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ORY

시편 36편 & 성경주석 본문

성경주석/시편

시편 36편 & 성경주석

Timberners-Lee 2016. 7. 12. 06:37

<시편 36편 서론>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시 36편에서 시인은 악인들의 죄된 행위를 배경 삼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송축한다. 1~4절은 인간의 사악함에 대한 일반적인 묘사이고, 5~9절은 하나님의 속성들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며, 10~12절은 마음이 정직한 모든 자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내보여 달라고 하는 믿음의 기도이다. 이 시는 매우 아름다운 문체로 되어 있다. 1~4절은 악인에 대한 간결한 묘사이다. 도덕적 타락은 다음과 같은 세 단계로 진행된다. (1) 양심을 무시하고 짓는 죄, (2)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죄, (3) 완전히 타락해 버린 양심의 부추김을 받아 짓는 죄. 마음의 죄(1~2절) 다음에는 혀의 죄(3절)가 따르며 혀의 죄 다음에는 손의 죄(4절)가 따른다. 이처럼 죄악을 점층법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시편 36편 개역한글>

1.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2. 저가 스스로 자긍하기를 자기 죄악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3. 그 입의 말은 죄악과 궤휼이라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4. 저는 그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불선한 길에 서고 악을 싫어하지 아니하는도다   

5.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6.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시나이다

7.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인생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   

8. 저희가 주의 집의 살찐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수로 마시우시리이다   

9.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10. 주를 아는 자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하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의를 베푸소서   

11.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미치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   

12. 죄악을 행하는 자가 거기 넘어졌으니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


<시편 36편 성경주석>

36:1 내 마음.

 몇몇 히브리어 필사본들과 「70인역」 그리고 「수리아역」에는 “그의 마음”으로 되어 있다. 이 같은 번역이 문맥에 더 잘 어울리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첫 번째 문장이 문자적으로 “악인의 심중에서 그에게 하는 죄악의 말” 또는 “죄악이 악인의 심중에서 그에게 이르기를”이 된다.

36:1 이르기를.

 히브리어 느움(ne’um), “말.” 이 단어는 모두 361회 나오는데 이곳 말고는 모두 일반적으로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창 22:16 등)이라는 표현에 나오는 대로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내는 데에만 쓰였다. 때로는 선지자가 말하는 자로 등장하기도 한다(민 24:3, 15; 잠 30:1). 지금 논의 중인 절에서 이 단어가 쓰인 것은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죄악이 의인화되어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나타나 있다. 죄가 죄인에게 다가와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 것처럼 그에게 말을 한다.

36:1 두려워함.

 히브리어 파하드(pah.ad), “떨림”, “공포.”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여호와를 경외함”(참조 시 19:9 주석)이라는 표현 속에 나타나 있는 “경외함”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다. 파하드는 “숭배” 또는 “예배”의 의미를 지닌 “두려움”이 아닌 “원수의 두려움”(시 64:1)이나 “재앙의 두려움”(잠 1:33)처럼 “공포”의 의미를 지닌 “두려움”이다. 바울은 악인들의 부패한 모습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시 36:1의 두 번째 문장을 인용하고 있다.

36:2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히브리어 본문에서 이 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없다. 이 절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그가 자기의 죄를 발견하여 미워하기까지 자기의 눈앞에서 자신에게 아첨하는도다”가 된다. 여기서 시인이 의미하는 바는, 악인들이 자기 자신들의 죄가 드러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벌을 받지도 않을 것이라는 이론을 가지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것인 듯하다.

36:3 지혜.

 3, 4절은 악의 발전 과정을 보여 준다. 선행을 그치는 데에서 시작하여, 죄악을 꾀하고, 악을 행하기로 작정하며, 마침내는 양심의 가책 없이 악을 행한다.

36:4 죄악.

 즉 “헛된 일.”

36:4 악을 싫어하지 아니하는도다.

 희망이 전혀 없는 타락한 죄인에게는 죄의 죄됨이 그 행위를 억제하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 그는 죄된 행위의 부도덕성을 깨닫지 못한다.

36:5 주의 인자하심.

 히브리어 헤세드(h.esed). 참조 7절 주석. 시인은 여기서 1~4절의 주제와는 현저히 대조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찬양하는 쪽으로 방향을 갑자기 선회한다(참조 시 33:4 주석). 이 같은 갑작스런 전환은 히브리 시의 전형적 기법이다.

36:5 하늘에.

