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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9편 & 성경주석 본문

성경주석/시편

시편 9편 & 성경주석

Timberners-Lee 2016. 6. 2. 13:59

<시편 9편 서론>

다윗의시, 영장으로 뭇랍벤에 맞춘 노래.

시 9편은 감사의 노래로 불려 왔다. 이 시는 악인들을 벌하시고 압제당하는 자들을 변호하시는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오직 한 절(13절)만이 불길한 음조로 이 노래 전체에 흐르는 승리의 선율을 차단한다. 이 시는 답관체 시들, 곧 알파벳의 순서에 따른 시들 중 첫 번째 것이다. 하지만 이 시의 답관체 형식이 이 형식으로 지어진 다른 몇몇 시들에서처럼 엄격히 적용되지는 않았다. 첫째 연의 각 행이 히브리 철자의 첫 글자인 알레프(’alep)로 시작한다. 그 후에는 단지 각 연의 첫째 행만이 이 법칙을 따르고 있는데, 그것마저도 이 법칙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매우 규칙적으로 구획된 이 시는 동일한 길이로 된 열 개의 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에서는 답관체 시들에서 통상적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상을 형성하는 데 어떤 두드러진 진전이나 연속성은 없이 그저 그 사상이 여러 다른 측면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기만 한다. 이 시에 특정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음에도 어떤 사람들은 삼하 8장이 이 시가 지어진 적절한 배경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몇몇 히브리어 필사본들과 「70인역」 그리고 「불가타역」에는 9편과 10편이 하나의 시로 되어 있다.

* 뭇랍벤(Muth-labben) : 의미는 모호하다. 어떤 히브리 필사본들은 무트(mut) 앞에 "위에"(「제임스왕역」)로 번역되는 알('al)을 결합해 알무트('almut)라고 한다. 그러나 이 복합어도 설명할 수 없는 전문용어이다. 「70인역」은 이 복합어를 따라 알무트 랍벤('almut labben)이라고 번역했는데 이 의미는 "아들의 감추어진 것들에 관하여"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이 어떤 음조의 명칭이거나 첫 구절이며 "아들을 위하여 죽다"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편 9편 성경주석>

9:11. 전심으로. 

매우 깊은 감사의 마음으로 시가 시작된다. 이 시에서는 애정의 분열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모든 힘을 쏟고 있다. 더 나아가 그의 감사의 표현은 그저 입술로만 하는 표현이 아니라 전심으로 하는 표현이다.

9:1 주의 모든 기사를.

 시인의 찬양의 직접적인 주제는 그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복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열심을 낸다. 3~5절에 하나님의 특정한 개입이 언급되어 있다.

9:2 지극히 높으신.

 히브리어 엘룐(‘Elyon). 참조 시 7:17 주석.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분이다.

9:2 찬송하리니.

 히브리어 자마르(zamar), “시”를 의미하는 미즈모르(mizmor)라는 명사의 어근. 자마르에는 “노래하다”와 “악기를 연주하다”의 두 가지 의미가 다 들어 있다.

9:3 주의 앞에서.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원수는 엎드러진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승리를 가져오는 것을 의미한다.

9:4 나의 의와 송사.

 하나님은 의로운 송사를 변호하셨다. 그는 변호자이다.

9:4 앉으사.

 보좌에 앉아서(참조 7절) 송사의 시시비비를 결정하는 재판장의 모습에 대한 묘사이다. 그의 판결은 시인의 편을 든 판결이다.

9:5 열방.

 (「제임스왕역」에는 “heathen”[이방]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히브리어 고임(goyim), “나라들”(참조 시 2:1 주석).

9:5 저희 이름을 영영히 도말하셨나이다.

 어떤 민족이 정복당하면 이 땅에 있는 나라들 중에서 그 이름이 존속되지 않는다.

9:6 원수.

 이 절의 첫 행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원수-그들은 소멸될 것이다-곧 영원한 황폐”이다. 이 절은 원수의 완전한 멸망을 묘사한다.

