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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5장 & 성경주석 본문

성경주석/사무엘상

사무엘상 15장 & 성경주석

Timberners-Lee 2016. 4. 25. 07:04

<사무엘상 15장 흐름정리>

사울이 거듭하여 불순종의 길을 걸음으로써 마침내 왕권을 박탈 당하리라는 예언을 듣게 된다. 그는 아말렉을 철저히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자신의 탐심을 채울 생각에서 아말렉의 살진 가축들을 남겼다가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심판 선고를 들었던 것이다.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짐승들을 취했다는 사울의 핑계에 대해,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22절) 라는 말로써 단호한 태도를 표명했다.


<사무엘상 15장 줄거리>

1. 사무엘이 사울을 보내 아말렉을 진멸하도록 함.

6. 사울이 겐 사람에게 은혜를 베풂.

8. 사울이 아각을 살려두고 탈취물 중 가장 좋은 것을 남겨 둠.

10. 사무엘이 자신을 칭찬하고 변명하는 사울을 질책하고, 하나님이 불순종 때문에 그를 버렸다고 말함.

32. 사무엘이 아각을 죽임.

34. 사무엘과 사울이 헤어짐.


<사무엘상 15장 개역한글>

1.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을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2.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  

3.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4. 사울이 백성을 소집하고 그들을 들라임에서 계수하니 보병이 이십만이요 유다 사람이 일만이라  

5. 사울이 아말렉성에 이르러 골짜기에 복병하니라  

6. 사울이 겐 사람에게 이르되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 내려가라 그들과 함께 너희를 멸하게 될까 하노라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그들을 선대하였느니라 이에 겐 사람이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니라  

7. 사울이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치고  

8.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9.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  

10.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11.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12.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찌기 일어났더니 혹이 사무엘에게 고하여 가로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돌이켜 행하여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른즉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원컨대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14. 사무엘이 가로되 그러면 내 귀에 들어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찜이니이까  

15. 사울이 가로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1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가만히 계시옵소서 간 밤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신 것을 왕에게 말하리이다 가로되 말씀하소서  

17. 사무엘이 가로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18. 또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  

20.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였으나  

21.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취하였나이다  

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25.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2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27.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28.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서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2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30.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을찌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31. 이에 사무엘이 돌이켜 사울을 따라가매 사울이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32. 사무엘이 가로되 너희는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내게로 이끌어오라 하였더니 아각이 즐거이 오며 가로되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하니라  

33. 사무엘이 가로되 네 칼이 여인들로 무자케 한것 같이 여인 중 네 어미가 무자하리라 하고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34. 이에 사무엘은 라마로 가고 사울은 사울 기브아 본집으로 올라가니라  

35.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로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사무엘상 15장 성경주석>

15:1 이제…들으소서.

 “순종하다”라는 사상이 함축된 말이다. 사무엘의 이 말에는, 길갈에서 있었던 일과 관련하여 부탁한 지시 사항을 듣고도 사울이 순종하지 않았다는 뜻이 내포돼 있다. 지금 그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것인지, 아니면 다시 자기의 사욕에 굴복할 것인지 시험을 받아야 했다.

15:2 내가 추억하노니.

 문자적으로 “내가 주의를 돌리노니.” 아말렉 사람들은 팔레스타인과 애굽 사이에 있는 광야 지대에 사는 유목 민족이었다. 그들은 주로 이웃 부족들을 습격하고 약탈하여 생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참조 창 36:12 주석). 그들은 시내산 부근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스라엘 자손을 공격했었다(출 17:8~16). 그 전투가 끝난 후 모세는 그곳의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칭하면서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고 말했다. 발람의 예언에서 아말렉을 “열국의 으뜸”으로 부른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을 대적해 싸운 첫 민족이란 뜻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발람은 그들이 “결국에는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부언했다(민 24:20, 「개정표준역」). 

  의심의 여지없이 아멜렉 족속은 근자에 이르러 유다 남방 브엘세바 부근을 습격했는데, 그것이 그 지방 장로들이 왕을 달라고 요구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참조 8:1~5). 남방 다섯 왕의 연합 세력이 까닭 없이 공격해 왔을 때 여호수아가 기브온 사람들을 보호하라는 명을 받았듯이, 사울은 아말렉의 공격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하라는 명을 받았다. 여호수아 시대에는 그 다섯 왕을 죽인 후 평화가 왔다. 만일 사울이 하나님의 계획을 이행했더라면 이스라엘은 그 지역의 침략을 받지 않고 실제보다 훨씬 긴 기간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14:48에서 아말렉을 언급한 것은 이 전쟁을 가리킬 것이다. 왜냐하면 49~52절이 막간에 삽입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15:3 진멸하되.

