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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0장 성경주석 본문

성경주석/이사야

이사야 10장 성경주석

Timberners-Lee 2017. 9. 22. 07:08

<이사야 10장 흐름정리>

본장에서 이사야는 먼저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는 북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낱낱이 지적한 후, 이어서 앗수르에 대한 심판을 예언한다. 하나님은 앗수르를 도구로 사용하여 북 이스리라엘과 남 유다를 징치하셨으나 그렇다고 해서 앗수스가 그들보다 의로운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교만히 행하는 앗수르에 대해 심판을 선고하신 것이다. 한편, 앗수르의 멸망은 곧 유다의 구원을 의미한다. 여기서도 우리는 앗수르를 통해서 유다를 징계한 근본 목적이 진멸이 아닌 정결과 구원에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이사야 10장 줄거리>

1. 폭군들이 당할 화.

5. 위선자들을 징벌하기 위해 막대기 역할을 했던 앗수르가 교만으로 말미암아 부러질 것임.

20.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구원을 얻을 것임.

24. 이스라엘이 앗수르로부터 구원받을 것이라는 약속으로 위로를 얻음.


<이사야 10장 개역한글>

1. 불의한 법령을 발포하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2. 빈핍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내 백성의 가련한 자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3. 너희에게 벌하시는 날에와 멀리서 오는 환난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누구에게로 도망하여 도움을 구하겠으며 너희 영화를 어느 곳에 두려느냐  

4. 포로 된 자의 아래에 구푸리며 죽임을 당한 자의 아래에 엎드러질 따름이니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5. 화 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  

6. 내가 그를 보내어 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하여 나의 노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가로상의 진흙 같이 짓밟게 하려 하거늘  

7. 그의 뜻은 이같지 아니하며 그 마음의 생각도 이같지 아니하고 오직 그 마음에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여  

8. 이르기를 나의 방백들은 다 왕이 아니냐  

9. 갈로는 갈그미스와 같지 아니하며 하맛은 아르밧과 같지 아니하며 사마리아는 다메섹과 같지 아니하냐  

10. 내 손이 이미 신상을 섬기는 나라에 미쳤나니 그 조각한 신상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신상보다 우승하였느니라  

11. 내가 사마리아와 그 신상에게 행함 같이 예루살렘과 그 신상에게 행치 못하겠느냐 하도다  

12. 이러므로 주 내가 나의 일을 시온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한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리라  

13. 그의 말에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 열국의 경계를 옮겼고 그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또 용감한 자 같이 위에 거한 자를 낮추었으며  

14. 나의 손으로 열국의 재물을 얻은 것은 새의 보금자리를 얻음 같고 온 세계를 얻은 것은 내어버린 알을 주움 같았으나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지저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는도다  

15.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체 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일반이로다  

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찐 자로 파리하게 하시며 그 영화의 아래에 불이 붙는 것 같이 맹렬히 타게 하실 것이라  

17. 이스라엘의 빛은 불이요 그 거룩한 자는 불꽃이라 하루 사이에 그의 형극과 질려가 소멸되며  

18. 그 삼림과 기름진 밭의 영광이 전부 소멸되리니 병인이 점점 쇠약하여 감 같을 것이라  

19. 그 삼림에 남은 나무의 수가 희소하여 아이라도 능히 계산할 수 있으리라  

20.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것이라  

22.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23. 이미 작정되었은즉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24.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시온에 거한 나의 백성들아 앗수르 사람이 애굽을 본받아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찌라도 그를 두려워 말라  

25. 내가 불구에 네게는 분을 그치고 노를 옮겨 그들을 멸하리라 하시도다  

26. 만군의 여호와께서 채찍을 들어 그를 치시되 오렙 반석에서 미디안 사람을 쳐 죽이신 것 같이 하실 것이며 막대기를 드시되 바다를 향하여 애굽에 드신 것 같이 하실 것이라  

27. 그 날에 그의 무거운 짐이 네 어깨에서 떠나고 그의 멍에가 네 목에서 벗어지되 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지리라  