9:7 여호와께서.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헴마(hemmah)와 더불어서 6절이 끝을 맺는다. 이 단어는 “그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 말이 문맥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번역판에서 이 단어를 번역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우가릿어에서 헴마가 “보라”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참조 68, 69쪽). 만약 헴마가 여기서 그 같은 의미로 쓰였다면 이 단어는 7절의 맨 앞에 위치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렇게 되면 7절의 앞부분이 “보라,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가 된다. 시인의 시대에는 쓰이지 않던 구두점을 헴마의 뒤가 아닌 앞에 찍으면 이 시의 답관체 형식이 보강된다. 이 같은 조정은 7절을 히브리어 철자 헤(he)로 시작하게 만든다. 현재의 히브리어 본문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

9:7 앉으심이여.

 (「제임스왕역」에는 “shall endure”[지속할 것이다]로 되어 있음-역자 주). 문자적으로 “앉다.” 6절의 멸망과는 전혀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공정한 심판을 행하면서 영원히 그 재판석에 앉아 계신다. “만상이 변하고 쇠퇴함을 보오니 오, 변치 않는 당신이시여, 나와 함께하소서!”

9:8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참조 계 20:12, 13. 하나님은 이 시의 배경이 되는 사건에서 자신을 의로운 재판장으로 드러내신 것처럼 마지막 심판에서도 그렇게 하실 것이다. 넷째 연을 구성하는 7절과 8절은 답관체 형식을 따르지 않는다.

9:9 산성.

 히브리어 미스가브(misgab), “안전한 고지(高地).” 참조 시 18:2; 46:7; 48:3.

9:10 주의 이름을 아는.

 참조 시 5:11; 7:17 주석.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은 그의 품성을 익히 아는 것을 의미한다.

9:10 의지하오리니.

 하나님은 율법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행위의 공정성을 신뢰할 수 있는 분이다(참조 시 62:8; 64:10; 111:5).

9:10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의 자녀들을 버리지 않는다.

9:11 시온.

 참조 시 2:6 주석; 시 3:4; 5:7.

9:11 찬송하며.

 시인은 하나님의 거룩한 품성과 사람들에게 베푸신 그의 인자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와 함께 그를 찬양할 것을 요청한다.

9:11 백성 중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행하신 놀라운 일들이 열방에 선포됨으로 그들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또한 그의 보호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비는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참조 시 105:1). 이 사상은 시편 전체에 흐르는 사상이다. 만약 이스라엘이 이 교훈을 깨달았다면 바리새인들이 행한 완고한 배타적 행위들은 처음부터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9:12 심문하시는.

 “심문하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동사가 “찾다”로 번역된 창 9:5을 참고하라. 하나님이 죄 있는 자들을 벌하러 나아오는 형집행자로 묘사되어 있다. 하늘의 관점에서 볼 때 살인은 극악한 범죄행위이다. 피의 보수자인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일을 간과하실 수 없다(참조 창 4:10). 그는 이스라엘의 최근친이며, 무죄한 피흘림에 대하여 복수하기로 서원하였다.

9:12 가난한.

 다시 말해서 “고통받는.”

9:13 사망의 문.

 히브리인들은 사망을 죽은 자들의 상징적인 거처인 셔올(s∨e’ol)과 연관시켰다. 시적인 영상에서 이 셔올은 문들이 있어서 그 출입이 통제되는 장소로 여겨졌다(사 38:10). 바벨론적 개념에서는 셔올이 죽은 자들을 가두어 놓는 성읍이었는데, 이 성읍은 그들이 산 자들의 땅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도록 빗장이 이중으로 된 일곱 개의 문이 있는 칠중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시인은 자신이 사망의 문에 너무나도 가까이 이르러 있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이 자기를 거기에서 건져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지금 그가 처해 있는 위험 중에서 자신의 구원을 위해 그분을 바라본다. “사망의 문”이라는 구절은 시 107:18에도 나온다. 시 9편 전체에서 오직 13절에서만 연속적인 승리의 선포가 중단된다.

9:14 전할 것이요.

 죽은 자들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기 때문에(시 88:10~12; 115:17) 시인은 산 자들 중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그에게 청한다.

9:14 딸 같은 시온.

 (「제임스왕역」에는 “daughter of Zion”[시온의 딸]로 되어 있음-역자 주). 예루살렘의 거민들. 시온 곧 예루살렘은 모성(母城)으로 여겨졌다. 여기와 위의 11절에서 “시온”이란 이름이 나오는 것은 이 시가 시온 곧 예루살렘이 나라의 수도와 예배의 중심지가 된 후에 지어진 시임을 보여 준다.

9:14 문.