 시인은 돌연히 타락한 인간 세상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속성들이 거하는 무한한 우주를 향해 치솟아 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안에”(in)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전치사 브(be)가 이에 상응하는 우가릿어의 어휘에서 볼 수 있듯이 “~로부터”(from)라는 의미로 쓰일 수도 있기 때문에(시 18:13 주석), 이 구절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하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36:6 하나님의 산들.

 (「제임스왕역」에는 “the great mountains”[큰 산들]로 되어 있음-역자 주).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산들.”

36:6 큰 바다.

 히브리어 트홈(tehom). 최초의 대양을 일컫는 데 쓰인 단어(참조 창 1:2 주석). 시인은 여기서 하나님의 판단을 다함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36:6 사람과 짐승.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극치인 사람으로부터 들짐승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그의 손으로 만드신 모든 피조물을 돌보신다(참조 시 145:9). 시 104편에 표현된 것과 같은 말 못하는 짐승들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주목하라(참조 욘 4:11). 그리스도인들은 말 못하는 짐승들에게도 친절히 대해야만 한다(참조 부조와 선지자, 443).

36:7 인자하심.

 히브리어 헤세드(h.esed). 5절에서는 “자비”로 번역됨(「개역한글판」에는 이 단어가 5절과 7절에서 모두 “인자하심”으로 번역되었지만 「제임스왕역」에는 5절은 “자비”(mercy)로 번역되고 7절은 “인자하심”(lovingkindness)으로 번역되었음-역자 주). 이 시에 대한 추가적 설명을 참조하라.

36:7 보배로우신지요.

 (「제임스왕역」에는 “excel-lent”[뛰어난]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히브리어 야카르(yaqar), “귀한”, “값진.”

36:7 주의 날개 그늘.

 참조 시 17:8 주석; 신 32:11, 12.

36:8 저희가…풍족할 것이라.

 히브리어 라와(rawah). 문자적으로 “자신의 그릇에 가득 찬 것을 마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풍족히 공급하신다.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바가 넘치도록 풍성하기 때문이다(참조 엡 3:20; 눅 6:38). 하나님은 은혜가 흘러넘치는 주인이다(참조 시 23:5).

36:8 주의 복락.

 사람이 조장한 가식적 기쁨이 아닌 하나님의 참기쁨. 반즈(Barnes)는 이 절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들을 발견하였다. (1) 하나님은 행복하시다, (2) 신앙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3) 이 행복은 하나님의 행복과 동질의 행복이다, (4) 이 행복이 영혼의 필요를 채워 준다, (5) 이 행복을 소유한 영혼은 그 누구도 불만족을 느끼지 않는다, (6) 이 행복은 특히 하나님의 전에서 예배드리는 일과 연관되어 있는 것임이 드러났다. 참조 부조와 선지자, 413.

36:8 강수.

 이 비유는 종종 물 부족을 경험하는 팔레스타인 거민들에게 특히 설득력이 있는 비유였다.

36:9 생명의 원천.

 실제적인 생명과 영적 의미의 생명 또한 이생에서의 생명과 내세에서의 생명.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일 뿐 아니라 그 생명에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기도 하다(참조 잠 9:11 주석; 시 34:12; 요 1:4; 4:10; 5:26; 교육, 197, 198).

36:9 주의 광명 중에.

 하나님은 빛의 근원이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그분 안에서만 빛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우리가 깨닫는 모든 것이 다 어두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려야만 한다. “내 안에 있는 것은 어둠뿐이오니 내게 빛을 비추어 주소서”(Milton). 참조 요 3:19, 20; 요일 1:5~7; 벧전 2:9.

36:10 주를 아는.

 하나님은 그를 아는 지식이 사람을 구원으로 이끌도록 계획하신다(참조 요 17:3; 잠 1:2 주석).

36:10 인자하심.

 히브리어 헤세드(h.esed). 이 시에서 세 번째 나옴(참조 7절 주석; 5절).

36:10 계속하시며.

 시인은 하나님의 은총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요청하고 있다.

36:11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

 시인은 거만한 죄인이 자기를 짓밟지 못하게 해달라고 또한 그가 하나님이 세우신 그 자리에서 자기를 쫓아내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도드린다.

36:12 거기.

 시인은 자신의 기도가 이미 응답되었음을 깨닫고는 우리의 주의를 악인들의 완전한 멸망을 보여 주는 하나님의 의의 계시 장면으로 이끌어간다. 이 시는 의기소침한 중에 시작되어 승리로 끝을 맺는다. 