28. 앗수르 왕이 아얏에 이르러 미그론을 지나 믹마스에 치중을 머무르고  

29. 영을 넘어 게바에서 유숙하매 라마는 떨고 사울의 기브아 사람은 도망하도다  

30. 딸 갈림아 큰 소리로 외칠찌어다 라이사야 자세히 들을찌어다 가련하다 너 아나돗이여  

31. 맛메나 사람은 피난하며 게빔 거민은 도망하도다  

32. 이 날에 그가 놉에서 쉬고 딸 시온 산 곧 예루살렘 산을 향하여 그 손을 흔들리로다  

33.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혁혁한 위력으로 그 가지를 꺾으시리니 그 장대한 자가 찍힐 것이요 높은 자가 낮아질 것이며  

34. 철로 그 빽빽한 삼림을 베시리니 레바논이 권능 있는 자에게 작벌을 당하리라


<이사야 10장 성경주석>

10:1 불의한 법령

 이곳에서 질타받고 있는 악은 이스라엘과 유다 모두가 저지른 죄악 중 하나이다. 그것은 1:23과 5:23에 기록된 대로 유다 지역에서 이미 지적했던 악이다. 그 범죄는 가난한 자와 곤핍한 자, 과부와 고아, 불행한 자들과 학대받는 자들에 대한 불공정함 중 하나였다. 사람들은 오직 자신과 자신들의 유익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시대의 취약점은 나라의 심장부를 갉아먹고 있는 이기심과 탐욕이었다.

10:3 벌하시는 날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는 자들에게 직접 심판을 선고하시는 대신 이 질문을 통해 스스로 자신에게 심판을 선고하도록 명하신다. 이 불공평한 재판관들은 자신들이 죄를 범하였으며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공의와 공평에 대하여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는” 여호와의 날에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피해 어떻게 바위와 동굴로 도망할 것인지 이미 지적하였다(사 2:19).

10:4 포로 된 자

 4절 앞부분의 히브리어 본문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그 사상은 1~3절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관들이 여호와께서 벌하시는 날 우주의 재판관 앞에서 두려움에 떨며 몸을 숙이고 있는 죄인들 중에 있는 자신들을 보게 될 것이며, 그들 역시 같은 운명 곧 죽임을 당한 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10:5 나의 진노의 막대기

 하나님의 백성으로 공언한 백성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그분은 그들의 죄악을 나열하시면서, 심판을 실행으로 옮길 도구들이 무엇인지를 제시하신다. 하나님은 선고하셨고 앗수르는 그 선고를 실행할 도구이다. 앗수르를 “세내어 온 삭도”로 비유한 7:20과 비교해 보라.

10:6 한 나라

 유다를 의미하는 말로, 이때에는 사마리아가 이미 멸망했기 때문이다.

10:6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부지런히 탈취하고 서둘러서 노략하라”를 뜻하는 마헬살랄하스바스라는 이사야의 아들의 이름과 비교하라. 하나님은 유다뿐 아니라 이스라엘과 다메섹(8:4)에 대한 심판을 앗수르에게 위탁하셨다.

10:7 그의 뜻은 이 같지 아니하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라들에 역사하시는 방법에 대한 흥미로운 계시이다. 어떤 세력이 그들에게 내려진 심판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을 때, 하나님은 앗수르를 심판의 막대기로 사용하셨다. 그러나 앗수르는 자신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앗수르의 지도자들이 알고 있는 바는 그들의 정책들이 전적으로 자신들의 이기적인 유익을 위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앗수르가 이스라엘과 유다를 침공한 것은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 악한 영의 영향력이었다. 그런 경우에 앗수르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도구였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은 심판이 선고된 세력으로부터 거두어졌으며, 앗수르는 자신의 이기적이고 악한 뜻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그를 향한 반역이 편만한 세상에서 그분의 주권적인 뜻을 실행하신다. 사람들과 귀신들의 계획은 완전히 뒤집어져서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게 한다(참조 대하 18:18; 22:8; 단 4:17 주석).