 “사망의 문”(13절)과는 대조적으로 이 문은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소식을 나누는(고대에 일간 신문 같은 역할을 함) 성읍의 입구에 위치해 있는 문이었다. 그곳은 (헬라인들의 아고라나 로마인들의 포룸처럼) 어떤 소식을 널리 알리기에 편리한 장소였다.

9:15 열방.

 (「제임스왕역」에는 “heathen”[이방]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시인을 향하여 포진하고 있는, 우상을 숭배하는 열방들(참조 시 2:1; 9:5 주석).

9:15 웅덩이에.

 이 구절과 다음 구절은 시 7:15과 동일한 사상을 표현한다. 포획 놀이의 두 가지 방식이 여기서 비유적 표현으로 쓰이고 있다. 사상이 아래 16절에서 다시 되풀이된다. 이 형벌은 그 범죄에 적합한 형벌이다.

9:16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열방의 해악이 그들 자신들의 머리로 되돌아가도록 함으로 하나님이 그의 구원하는 능력을 만민 앞에 드러냈다.

9:16 그 손으로.

 참조 15절; 시 7:15.

9:16 힉가욘.

 이 단어는 이곳 말고 다른 곳에서는 “묵상”으로 번역된 시 19:14과 “정숙한 소리”로 번역된 시 92:3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이 단어는 뜻이 모호하다. 또한 이 시의 이 지점에서 왜 이 말이 첨가되었는지를 설명하기도 쉽지 않다. 이것은 음악적 음향 또는 공적인 연주 때의 막간을 표시하는 것일 수 있다.

9:17 돌아감이여.

 문자적으로 “돌아갈 것이다.” 동일한 히브리어 동사가 3절에서는 “물러가다”로 번역되어 있다.

9:18 궁핍한 자.

 이 단어와 이 절의 후반부에 나와 있는 “가난한 자”라는 단어는 빈곤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압제의 희생자들까지도 의미한다(참조 12절 주석). 궁핍하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보살핌은 구약의 위대한 진리들 중 하나이다.

9:18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

 17절의 “잊어버린”이라는 단어에 대한 말놀이. 하나님은 그의 구원과 보호가 필요한 자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9:18 실망치 아니하리로다.

 구원에 대한 열렬한 소망을 의미한다. 가난한 자들과 궁핍한 자들이 항상 실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9:19 여호와여 일어나사.

 시인은 하나님께 이 땅의 심판자로서 그의 자리에 앉으시라고 엄숙하게 호소한다(참조 시 3:7 주석)

9:19 인생.

 히브리어 에노쉬(’enos∨). 힘있는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현저한 대조를 이루는 약하고 무력한 모습의 “사람”을 가리킨다(참조 시 8:4 주석).

9:19 목전.

 히브리어 파네(paneh), 문자적으로 “얼굴.” 우가릿어(참조 68, 69쪽) pn도 얼굴을 의미하긴 하지만 이에 더하여 “뜻” 또는 “목적”이라는 의미와 함께 사용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실례를 아마르나 편지에 사용된 가나안어 파누(pa

 nu)에서 찾아볼 수 있다(참조 제1권, 116~118). 따라서 여기와 다른 몇몇 구절들(이 단어가 “진노”로 번역된 시 21:9, “면책”으로 번역된 시 80:16, “낯”으로 번역된 시 82:2)에서는 파네(paneh)가 “뜻”으로 번역되는 것이 옳은 듯하다. 이같이 번역하면 이 본문은 “열방으로 주의 뜻을 따라 심판을 받게 하소서”가 된다.

9:20 두렵게.

 히브리어 모라(morah). 이 단어는 그 자음의 구성이 “선생”을 의미하는 단어와 동일하다. 「70인역」과 「수리아역」은 이 독법을 따른다. 어떤 번역판들은 모라(morah)를 모라(mora’), “두려움”의 철자를 잘못 쓴 것으로 간주한다(「제임스왕역」, 「개정표준역」). 또 다른 이들은 이 단어를 므에라(me’erah), “저주”의 철자를 잘못 쓴 것으로 본다. 이 경우에는 이 구절이 “그들에게 저주를 내리다”로 번역된다.

9:20 인생.

 히브리어 에노쉬(’enos∨). 19절에 나온 것과 동일한 단어. 이 시는 온 땅의 심판자의 눈에 비친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강조로 끝을 맺는다.


출처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제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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