<시 36편에 대한 추가적 설명>

헤세드(h.esed)는 영어로 적절히 번역하기가 매우 어려운 히브리어 단어이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구약에 245회 나온다. 「제임스왕역」에는 이 단어가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번역되어 있다. “은총”(favour) 3회, “선행”(good deed) 1회, “아름다움”(goodliness) 1회, “선하심”(goodness) 12회, “애정”(kindness) 38회, “인자하심”(lovingkindness) 30회, “자비로운 친절”(merciful kindness) 2회, “자비”(mercy) 151회, “불쌍히 여김”(pity) 1회, “상냥한”(kindly) 5회, “자비로운”(merciful) 1회. 「70인역」에서는 헤세드가 “자비”라는 의미의 엘레오스(eleos)로 135회 번역되었으며, 그 외에는 디카이오쉬네(dikaiosune, “의”), 엘레에모쉬네(eleemosune, “불쌍히 여김” 또는 “자비”), 엘피스(elpis, “소망”), 독사(doxa, “영광”) 등으로 번역되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번역가들은 이 헤세드라는 단어를 광범위한 의미의 미덕으로 보았음이 분명하다. 

 헤세드는 (1) 개인들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는 일과 (2) 하나님과 인류의 관계를 묘사하는 일에 쓰였다. 전자의 실례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1) 아들과 그의 죽어가는 아버지의 관계(창 47:29), (2) 남편과 아내의 관계(창 20:13), (3) 친족들 사이의 관계(룻 2:20), (4) 손님들 사이의 관계(창 19:19), (5) 친구들 사이의 관계(삼상 20:8), (6) 왕과 그의 신하들 사이의 관계(삼하 3:8). 헤세드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묘사한 것은 그 실례가 매우 많다. 시 36편이 그중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헤세드는 하나님께 적용될 때 그분의 속성들과 관계들과 사람들을 대하시는 방법을 묘사하며, 사람들에게 적용될 때에 태도와 관계들과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묘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히브리어 헤세드의 의미를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전달해 줄 수 있는 영어 단어는 없는 듯이 보인다. “자비”(mercy)나 “불쌍히 여김”(pity) 그리고 “친절”(kindness)이 그 의미의 각기 다른 측면들을 바르게 묘사하고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헤세드가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를 묘사하는 용어로 쓰였을 경우에는 이 중 어떤 것도 그 전체적인 의미를 온전히 나타내지는 못한다. 

 헤세드를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라는 측면에서 숙고해 볼 때,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특성으로서 그토록 현저하게 나타나는 “사랑”이라는 단어(요일 4:7, 8 등)가 구약에서는 매우 드물게 등장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히브리어 명사 아하바[’ahabah]는 하나님에 관해서 신 7:8; 왕상 10:9; 대하 2:11; 9:8; 사 63:9; 렘 31:3; 호 3:1; 9:15; 11:4; 습 3:17 등 단지 열 번밖에 쓰이지 않았다. 그 동사 역시 모세오경에서 신 7:13과 23:5 등 두 번 나오고 다른 곳들에서는 그저 이따금 한 번씩 나올 정도로 드물게 사용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 시대의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이 속성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으며 또한 그것을 칭송하는 경우도 매우 드물었다고 결론지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오히려 신약 기자들이 아가페(agape-, “사랑”)라고 묘사한 것(참조 마 5:43 주석)을 구약 기자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헤세드로 일컬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감스럽게도 영어의 “love”(사랑)이라는 단어는 관능적 열정과 정욕으로부터 시작하여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자상하고 인정 많은 관계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경험들을 다 포괄하고 있다. 이 때문에 “사랑”(love)이라는 번역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일 경우에 많은 사람이 그 의미를 부분적으로만 이해하거나 혹은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그보다 더 나은 단어를 찾기가 힘들기 때문에 “사랑”(love)이 신약에서 아가페의 번역들 중 하나로 계속해서 쓰이고 있다(「제임스왕역」은 26회에 걸쳐 아가페를 “자애”[charity]로 번역하였다. “자애”가 사랑의 원숙함을 더욱 뚜렷이 드러냈던 시대에는 이 단어가 아가페에 대한 적절한 번역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자애”라는 용어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자선 행위와 너무나도 폭넓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이 단어를 아가페에 대한 번역으로 쓰기에는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 그러나 만일 이 “사랑”을 성경 기자들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그러한 성질의 거룩한 사랑으로 이해한다면 또한 만일 “사랑”에서 영어에서는 때때로 그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지만 아가페라는 헬라어 단어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바람직하지 못한 의미들을 제거해 버린다면, 헤세드가 하나님의 속성을 묘사하고 있는 경우에 한해서 우리는 그 단어의 꽤 정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헤세드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적용될 때에는 이를 “사랑”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지 않다. “사랑”은 일반적으로 추상적 용어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원칙으로 여겨지고 있다. “사랑”이 구체적인 경험을 표현하는 용어로 쓰일 때는 더 이상 “사랑”(love)으로 쓰이지 않고 각 경험에 걸맞은 적절한 다른 용어들로 바꾸어 사용된다(참조 고전 13장). 한편 헤세드는 사랑의 추상적 원칙뿐 아니라 그 원칙의 다양한 외적 표현들을 나타내는 데에도 쓰인다. 이런 까닭에 요셉은 술 맡은 관원에게 헤세드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였다(nesis/40/14e). 이 경우에는 이 단어를 “사랑”으로 번역하는 것보다 헤세드의 구성 요소들 중 하나인 “친절”(kindness, 「개역한글판」에는 “은혜”로 되어 있음-역자 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정탐꾼들을 숨겨준 라합의 행위가 헤세드의 행위로 묘사되었다(수 2:12). 요셉 족속들이 제안한 비밀스런 정보의 대가는 그 정보를 준 벧엘 사람에게 헤세드를 베푸는 것이었다(삿 1:24).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행한 느헤미야의 “선한 일”이 하사딤(h.asadim, 헤세드의 복수형, 느 13:14)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욥은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헤세드를 베풀어 줄 필요성에 관해서 말하였다(욥 6:14). 반의대구법에서 현인은 헤세드를 잔인함의 반대 개념으로 제시하고 있다(잠 11:17). 이처럼 헤세드가 사람 상호간의 관계에 쓰일 경우에는 대체로 사랑의 일반 원칙이 표현하고 있는 당시의 구체적 행위를 나타내는 특정한 용어로 번역되었다. 고대 번역판들과 현대 번역판들 모두 이 같은 규칙을 따르고 있다. 좀 더 일반적인 원칙을 묘사하는 사람의 헤세드에 관해서는 미 6:8이 실례가 된다. 이 말씀은 공의와 인자와 겸손이 참신앙의 본질적 요소들이라고 설명한다.