10:8 나의 방백들

 앗수르의 귀족들의 권세와 영광은 다른 나라의 왕들에 견줄 만했으므로 앗수르인들은 그것을 자랑하였다. 그들의 권세가 너무나 크고 권위가 너무나 영광스러웠기 때문에 이웃 나라들의 군주들은 그들 앞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앗수르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에게 조공을 바치며 경의를 표하는 속국 왕들의 긴 명단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10:9 갈로는 갈그미스와 같지 아니하며

 앗수르어로 쿨라니(Kullani)인 갈로는 앗수르가 738년에 정복한 성읍이다. 갈그미스의 피시리스(Pisiris) 왕은 743년에 아르파드(Arpad)에 있는 디글랏 빌레셀에게 조공을 바쳤다. 갈그미스는 유브라데강의 굴곡부 위에 위치에 있으며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615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쿨라니(Kullani)는 갈그미스에서 남서쪽으로 약 7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10:9 하맛은 아르밧과 같지 아니하며

 하맛의 19개 지역은 743년 또는 그 바로 직후에 앗수르의 세력 안에 편입되었다. 아르파드(Arpad)는 743년과 742년, 741년 그리고 740년에 있었던 앗수르의 군사작전에서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아르파드는 쿨라니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며, 오론테스(Orontes) 강변에 있는 하맛은 다메섹에서 동북쪽으로 약 19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다메섹은 사마리아에서 북동쪽으로 약 160킬로미터 지점에 있다.

10:9 사마리아는 다메섹과 같지 아니하냐

 디글랏 빌레셀은 733년과 732년에 다메섹을 침공하였고 727년에 또다시 침공하였다. 사마리아는 살만에셀 V세에게 포위되었으며 723/722년에 멸망당하였고(참조 제3권, 116, 117), 그 주민들은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갔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북부와 동부 지역에 살던 대부분의 주민들은 사마리아가 앗수르의 세력에 점령되기 수 년 전인 732년에 이미 디글랏 빌레셀에 의해 옮겨졌다.

10:10 나라

 앗수르는 9절에 언급된 중요한 성읍들을 성공적으로 정복하였다. 그들의 신들은 앗수르의 공격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는 데 무력하였다. 앗수르는 자신의 신들이 그들의 신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여겼으며, 자신의 광범위한 정복이 이것을 증거한다고 믿었다. 고대의 모든 백성에게 그랬던 것처럼, 앗수르 왕에게 특정 신의 위대함은 그 신을 섬기는 나라의 세력으로 결정되었다. 따라서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신들”은 앗수르가 정복한 많은 나라의 신들보다 열등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10:11 사마리아와 그 신상

 앗수르인들은 다른 나라의 신들도 그들의 신들과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예루살렘의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다른 성읍의 신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마리아의 신들이 사마리아를 구하는 데 실패한 것처럼, 예루살렘의 하나님도 앗수르의 세력에서 예루살렘을 구원할 수 없을 것이었다.

10:12 다 행한 후에

 하나님은 성취하셔야 할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시온과 예루살렘을 심판하는 것이었다. 앗수르는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사용된 하나님의 도구였다. 그러나 그 일이 마쳐진 다음에는 여호와께서 그 교만함과 방자함을 인하여 앗수르를 벌하실 것이었다.

10:12 벌하리라

 문자적으로 “내가 책임을 물을 것이다”. 이 절의 첫부분은 3인칭으로 시작했지만 여기서는 1인칭으로 바뀐 것에 주목하라. 아마도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 것 같다.

10:13 내 손

 단 4:30과 비교하라. 사 10:13에 제시된 앗수르의 정책을 분석해 보면 그 나라에 내린 심판이 정당했음을 알 수 있다. 얼른 보면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그분의 일을 이루시는 데 사용하시고, 그 후에 그분이 하고자 하시는 것을 행한 것으로 인해 그 나라를 벌하는 것이 부당하게 보일 수 있다(참조 출 4:21; 9:16 주석). 따라서 여기에 합리적인 이유가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다. 앗수르는 자기 자신만을 생각할 뿐 하나님은 생각하지 않는다(참조 사 10:7 주석). 그 나라는 오직 약탈과 정복에만 관심이 있다.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을 때 앗수르는 자신과 자신의 신들이 예루살렘과 하나님보다 강하다고 생각했다.