 문자적으로 “너희는 진멸하되.” 아말렉 사람들의 소유물에 손을 대지 말아야 할 책임이 군인 각자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아말렉을 치라”는 명령에서 동사 “치라”가 2인칭 단수로 되어 있어서, 아말렉을 진멸할 책임을 이스라엘 왕인 사울에게 개인적으로 부과한다. “멸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하람(h.aram)은 “금하다”, “바치다”를 뜻하며, 따라서 “멸절시키다”를 의미한다. 한 나라가 금지령 아래 놓이면 나라에 속한 모든 것은 저주받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백성은 죽임을 당하고 육축과 모든 생물도 멸절당해야 했다. 그러나 은과 금은 여호와의 창고에 들일 것이었다(참조 수 6:17~19). 고대 근동의 다른 민족들에도 이와 유사한 관습이 있었다.

15:4 들라임.

 어떤 학자들은 이곳을 수 15:24의 델렘으로 본다. 델렘은 아말렉 영토와 가까운 유다 남방 경계에 있는 성읍이다. 그러나 위치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암몬 자손을 칠 때 베섹이 기지로 사용되었듯이, 아말렉을 칠 때는 들라임이 사용되었다(참조 11:8 주석). 그러나 유다 지파가 아말렉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실에 비추어볼 때, 사울의 군대 중 유다에서 온 자들이 고작 5퍼센트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15:6 겐 사람.

 모세가 장가든 가문은 미디안 족속(민 10:29) 또는 겐 족속(삿 1:16)으로 언급되었다. 그것은 두 족속이 한 부족에 속했거나 두 가문이 하나로 합쳐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주석자들은 겐 사람들이 에서의 손자이자 엘리바스의 아들인 그나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이 어느 가문 출신인지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겐 사람들을 그니스 족속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창 15:19). 미디안 족속과 아마도 겐 사람들 역시 아브라함이 아내 그두라를 통해서 얻은 자손일 것이다(참조 출 2:16 주석). 아말렉 사람들이 에서의 후손이었으므로(참조 창 36:12 주석) 겐 사람이나 이스라엘과 한 혈족인 셈이다. 겐 사람 또는 미디안 족속의 일부는 이스라엘 자손들과 함께 언약의 땅으로 들어와(참조 민 10:29~32 주석) 유다 사람들 가운데서 유업을 받았으며(삿 1:16), 멀리 북으로 납달리 지경에서도 받았다(삿 4:10, 11). 여기 언급된 겐 사람들은 아말렉 족속의 영토에 인접한 유다 남쪽 지방에 정착하여 아말렉 족속과 통혼한 사람들의 후손일 것이다(참조 27:10).

15:7 하윌라.

 하윌라의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어떤 학자들은 하윌라가 “모래 땅”을, 다른 학자들은 “모래 언덕들”을 일컫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유다의 남서쪽 경계인 애굽강(참조 민 34:5 주석)에서 서쪽으로 애굽에 이르는 지역은 지금도 모래 황무지에 불과하다. 슈르(s∨ur)라는 단어는 “벽”을 의미하는데, 애굽의 왕들이 아시아인들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홍해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그들의 동쪽 경계선을 따라 건설한 요새들의 벽을 일컫는 말로 생각된다(참조 출 2:15; 13:20; 14:2 주석). 애굽 바로 동쪽에 있는 사막은 “술 광야”라 불린다(참조 창 16:7; 25:18; 출 15:22 주석). 다윗 시대에도 아말렉 족속이 여전히 남방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아말렉성”(15:5)은 아각 왕의 거주지였고, 따라서 사울의 군대가 그곳을 멸망시켜 아말렉 족속을 멀리 술 광야로 흩어지게 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말렉에게 가한 이 공격은 사울 시대 이전과 이후에 이스라엘에 가한 그들의 공격과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삿 6:3~5; 10:12; 삼상 30:1~18). 사울은, 목표를 완수하지 못한 전쟁이었지만 만족스럽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각을 사로잡았는데, 옛날에는 왕이 사로잡히면 그의 나라가 정복된 것으로 간주했던 것 같다(참조 수 12:7~24).