 이와 동일한 원칙이 헤세드가 하나님의 “사랑” 행위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나타낼 때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의 종이 헤세드를 위해 간구하였을 때 그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하나님의 헤세드의 특정한 측면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 경우에는 이 단어가 “사랑”보다는 “친절”(kindness)이나 “은총”(favor)으로 번역되는 것이 더 적절한 듯이 여겨진다. 반면에 헤세드가 일반적인 의미로 쓰일 때에는 그것을 “사랑”으로 번역하는 것이 매우 적절하다. 시인이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헤세드)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라고 말한 것은 곧 “하나님이여 주의 사랑(love)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시 36:7)라는 의미로 한 것이다. 또한 “그 인자하심(헤세드)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 2, 3 등)라는 말은 “그 사랑이 영원함이로다”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

 헤세드와 동일한 어근에서 파생된 하시드(h.asid)라는 형용사는 문자적으로 “헤세드를 행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경건한 사람”(godly man)으로 1회, “선한”(good)으로 1회, “거룩한”(holy)으로 4회, “거룩한 자”(Holy One)로 1회, “자비로운”(mercuful)으로 3회, “성도”(saint)로 19회, “경건한 것”(that is godly)으로 2회 번역되었으며 또한 “경건치 못한”(ungodly)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번역된 경우도 1회 있다. 「70인역」에서는 22회에 걸쳐 하시드가 “거룩한”(holy) 또는 “경건한”(pious)이라는 의미의 호시오스(hosios)로 번역되었다. 헤세드가 하나님의 두드러진 속성들 중 하나이기 때문에 하시드한 사람은 곧 거룩한 사람 혹은 “성도”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볼 때 하시드는 신약에서 아가페(agape-, “사랑”)로 표현된 의미(고전 13장; ; 4:7, 8; 5:3)와 거의 유사한 의미를 지닌 단어가 된다. 이 형용사는 종종 복수형인 하시딤(h.asidim)으로 나오기도 한다.

 요약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그 전체적인 측면에서 고려할 때는 헤세드를 하나의 실용적 원칙으로서의 “사랑”으로 번역할 수 있다. 특정한 모습들이 강조되거나 사람 상호간의 관계를 나타낼 때에는 문맥에 따라서 적절히 번역해야만 한다.


출처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제6권


'성경주석 > 시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편 38편 & 성경주석  (0) 2016.07.14
시편 37편 & 성경주석  (0) 2016.07.13
시편 35편 & 성경주석  (0) 2016.07.11
시편 34편 & 성경주석  (0) 2016.07.08
시편 33편 & 성경주석  (0) 2016.07.07
Comments