  앗수르가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는 동안 자신이 여호와의 목적들을 성취시키는 데 사용되고 있다는 것,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유다 또는 다른 어떤 나라에도 아무것도 행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앗수르는 옳고 그름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계신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과 그분은 모든 범죄자들, 심지어 그분을 경배한다고 외적으로 고백하는 자들에게라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케 하시는 분임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앗수르는 동방의 여러 나라에서 행한 무자비한 행위들로 인해 여호와 앞에 범죄하였다. 사람과 하나님께 향한 그의 죄악들, 곧 교만함과 방자함 그리고 완고함은 심판을 자초하였으며, 이런 이유들로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벌하셨다. 하나님께서 나라들을 취급하시는 원칙들에 대해서는 교육, 173 ; 단 4:17 주석을 참조하라.

10:13 열국의 경계

 즉 국경선. 대규모 이주 정책을 통해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반역을 사전에 제거하는 것이 앗수르의 목적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메소보다미아와 메대 여러 곳으로 옮겨진 것(왕하 17:6) 그리고 바벨론, 엘람 등 여러 먼 나라 백성들이 사마리아의 성읍들로 이주한 것(왕하 17:24; 스 4:9, 10)은 이 정책의 일환이었다.

10:13 그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참조 14절 주석. 앗수르는 자신의 약탈과 잔인함을 자랑스러워했다. 앗수르 왕들의 명각에는 그들이 노획한 전리품들과 흘린 피를 자랑하는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그들이 약탈해서 옮겨온 은과 금, 소떼와 재물, 몸에 말뚝을 박아놓은 사람들의 숫자와 성벽 밖에 시체를 쌓아올려 만들어 놓은 무더기들, 자신들이 언덕과 들판에 흐르게 했던 피의 강들 등의 목록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하나님은 이 모든 자랑을 아셨으며, 여기에 앗수르가 마땅히 책망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드러낸다.

10:13 용감한 자같이

 문자적으로 “독재자같이”, “폭군같이.” 같은 히브리어 단어가 엄청난 힘을 지닌 “수소”로 번역되었다(시 50:13; 사 34:7). 앗수르는 세상의 강한 다른 민족들을 정복하고 굴복시킨 자신의 힘과 능력을 끊임없이 자랑했다.

10:14 내어버린 알을 주움 같았으나

 참조 13절 주석. 앗수르는 열국들의 보화와 재물들을 단순히 약탈할 노략물로 여겼다. 이 성경 본문에 사용된 것과 유사한 표현들을 사용하여, 앗수르의 왕들은 가깝고 먼 민족들의 보화를 탈취하고 그것들을 실어온 것에 대하여 자랑하였다. 예컨대, 유명한 아슈르바니팔 도서관은 앗수르가 정복 기간에 탈취한 기록들과 물건들로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

10:14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지저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앗수르 군대가 지나간 곳에는 죽음과 파멸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앗수르 왕들은 거주민을 한 명도 남기지 않은 채 완전히 초토화시킨 아름다운 지역들을 묘사하고 있다.

10:15 도끼가 어찌

 앗수르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으나 자신을 하나님보다 강한 것처럼 자랑하였다. 앗수르의 왕들은 우주의 보좌에 않으셔서 이 땅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며, 원하시는 자를 세우기도 하시며 폐하기도 하시는 여호와(참조 단 5:19)에 대하여 거의 알지 못하였다. 이 땅의 어떤 군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 어떤 일을 이룰 수 없으며, 어떤 나라도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계속 존재할 수는 없다. 다른 모든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앗수르는 하나님의 능력 앞에 “통의 한 방울 물”과 같으며 “저울의 적은 티끌 같”다(사 40:15). 앗수르는 하나님의 손이 “열방을 향하여” 펴 있으며, 아무도 그 손을 돌이키게 할 수 없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었다(14:26, 27).

10:15 자기를 드는 자

 즉 하나님.

10:15 움직이려 하며

 문자적으로 “자신을 위대하게 하고자 하며.”