15:8 아각.

 아마도 “불타는” 또는 “난폭한”을 의미할 것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애굽 사람들에게 바로가 왕의 칭호였던 것처럼, 아각은 아말렉 왕들이 취했던 칭호일 가능성이 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Antiquities xi. 6. 5), 아말렉 사람 하만은 아말렉 족속 아각의 16대 손이다(참조 에 3:1 주석).

15:8 진멸하였으되.

 즉 사울이 공격한 지역에 살고 있던 아말렉 족속을 진멸했다. 아말렉 사람들은 시내반도, 네겝 그리고 북부 아라비아 등지에 흩어져 살았다(참조 창 36:12 주석). 이 짧은 정벌 기간에 사울이 아말렉 족속을 완전히 진멸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 전쟁 이후 다윗이 그들을 치기 위해 여러 번 전쟁을 치렀다는 사실에 비춰볼 자명해진다(삼상 27:8; 30:1~20; 삼하 8:12). 그들이 최종적으로 멸절된 것은 히스기야 때에 이르러서였다(대상 4:42, 43).

15:9 가치 없고 낮은 것.

 살려둘 만한 가치 없는 것을 멸한 사울과 그의 부하들은 “그들의 모든 소유를…진멸하라”(3절)고 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고 흡족해했다. 그와 함께 승리에 들뜬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좋은 것”은 멸하지 않았다.

15:11 후회하노니.

 참조 창 6:6; 출 32:14; 삿 2:18 주석. 하나님은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라는 삼상 15:29과 이 말씀을 조화시키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두 동사 모두 나함(nah.am)의 다른 형태인데, 게세니우스(Gesenius)는 나함을 정의하기를, 다른 사람의 불행 때문에 “탄식하다” 혹은 “슬퍼하다”를 뜻하고, 따라서 “불쌍히 여기다”를 뜻한다. 또한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후회하다”로 정의한다. 성경 어디에도 사람이 자신이 행한 선행을 후회한다는 말이 없다. 오로지 악행을 후회할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뿐 아니라 자신이 행한 선에 대해서도 후회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참조 렘 18:7~10). “사람의 후회는 마음의 변화를, 하나님의 후회는 환경과 관계의 변화를 의미한다”(부조와 선지자, 630). 나함(nah.am)이라는 말은 이런 사상을 살려서 해석해야 한다.

  자유로운 선택의 원칙에 입각하여,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그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단순한 기계로 만들지 않는다. 결국 이 목적들은 이루어질 것이 사실이나(사 46:10), 그것들을 수행하도록 부름받은 개인이나 나라는 하나님의 제안을 따르거나 거부할 특권을 상실하지 않는다(참조 교육, 178 ). 처음에는 “[가기] 싫소이다”라고 말했지만 마음을 고쳐먹은 사람이, 가겠다고 말한 후에 그러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보다 훨씬 더 낫다(참조 마 21:28~32). 각 경우에, 하나님의 소원을 성취할 도구인 사람이 가치가 없다고 판명되면 그분은 그 사람의 결정에 대해 “슬퍼”하시지만, 자신이 선택한 길을 따라가고 자신이 뿌린 씨의 결과를 거두도록 허락한다. 사울이 자기의 욕심을 따르고 말겠다고 결정했다고 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조금도 좌절시키지 않고, 사울이 왕으로 남아 있도록 허락함으로써 오히려 그분께 오래 참으심을 나타낼 기회를 제공했다. 인과율이라는 자연의 이치는 여기 나타난 선과 악의 대쟁투에서 사람이 배워야 할 위대한 교훈 가운데 하나이다.

15:11 사무엘이 근심하여.

 문자적으로 “그것이 사무엘을 불붙여.” 이 동사가 “분노”와 연관되어 사용될 때는 대체로 “분노가 불붙었다”로 번역한다. 동사 하라(h.arah)가 “근심하다”로 번역된 것은 구약에서 여기뿐이다. “사무엘이 분노했다”로 번역하면 맞지 않는 이유는 “사무엘이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었다”는 말이 덧붙여 있기 때문이다(참조 11절). 선지자는 크게 실망하고 당혹한 나머지 이 통탄할 상황을 타개할 방도를 알기 위해 전심으로 여호와를 찾았다.

