 볼 때 거짓 선지자들을 의미하는 듯하다.
9:15 장로.
참조 3:2, 3. 왕들, 재판관들, 공직자들 그리고 군대장관들은 나라의 중요한 지도자들이었다. 이 계층의 사람들에게 심판은 더욱 가혹하게 다가올 것이다.
9:15 거짓말을 가르치는.
그 나라에서 가장 비난받아야 할 계층은 영적 지도력을 발휘해야 할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데도 백성들을 잘못과 어리석음의 길로 인도하는 무리였다. 이사야는 책망의 기별에서 그들을 제외하지 않았다(28:7; 29:9, 10).
9:16 그들로 미혹케 하니.
나라에는 지도자가 있어야 하지만 때때로 지도자들은 잘못된 길로 나라를 이끌기도 한다. 지도자들이 그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함으로 많은 나라가 멸망하였다. 한 나라의 운명은 그가 세우는 계획과 그가 보여 주는 본을 통해 결정된다. 이스라엘은 그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함으로 멸망했다.
9:17 기뻐 아니하시며.
사해 두루마리 1QIsa에는 “동정하지 않으시며”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이 문맥과 더 조화되는 것 같다.
9:17 설만하며.
(「제임스왕역」에는 “an hypocrite”[위선자]-역자 주). 참조 마 6:2; 7:5; 23:3, 13 주석.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그 백성들은 철저하게 악행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신앙이 있음을 고백했지만 공공연히 악행을 즐기고 있었다.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가담하였으므로 젊은이로부터 노인들까지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고통받게 될 것이다. 악행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면 공의는 심판이 임하기를 요구하게 된다.
9:18 불태우는 것 같으니.
이것은 악행의 마지막 결과에 대한 인상적인 표현이다. 죄는 죽이기만 할 뿐 치료하지는 않는다. 사악함은 태워서 재를 만들고 황폐하게 할 뿐 고치거나 세우지는 못한다. 멸절되어야 마땅한 질려와 형극은 백성 중에 만연한 악행을 상징한다(참조 5:6; 7:23~25; 10:17; 27:4; 32:13). 숲 속의 좋은 나무들을 뒤덮은 무성한 가시나무와 찔레가 그 땅에 가득하게 될 때, 사악함이 불처럼 튀어나와서 그 자신을 사르게 된다. 죄는 대가를 치르게 되며, 사실상 자기 파멸을 초래한다(참조 사 33:11, 12; 렘 21:14; 욜 1:19, 20; 히 6:8). 그리하여 땅은 정결하게 되며 건강한 초목들이 새롭게 성장할 수 있는 준비가 갖추어진다(참조 벧후 3:10~13).
9:19 이 땅이 소화되리니.
참조 1, 2절 주석. 선지자는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장면을 보고 있다. 사람들은 극도로 혼란스럽고 그 나라는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 울분과 비통함, 미움과 악, 불의와 학대로 사람들의 마음은 찢겨지고 영혼이 격동되어 각 사람은 자신의 이웃들과 대적이 되었다. 이런 일은 “각 사람의 칼이 그 형제를”(겔 38:21) 치게 되며 “피차 손으로 붙잡으며 피차 손을 들어”(슥 14:13) 침을 통해 궁극적 결과를 맞게 될 것이다.
9:20 자기 팔의 고기.
탐욕과 부패의 궁극적인 결과에 대한 인상적인 표현. 이기심은 마침내 자신을 태워버린다. 이웃의 안녕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은 실제적으로 자신을 위한 최대의 유익에 반하여 일하고 있는 것이다. 긴 안목으로 볼 때 아무도 이웃이 행복하지 않은 상태에서 완전한 행복과 번영을 누릴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이 이웃을 짓밟음으로 자신을 높이고자 한다면 그는 자신의 파멸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나라들이 자신들의 이기적인 유익만을 위하여 서로를 파멸시킨다면 그들은 가장 어리석은 일에 힘쓰고 있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 스스로와 그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을 파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불화와 탐욕 때문에 사람이 사람을 해치고 나라가 나라를 멸망시켰던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이 세상도 자신을 멸망시키는 일을 진행하는 중이다.
9:21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이 두 지파는 형제이며 공통의 관심사가 있었다. 그러나 에브라임이 므낫세를 대적하고 므낫세가 에브라임을 대적할 때 양쪽 모두의 멸망은 확실하였다. 그리고 이 두 지파가 그들의 형제인 유다를 대적할 때, 자신들의 심판의 마지막 날이 왔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어떤 나라도 이사야의 생애 초기의 북방 왕국처럼 범죄와 정욕과 피로 뒤범벅이 된 이런 상태에서 빠져나갈 수 없으며, 오랫동안 지속될 수 없다.
9:21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여호와의 심판의 손이 계속해서 펴지도록 하는 더 많은 범죄의 목록이 다음 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같은 사상이 단절 없이 이어지고 있다.
참고자료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 제7권, 시조사.
- 「열린노트성경」, 아가페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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