10:16 살진 자

 “살진”이라는 말이 상징적으로 사용된 것을 보려면 창 49:20; 겔 34:16~18 주석을 참조하라. 삿 3:29에는 이 단어가 “역사”로 번역되어 있다. 거기에 언급된 “용사” 즉 전사(戰士)는 분명히 모두 문자적 의미로 “살진 자”는 아니었을 것이며 오히려 건장하고 튼튼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살진 자”란 통통하게 살진 앗수르의 방백들이었을 것이며, 아마도 앗수르의 군인들도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손을 펼치셔서 야위고 파리하게 하실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앗수르의 힘을 약하게 하실 것이다.

10:16 불

 하나님은 그들의 화려한 궁전들을 불태우시고 잿더미가 되게 하실 것이었다(참조 암 1:4). 이사야가 이 말을 선포한 지 한 세기가 지난 후에 앗수르 제국은 폐허가 되었다. 니느웨는 커다란 잿더미로 변했으며, 앗슈르(Asshur), 갈라(Calah), 그리고 두르 샤루킨(Dur Sharrukin)은 사막의 모래로 덮여 버렸다.

10:17 이스라엘의 빛

 죄와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은 소멸하는 불이시다(참조 출 24:17; 신 4:24; 9:3; 사 33:14; 히 12:29). 거룩하신 분의 밝음은 구속받은 자들에게는 영광과 기쁨이 되지만 질려와 형극에게는 소멸하는 불꽃이 된다. “질려”와 “형극”은 죄가 가져오는 파괴적인 역사를 묘사하기 위해 이사야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들이다(참조 사 9:18 주석). 에스겔은 이 상징적인 표현을 악한 자들을 나타내는 데 사용하였고(겔 2:6), 마찬가지로 바울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는 저주받은 악의 열매로서 가시와 엉겅퀴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히 6:8).

10:17 하루 사이에

 이 단어들은 앗수르에 임한 빠르고 갑작스러운 멸망을 가리킨다. 이사야는 여기서 하룻밤 사이에 산헤립의 군사 185,000명이 죽임을 당한 것과 같은 장면을 내다보고 있다(참조 37:36).

10:18 그 삼림과 기름진 밭의 영광

 한때 앗수르의 세력은 강력하고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이제 그것은 이 땅에서 사라졌다. 마치 울창하고 아름다운 숲이 불에 사라짐같이. 성경에서 악한 사람들과 나라들은 그 오만함과 아름다움이 잘리게 될 장중한 나무들에 비유되곤 한다(겔 31:3~18; 단 4:10~26; 참조 사 30:27~33).

10:18 병인

 히브리어 노세스(noses). “비틀거리다”라는 의미의 동사 나사스(nasas)의 분사 형태로, 이곳의 의미는 문자적으로 “비틀거리는 사람”임. 어떤 사람들은 “환자”를 의미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불가타역」과 마찬가지로 「70인역」에도 “도망하는 사람”으로 되어 있다. 앗수르인들은 모든 지역으로 진군하는 것처럼 보였으며 그들의 전진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선지자는 앗수르가 병들었을 때, 즉 멸망할 때를 미리 내다보고 있다. 그 나라는 “비틀거리며” 약해질 것이다. 나사스(nasas)를 이렇게 번역한 것은 16~19절의 문맥에 적절하게 보이며, 특히 18절의 전반부를 보면 더욱 그렇다.

10:19 나무

 즉 백성들(참조 18절 주석). 산헤립과 그의 또 다른 원정대는 앗수르로 돌아오는 길에 성공을 거두었으므로, 여기에서는 예루살렘 성문 앞에서 입은 산헤립 군대의 손실(참조 37:36)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사 37:37; 참조 왕하 19:36 주석). “불”이 “숲”을 삼킨 후에(사 10:16), 어린아이라도 능히 헤아릴 정도의 매우 적은 수의 “나무”만이 남았다.