15:12 갈멜.

 이곳은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을 대면했던 갈멜산이 아니라, 다윗이 나발과 조우했던 곳으로(25장), 헤브론 동남쪽 11.6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성읍이다.

15:12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사울은 자기의 전승 기념비를 세운 다음, 여리고 근방의 길갈로 갔는데, 아마도 자신이 그곳에서 당한 치욕을 만회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13:11~16).

15:13 내가…행하였나이다.

 사울은 큰 존경을 표하는 척하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사무엘의 칭찬을 받기 위해 기다렸다. 유사 이래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울은 단지 자기 마음에 드는 부분만 이행하고는 주어진 명령을 수행했다고 믿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오랜 원수를 쳐서 약탈하고 자기의 사명을 완수한 증거로 아각을 잡아 데리고 돌아왔다. 갈멜에 세운 전승 기념비는 그의 자만의 증거였다. 다소 사람 사울처럼 기스의 아들 사울도 틀림없이 자신의 선택으로 행한 일을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게 행했다고 믿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여기서 둘 사이의 유사성은 끝난다. 왜냐하면 전자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지만 행치 않았고, 후자는 무지 가운데서 그렇게 행했기 때문이다(딤전 1:13).

15:14 이 양의 소리.

 바로 그 순간 사울의 양심은 떳떳한 듯이 보였지만, 양떼가 우는 소리는 사울의 불순종과 그의 양심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했다.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히 9:14) 거리낌이 없게(행 24:16) 하는 대신, 양심이 화인 맞게 할 수 있다(딤전 4:2). 기름부음을 받은 이후에 사울은 많은 고상한 품성의 특성들을 나타냈고, 사무엘은 예수께서 유다를 사랑한 것처럼, 사울을 사랑했다. 그러나 사울이 권력을 잡자 어떤 간섭도 용납하지 않는 폭군으로 변했다. 사울이 순종했노라고 호언하고 있던 바로 그때 양떼는 그가 불순종했다고 떠들썩하게 선포하였다.

15:15 백성이…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아담과 하와처럼 사울도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했다. 이전에 블레셋 사람들을 소탕하던 날 음식에 손을 대지 말라는 사울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던 것처럼 백성들이 아말렉 사람들에게 속한 모든 것을 멸하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겠는가?(14:24). 사울 같은 천성과 지성을 가진 사람이 그런 핑계를 내세워 숨으려 하는 것은 영적 파산을 나타내는 명확한 증거이다.

15:17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때에.

 17절의 원문은 문자적으로 “당신이 당신 보기에 작았지만[혹은 작았을 때], 당신이 이스라엘 지파들의 우두머리가 되지 않았느냐”라고 번역할 수 있고, “비록 당신 자신이 볼 때에 당신은 작[았지만], 당신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머리가 [아니냐]”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히브리어 본문에서, 동사들은 암시될 뿐 드러나지는 않았으므로 번역할 때 그 동사들을 보충해 주어야 한다. 「제임스왕역」은 사무엘이 여기서 과거의 경험을 언급하고 있다는 가정 하에 과거 시제를 사용했고, 「개정표준역」과 기타 현대 역본들은, 그가 15절에 나타난 사울의 진술을 생각하여 현재의 관점에서 그에게 말하고 있다고 간주한다. 「제임스왕역」은 사무엘이 사울의 이전의 겸비와 현재의 교만을 대조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개정표준역」과 기타 번역들은 그 진술을, 사울이 백성들의 뜻에 복종을 표하는 것(15절) 즉 거짓 겸손과 하나님이 그를 그들의 지도자로 임명한 것을 대조하는 것(17절)으로 해석한다.

  “여호와께서 [너를]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라는 구절은 단순히 “[너를]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라는 앞구절을 반복하여 말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사울은 탈취물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보존한 것은 “백성”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자신의 행동을 설명했었다. 즉 그는 그들을 제지할 힘이 없었음을 암시한 것이다(15절). 「개정표준역」에 따르면, 사무엘은 사울의 책임 회피-“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때에” 즉 네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작은 왕이 되었을 때에-를 그가 그들의 지도자라는 사실을 엄숙하게 단언함으로써 맞섰다. 17~19절에서(참조 1~3절), 사무엘은 다시 사울에게 이 문제와 관련된 그의 개인적 책임을 상기시키려고 나선다. 여호와가 (1) 그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웠고, (2) 그를 보내 아말렉을 치도록 했고, (3) 그들을 진멸하라고 명했다. 왜 그가 순종하지 않았을까? 순종의 문제는 하늘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항상 중추적 역할을 한다.