10:20 이스라엘의 남은 자

 선지자는 아주 적은 수의 앗수르인들이 그들에게 임할 심판을 피할 것이라는 사실을 주목한 후에, 그의 마음은 이스라엘에서 앗수르의 침공 때에 살아남게 될 사람에게로 향한다. 철저하게 멸망시키는 일은 좀처럼 드물다. 북방 왕국이 앗수르에 의해 완전히 멸망된 후에도 그곳에 소수의 사람들이 남아있었고, 유다에서도 예루살렘 백성들과 소수의 다른 사람들은 산헤립의 침공으로 인한 파멸에서 벗어났었다. 이사야의 아들의 이름인 스알야숩에 구체적으로 표현된(참조 7:3) 남은 자들의 귀환 또는 생존에 관한 주제는 선지자가 되풀이하는 것이다(참조 10:21, 22; 11:11, 16; 46:3).

10:20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아하스는 하나님보다 앗수르를 더 신뢰하였다(왕하 16:7~9; 대하 28:16~21). 그러나 앗수르는 그 문제와 관련하여 유다 또는 다른 어떤 나라에 대해서도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 나라는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었다. 하나님은 유다에 산헤립에 의한 무서운 파멸을 이르게 하신 후에, “남은 자”들이 그분을 신뢰하도록 계획하셨다. 히스기야의 열렬한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구원을 베푸신 분은 바로 그분이셨으며(사 37:14~36), 신실한 남은 자들이 믿음을 둘 곳도 그분이셨다. 마침내 그들은 앗수르에서 친구와 조력자가 아닌 잔혹한 주인을 알아보게 되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안전함과 승리의 유일한 길임이 드러났다.

10:21 남은 자…가…돌아올 것이라

 히브리어 셔아르야슈브(s∨e’aryas∨ub). 여기서 이사야는 그의 아들인 스알야숩을 염두에 두었다(참조 7:3 주석). 그러나 이사야가 이스라엘에게 제시한 최고의 교훈은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이었다(참조 7:14; 8:8 주석). 백성들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에는 지상에서 가장 강한 세력일지라도 그들을 대항하여 승리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이런 자기의 백성들이 당신께 돌아오도록 고된 시련이 임하는 것을 허락하셨다(참조 10:13 주석).

10:22 바다의 모래

 남은 자의 약속된 귀환은 희망의 기별이자 멸망의 기별이었다. 여호와께 돌아오기를 거부하고 위선적이며 세상적인 길을 계속 고집하는 자들에게 이 “남은 자”의 기별은 아무런 희망도 되지 못하였다. 회복과 구원에 대한 약속은 오직 “남은 자”만을 위한 것이었다. 다른 모든 이들은 잃어버림을 당할 것이었다. 악을 행하는 자들과 하나님을 오직 이름만으로 알고 있는 자들은 그 땅에 밀려오는 심판을 피할 길이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비록 이스라엘의 수효가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참조 창 22:17; 32:12), 오직 신실한 남은 자만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10:22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훼멸하시기 위해 멸망을 허락하시기는 하지만 그 결과는 공의의 더 높은 차원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고난이 악한 자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형벌이지만 근본적인 목적은 교정하기 위함이다. 악한 자들에게 심판이 임하는 것은 피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남은 자는 여호와께로 돌아오며, 하나님은 그들 안에서 의의 역사를 이루신다. 사도 바울은 이 구절을 여호와께서 이 땅에서 이루실 마지막 위대한 사역에 적용시킨다(롬 9:27, 28; 참조 벧후 3:10~13).

10:23 행하시리라

 문자적으로 “불태우시리라”, 곧 모든 것을 삼키시리라(참조 28:22).

10:24 애굽을 본받아

 바로는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의 모든 분노를 다 쏟아 부었지만 출애굽을 막지 못했다. 앗수르인들 또한 강력하고 잔인하지만 남은 무리가 그들의 공격으로부터 피하게 될 것이다.

10:24 두려워 말라

 이것은 이사야의 기별을 실제적으로 적용한 사례이다(참조 7:4, 7, 9 주석). 앗수르인들은 심판의 “막대기”로 올 것이지만(참조 10:5 주석),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 것이다. 그들이 괴롭게 할 것이지만 멸망시키지는 못한다. 하나님께 충실하게 남아 있으라. 그분을 신뢰하라. 그분의 임재를 받아들여라. 그러면 구원받을 것이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잃어버림을 당할지라도, 한 남은 무리가 구원받을 것이다. 그 남은 무리 중에 속하라. 그리고 두려워 말라. 하나님께서는 이와 흡사한 기별을 오늘 우리에게도 보내고 계신다.

10:25 분

 즉 하나님을 섬긴다고 공언하는 사람이든 이방인이든 악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 악한 자들은 멸망할 것이며, 그때에 여호와의 분은 그칠 것이다. 다시 한 번 앗수르의 멸망이 예언돼 있다(참조 19절 주석).

10:26 미디안 사람을 쳐죽이신 것

 9:4에서 이사야는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다고 언급하였다. 이제 그는 다시 다가올 앗수르의 멸망을, 이스라엘로 미디안과 그 방백들에게서 구원을 얻게 한 그 공격에 비유한다(삿 7:19~25).

10:26 막대기

 애굽에서 바로는 압제의 막대기를 휘둘렀으나, 하나님은 구원의 막대기를 휘두르셨다. 여호와의 막대기가 바다를 향해 내밀어졌을 때 애굽의 군대는 멸망당했다. 옛적에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원수들을 응징하셨듯이, 그분은 이사야의 시대에 시온을 향해 다가오는 원수들을 또다시 멸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께서 그때 행하셨던 것을 오늘날에 또다시 행하실 것이다. 악한 자들이 아니라 신실한 남은 자들이 승리할 것이다.

10:27 기름진 까닭에

 (「제임스왕역」에는 “because of the anointing”[기름부음 때문에]-역자 주). 이 상황에서 이 표현이 갖는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 “anointing”으로 번역된 단어는 “살진”(fat) 또는 “기름”(oil)이라는 의미이다. “anointing”(기름 붓는)이라고 번역한 것은 기름이 머리에 붓는 예식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개정표준역」은 히브리어 본문을 재구성하여 “그가 림몬에서부터 올라갔다”로 번역하였다.

10:28 앗수르 왕이 아얏에 이르러

 여기로부터 침략자가 북쪽에서 와서 예루살렘 근처까지 쳐들어오는 것이 시적으로 묘사돼 있다. 이것이 어느 특정한 앗수르의 침공에 대한 예언인지 단순히 유다 땅에 밀려오는 침략의 물결(참조 8:7, 8 주석)을 묘사하는 시적인 표현인지는 불분명하다. 산헤립은 그의 첫 번째 침공 때(히스기야 14년) 북쪽에서 예루살렘을 공격하지는 않았었다. 그의 군대는 지중해 해안에 도착하였고 남쪽으로 진군해서 팔레스타인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유다의 성읍들을 향해 내륙으로 진격해 나아갔다. 히스기야는 라시시로 조공을 바치겠다는 그의 서약이 담긴 기별을 보냈다(왕하 18:14). 그러나 산헤립의 침공은 두 번 있었던 듯하다(참조 제2권, 87, 88). 이사야의 시는 적군이 점점 가까이 진군해 오면서 나라를 황폐케 하는 것과 같은 인상적인 방식으로 예루살렘 거민을 짓누르고 있는 공포를 나타낸다.

  이것이 현재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사르곤이 이끄는 앗수르 군대가 실제적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추정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어쩌면 그 일부가 애굽을 향해 진군함과 동시에 유다를 공격하기 위해 다가오는 산헤립 군대의 또 다른 일부일 수도 있다. 이 시의 목적은 적군이 가까이 다가옴에 따른 예루살렘과 그 주변 지역 거민들의 두려움을 묘사하기 위함이다.

  어떤 군대가 쳐들어 올 때 여기에 언급된 모든 도성을 거쳐가는 것은 아니다. 아얏은 아마도 예루살렘의 동북쪽으로 약 16킬로미터 떨어진 아이라는 곳에 있었을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북북동쪽으로 약 11킬로미터 떨어진 미그론과 믹마스로 지나오면서, 그 군대는 그곳에 머무른다.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현재의 대로가 그보다 앞선 고대에 만들어진 대로를 따라 놓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고대에 여기에 언급된 도성들과 매우 가까운 곳에 대로가 있었을 것이다.