  「제임스왕역」에 따르면, 여기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그가 기름부음을 받던 때(9:21) 곧 미천한 직분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높임을 받았던 때를 상기시키고 있었다. 하나님의 종들을 유혹받을 수 없는 곳에 두거나, 아니면 그들을 유혹의 한가운데로 밀어 넣고는 굴복하면 용서해 주고, 그러고 나서 그들이 다시 죄에 빠져 살도록 허락하는 것이 그분의 계획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회복하여 바로 여기서 지금 죄와 싸워 이길 수 있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광야로 인도하여 사단에게 시험을 받게 했다(막 1:12). 사울은 여호와가 그를 사랑하며, 항상 도울 것이라는 분명한 증거를 받았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자기중심적인 본성을 알면서도 그의 좋지 못한 특성들을 고치고 이길 수 있는 온갖 기회를 주지 않았다고 비난할 수도 없었다. 하나님이 그에게 “새 마음”을 주었다는 사실(10:9)은 그가 원한다고 해도 옛 생활 방식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사울이 자고(自高)할 것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를 반드시 낮출 것이다.

15:20 나는…청종하여.

 패역하고 완고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불순종을 순종이라 우길 것이다. 사울은 이렇게 주장함으로써 자기가 바른 길에서 얼마나 멀리 이탈했는지를 보여 주었다. 하와가 “그 실과를 따 먹”은 것은 금단의 나무 실과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것을 “보았을” 때였다(창 3:6). 사람이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철회하고 마귀에게 맹세하는 것은, 하나님이 명확하게 도덕적 독약으로 규정한 것이 탐스럽게 보여 더 풍성한 삶의 식탁에 필요하다고 확신할 때이다. 하나님께서 나쁘다고 한 것이 좋게 보일 때, 사람은 이미 금단의 땅에 발을 들여놓았고 유혹자의 최면술 같은 호림을 방비할 길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는 자기의 영적 시력을 눈멀게 하고, 마음을 강퍅케 한 것이다(참조 출 4:21 주석; 엡 4:30).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고 경고했다(요 16:2). 초기 교회 시대부터(행 16:9~11; 참조 딤전 1:13)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극심한 박해는 종교라는 미명 하에 가해졌다. 은혜의 시기가 끝난 후에도 악인들은 계속 하나님에 대한 열성으로 종교의 형식을 유지할 것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615). 그렇게 오류를 위장하여 진리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 마귀의 가장 영악한 계책이다. 이 때문에, 위조의 명수인 사단이 그의 가장 성공적인 노력을 쏟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진 참된 증인은, 그들의 진정한 상태를 볼 수 있도록(계 3:18), 진리와 오류를 분간할 수 있도록, 사단의 간계를 간파하고 피할 수 있도록, 죄를 탐지하고 혐오할 수 있도록 그리고 진리를 보고 순종할 수 있도록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라고 권고한다(교회증언, V, 233).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그들은 사람의 계명을 하나님의 교훈으로 받아들일 될 것이다(참조 마 15:9).

15:20 아각를 끌어왔고.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지만 사실이다! 사울은 자기의 불순종의 극치를 보여 주는 소치를,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받은 하나님의 명령을 완벽하고도 온전하게 이행한 증거로 제시했다. 영적으로 눈 먼 상태에 빠진 그는 지금 그릇된 것을 바른 것으로 착각하고, 자신이 큰 승리(어떤 의미에서 큰 승리였다)로 생각하는 것에 사무엘이 이의를 제기하자 기분이 매우 상했다(참조 부조와 선지자, 629).

15:21 마땅히 멸할 것.