10:29 영(嶺)

 믹마스에서 그 길은 예루살렘에서 약 3킬로미터 떨어진 게바로 향하는 깊은 골짜기와 가파른 언덕으로 이어진다. 베냐민 지파의 라마(게바 서쪽 3킬로미터)와 사울의 고향인 기브아(라마 남쪽 3킬로미터)는 믹마스와 예루살렘 사이의 직통 도로에 위치해 있다.

10:30 갈림

 갈림은 사울의 고향인 기브아에서 남동쪽으로 2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키르벳 카쿨(Khirbet Ka‘kul)과 동일한 장소로 알려져 왔으며, 라이스(Laish)가 남동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예레미야의 고향인 아나돗은 기브아에서 남동쪽으로 2킬로미터,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10:31 맛메나

 맛메나와 게빔은 확실하게 어디인지 알지 못하지만 예루살렘 북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0:32 놉

 제사장 아히멜렉의 고향이며 사울 시대에 성막이 있던 곳(삼상 21:1)인 놉은 예루살렘 북동쪽에 있는 스코푸스 산(Mt. Scopus) 위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는 이곳에서 침략군들이 딸 시온, 즉 예루살렘을 향하여 주먹을 흔드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목적한 바를 거의 다 이루었지만 완전히 이루지는 못했음을 보여 준다. 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밖에 서서 외쳤던 랍사게의 도전적인 말과 대조해 보라(왕하 18:19~35).

10:33 만군의 여호와

 참조 제1권, 153, 154. 이사야는 이제 그의 눈을 들어 두려움에 떠는 예루살렘 거민들로부터 우주의 보좌에 앉으셔서 당신의 백성을 지켜보고 계신 만군의 여호와를 바라본다. 앗수르 군대가 레바논의 백향목을 쓰러뜨렸다고 우쭐해 있었으나(왕하 19:23), 하나님은 이제 장대한 “나무들”(참조 사 10:19 주석)을 찍을 것이며 “빽빽한 삼림”을 베어버리실 것이다(34절). 이것은 18, 19절과 연결되는 표현이다. 인간이 일을 계획할지라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교만하고 자랑하는 앗수르는 다른 나라들에게 했던 것처럼 유다를 넘어뜨리려 했지만, 앗수르는 세상 나라를 다스리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배워야 하였다. 산헤립의 군대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능력과 예루살렘을 구원하신 방법에 대해서는 왕하 19:20~34을 참조하라.

10:34 레바논이 권능 있는 자에게 작벌을 당하리라

 산헤립이 강한 군대와 함께 유다를 침공했을 때, 교만함과 방자함으로 “주를 훼방하여 이르기를 내가 많은 병거를 거느리고 여러 산꼭대기에 올라가며 레바논 깊은 곳에 이르러 높은 백향목과 아름다운 잣나무를 베고 내가 그 지경 끝에 들어가며 그 동산의 무성한 수풀에 이르리라”(왕하 19:23)고 외쳤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나 비유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앗수르인들은 자신들의 필요를 위해 아름다운 레바논의 백향목을 벨 계획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장대한 나무로 상징된 나라들(참조 사 10:19 주석)을 멸망시키려는 계획도 함께 갖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이미 베임을 당했고, 앗수르는 다음으로 유다를 베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점에 관해 하나님은 인간의 계획이나 힘이 아니라 당신의 명령과 뜻에 의해 일이 성취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신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당신의 보호하시는 손길을 거두셨기 때문이었다. 결국에는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2:11~13) 유다도 멸망할 것이었다. 그러나 위풍당당한 유다라는 나무를 넘어뜨리는 분은 산헤립이 의도했던 것처럼 앗수르가 아니라 하나님이셨다. 이사야는 교만하고 강성한 앗수르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유다의 교만함도 그와 같이 낮아지게 될 것임도 잊지 않았다. 한때 아름답고 장엄한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베임을 당할 것이었다.


참고자료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 제7권, 시조사.

- 「열린노트성경」, 아가페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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