 이 구절 전체는 “바쳐진 것들”, “성별된 것들”, “저주받은 것들” 혹은 “멸망에 붙여진 것들”(「개정표준역」)을 뜻하는 히브리어 헤렘(h.erem)에서 왔다. 헤렘은 “일상의 용도로 사용하는 것을 금하다”, “하나님께 성별하다”, “절멸하다”를 의미하는 동사 하람(h.aram)에서 파생되었다. 아간은 “바쳐진 물건[헤렘]”을 개인적인 용도로 전용했다(참조 수 6:17, 18; 7:1, 11, 13, 15). 그 물건들 중에는 성소 봉사에 쓰기 위해 구별된(수 6:19) 금과 은이 포함되어 있었다(수 7:21). 어떤 사람이나 물건이 “저주를 받았다” 또는 “바쳐졌다”는 사실은, 반드시 그 사람을 죽이거나 그 물건을 파괴해야 함을 의미한 것은 아니고 그것들을 반드시 하나님이 지시한 대로 정확하게 처분해야 함을 의미할 뿐이었다. 은과 금을 제외하고는 성읍 가운데 있는 모든 물건을 진멸해야 했다(수 6:21). 그러나 은과 금 역시 “저주받은” 것, 다시 말해 “여호와께” 드리도록 떼어놓은 것이었다(수 6:17). 동일한 히브리어 단어 헤렘은 거룩한 용도로 쓰기 위해 “바쳐진” 헌물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참조 레 27:21, 28, 29; 민 18:14).

  “마땅히 멸할 것” 혹은 문자적으로 “바쳐진 물건들”에 관한 사울의 진술은 그렇게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의 성경적 용례에 비추어볼 때 새로운 의미를 띤다. 사무엘은 아말렉 사람들과 그들의 소유를 다 쳐서 “진멸[h.aram]”하라고 사울에게 지시했었다. 그것들은 단순히 “바쳐진” 것이 아니라 “진멸하도록 바쳐진” 것이었다. 사울은 하나님의 그 명령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결정할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백성”이 소떼와 양떼 중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남기기를 원했다고 사울이 한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아말렉 사람들의 소떼와 양떼를 취하도록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제사를 드릴 때 요구될 그들 소유의 동물들 대신에 아말렉 사람들의 동물을 드림으로써 치부하려 했을 것이다(부조와 선지자, 629). 그런 제안을 받은 사울은 간단히 허락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의 명령을 해석할 권리를 사취했다. 사울로 말하면 그는 우양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틀림없이 소유가 넉넉하여 그것 없이도 잘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관례에 맞게, 사로잡은 왕을 데리고 돌아온다면 그는 모든 이스라엘 앞에서 자신의 전공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할 수 있고, 그의 위신을 크게 드높일 수 있을 것이었다. 틀림없이 사울은 전사(戰士)로서 자신의 기량을 뽐낼 전시물로 아각을 보여 준 후에 공개 처형하려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무엘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아각을 친히 처형함으로써 사울이 전시하려고 마음먹었던 기회를 빼앗아 버렸다.

  사울은 우양과 왕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명성과 신민들의 부를 증대시키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자신이 선택한 방법으로 성취하려고 했다. 결국 왕과 짐승 모두 죽임을 당할 것이었지만, 이럭저럭 자기와 백성들은 그것들로부터 이득을 취하게 될 것이었다. 사울의 품성의 연약성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하나님을 섬기는 척하면서 실상은 자기의 이득을 먼저 챙기고 하나님의 이득은 맨 나중에 챙겼다. 아말렉 족속들과 그들의 모든 소유를 “바치라”는 명령과 함께 그들을 치라고 사울을 보낼 때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어떤 수단을 사용하여 바칠지 곧 죽여서 바치라고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음이 분명하다.

  사울은 그의 품성을 판가름하는 이 최후의 큰 시험에서 실패했다. 사울을 버리겠다는 선고가 철회될 수 있도록 그를 위해 밤새 기도했던 사무엘조차도(부조와 선지자, 630) 사울의 반역의 증거를 보았을 때 분노로 가득 찼다(부조와 선지자, 631). 사울이 하나님을 버렸으므로, 하늘은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도록 그를 버려 두었다. 사무엘은 사무엘대로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35절) 않았다. 사울은 백성들의 욕심에 굴복하고, 자신의 그릇된 결정을 그들 탓으로 돌리며, 사실상 하나님께 속한 영광을 자기가 취하려 함으로써 왕으로서의 자격을 완전히 상실했다.

15:21 길갈.

 길갈은 사울의 거처는 아니었지만 어떤 면에서 히브리 군주국의 수도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이곳은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넌 후 최초로 진 친 곳이며(수 4:19) 가나안 정벌 때는 군사령부가 위치했던 곳이다(수 10:15 등). 땅의 분할도 실제로 이곳에서 이루어졌다(수 14:6~17:18). 요단을 건넌 지 6, 7년 후 그 땅에 대한 일차적인 정벌이 완료되었을 때, 법궤를 길갈에서 실로로 옮겼다(수 18:1). 그때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산지 딤낫세라”에 거주했다(수 19:49, 50).

  실로에서 성소 봉사는 법궤를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긴 후 중단되었고(삼상 4:11; 시 78:60; 부조와 선지자, 609), 실로 성읍 자체도 파괴되었다(참조 렘 26:6, 9). 후에 법궤가 되돌아왔는데, 처음엔 벧세메스로(6:7~15), 그 다음엔 기럇여아림으로(7:1) 왔으며,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옮길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참조 삼하 6:2~12; 수 15:9, 60). 사무엘이 아마도 길갈을 포함하여(7:16) 여러 곳에서 제사는 드렸으나(부조와 선지자, 609), 이렇게 하여 하나님에 대한 예배는 어떤 의미에서 분산되었다. 사울이 길르앗 야베스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 사무엘이 그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 이스라엘을 길갈로 불러모았다(11:14, 15). 믹마스에 주둔한 블레셋 수비대를 치기 위해 병력이 소집된 곳도 여기였다(13:4). 이곳은 또한 아멜렉을 칠 때도 작전 기지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그곳으로 돌아가겠다는 사울의 제안 속에 암시되어 있다.

15:22 여호와께서…좋아하심같이.

 성령의 강권하심으로 사무엘은 장차 올 수많은 세월 동안 메아리치고 또 메아리칠 심오한 진리를 말했다(참조 시 51:16~19; 사 1:11; 호 6:6; 미 6:6~8).

15:23 왕을 버려.

 여기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변하는 이유가 명확하게 진술되어 있다.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사람이 자기의 길을 따르기로 선택할 때 하나님은 그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부득불 조건들을 재조정해야만 한다. 이스라엘이 왕을 원했을 때 하나님은 그 계획의 실행 가능성 여부를 검증해 볼 기회를 주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계속 왕 노릇하도록 허락했다는 그 사실이 그분께서 그를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하나님을 따르지 않을 생각이라면, 사울은 하나님의 자문 없이 통치에 대하여 자기 나름의 생각을 개발해 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지도하기를 꺼리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지도받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15:24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하나님이 왕으로서 사울을 버렸다는 사무엘의 선언이 있기 전에(23절), 사울은 자기의 행위를 완강하게 변호했다. 선고를 내리고 징벌을 제시하자 비로소 그는 하늘의 명을 어긴 것을 선선히 시인했다. 사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동반하는 변화된 삶의 증거를 나타내지 못했다. 그의 근심은 “세상 근심”이었다(고후 7:9~11). 렇게 시인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은, 바른 일을 하려는 진지한 소원이 아니라 그의 나라를 잃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 두려운 전망에 맞닥뜨리고서야 비로소 그는 가능한 한, 왕으로서 자신의 직임을 유지할 심산으로 회개하는 척했다. 그에게는 하늘의 인정보다 인간의 칭송이 더 중요했다.

15:25 내 죄를 사하시고.

 이 요구는 미스바에 모여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달라고 부르짖은 백성들의 요구와 얼마나 다른가!(7:6~8). 그는 사무엘에게 죄를 지었는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는가? 왕국을 잃을 경우 백성들 앞에서 체면 잃을 것을 염려하는 것만큼 그가 자신에게 필요한 마음의 변화를 염려했는가? 이러한 소위(所爲)의 참된 이유는 장차 그의 행동을 통해 명확히 드러날 것이었다

15:26 나는…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린 것을 알고 처음에는 왕과 함께 경배하기를 거절했다. 인간적으로 말해,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행한 일을 그토록 희미하게밖에 이해하지 못한 사람과는 상종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사무엘의 태도는 하나님의 태도를 반영했다. 만일 여호와께서 사울과 더 이상 아무런 교제도 하지 않을 것이라면(참조 28:6), 만에 하나 이와 같은 교제를 하나님이 인정하는 증거로 해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여호와의 대표자인 사무엘 역시(15:35) 아무런 교제도 할 수 없을 것이다.

15:28 왕보다 나은…이웃.

 기록된 사항으로만 따진다면,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울의 유일한 과오는 길갈에서 저지른 과오뿐이다(13:8~14). 그의 기록에는 밧세바와 헷 족속 우리아와 관련된 다윗의 경우와 같은 오점은 없었다. 두 사람 다 큰 죄인이다. 그들 사이의 차이는 자신의 죄를 지적받았을 때, 사울은 자기의 행위를 정당화했고(13:11, 12; 15:20), 다윗은 진심으로 회개했다는 사실에 있다(삼하 12:13; 시 51장).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다윗의 기름부음과 대관식은 아직 미래의 일이지만 하나님은 그 일이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말했다. 사울이 만회할 수 없을 정도로 왕의 역할을 계속할 자격을 상실했고, 따라서 그에 관한 하나님의 결정은 돌이킬 수 없었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따라 나라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주어진 바 되었다. 이제 사울이 경배를 통해서 어떤 일을 한다 할지라도(30절), 그 선고를 바꾸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었다. 기도로도 그것을 바꿀 수 없을 것이었다(참조 렘 7:16; 11:14; 14:11; 부조와 선지자, 630). 사울이 왕으로서는 버림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그의 개인적 유예 기간이 끝났거나 하나님께서 한 개인으로서 그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는 의미는 아님이 확실하다. 그는 아직도 개인적으로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었다. 이때 사울이 왕위를 기꺼이 버리고, 그 후부터 평범한 자연인으로 살려고 했더라면, 그는 구원을 얻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그는 분명 왕의 직임을 하나님의 뜻과 조화되게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15:29 이스라엘의 지존자.

 (「제임스왕역」에는 “이스라엘의 힘”[strength of Israel]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하나님의 이 칭호는 구약에서 단 한 번 여기에만 나온다. “힘”으로 번역된 단어는 네차흐(nes.ah.)로, “뛰어나다” 또는 “영속적이다”를 뜻하는 동사 나차흐(nas.ah.)에서 파생되었다. 이 문맥에서 하나님에 대해 이 명칭을 사용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 네차흐는 대체로 “영영히”로 번역된다(참조 삼하 2:26; 시 52:5 등).

15:29 변개.

 하나님의 “변개하심”에 대해서는 창 6:6; 출 32:14; 삿 2:18; 삼상 15:11 주석을 참조하라.

15:30 나로…경배하게 하소서.

 사울에게, 예배는 자기에 대한 백성의 충성을 확보하는 수단으로서만 중요할 따름이었다. 사울은 자신의 정책들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제시하여, 그를 좇음으로써 백성들이 하나님을 뜻을 행하고 있다고 믿게 하려고 했다. 사울이 하나님을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꾀하므로, 종교는 타락하여 공권력의 목적을 위한 것이 되고 말았다.

15:31 사무엘이 돌이켜.

 사무엘이 생각을 바꾼 것은 아마도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1) 그는 사울을 한 개인으로서 구원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하려고 했다. (2) 사울을 버린 것이 알려지면 이스라엘의 일부 불만 분자들이 그것을 반역의 구실로 이용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왕이 자기 뜻대로 하기 위해 하나님의 지도력을 배척했을지라도 정부는 질서 있게 계속 유지되어야 했다.

15:33 사무엘이…아각을 찍어 쪼개.

 이스라엘의 국법에 따르면(출 21:23, 24) 아각은 죽을 죄를 지은 자였으므로, 후일 엘리야가 갈멜에서 바알 선지자들을 참람죄로 처형한 것처럼(레 24:11, 16)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처형했다. 그는 아각을 죽임으로써 영민한 지도력에 대한 증거로 그 왕을 전시하려 했던 사울의 의도를 좌절시켰다.

15:35 사무엘이…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참조 26절 주석; 16:14.

15:35 그가… 슬퍼함이었고.

 사무엘은 처음에 이스라엘에게 왕을 주기를 꺼렸지만, 일단 왕이 뽑히자 그에게 과오가 있었지만 충성을 유지했다. 후에 다윗도 그랬지만, 사울은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였다(24:10). 사울이 따르기로 선택한 행동 노선에 대해 사무엘이 슬퍼한 것(15:11; 부조와 선지자, 630)은 그를 위해 진심으로 염려했다는 증거이다.


출처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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